마지막 마법사
해도연 지음 / 구픽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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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구픽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후회와 기회, 얼핏 보기에 전혀 관계 없는 두 단어에는 미련이라는 고리가 있다. 기회를 놓친 자는 후회하게 된다. 놓친 기회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나 그저 놓쳤다고 생각될 뿐이더라도, 미련이 남는다. 어떤 미련은 잊을 수 없는 후회가 된다. ‘생을 관통한다’는 건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다양한 장르의 패치워크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읽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현실은 활극이 아니라서, 어떤 상상은 현실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현실의 비극은, 생이 강제로 끊기고 지워지고 뜯겨나가는 그 모든 일들은 만화처럼, 소설처럼 잠시간의 묘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작품 또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생각한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끌어안는 마음을, 영원이 나뉘는 순간에 자기 자신을 버려서라도 누군가를 지키는 마음을, 너를 지킬 수 있어 좋았다고 말하는 그 마음을.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상상은 현실을 넘어서지만 현실은 상상 그 이상이기 마련이니까.

p.97 “2만 5000명이라고요! 내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걸 또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전 역사 교과서에 최악의 재난을 방치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싶지 않다고요!”

p.171 전철이 승강장으로 들어오자 세나는 사람들을 비집고 올라탔다. 수만 명의 사상자가 확인된 사고가 있었더라도, 다음 날 아침에 어김없이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이 전철 안을 가득 채웠다.


난세의 영웅이 기껍지 않다고 수차례 말해왔다. 그 말은 영웅의 영광 아래 가려지는 수많은 참극이 기껍지 않다는 말이다. 소수의 영웅,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게끔 하는 난세가 기껍지 않다. 그런 세상 따위 없을수록 좋다.

동시에, 난세가 아니더라도 저마다의 세상에서 누군가는 영웅이다. 그 자신조차도 영웅이다. 영웅은 대의를 위해 세상을 갈아넣는 이가 아니다. 난데없이 끌려든 이가 영웅이다. 정확히는,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징징대면서도 뛰어드는 이가 영웅이다.

p.113 세나는 뉴스를 보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했다. 자기가 조금 전까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 전화 한 통이라도 했다면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동시에 모든 것을 새로이 얻는 그 때에, 단 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당신 또한 모두를 구하기 위해 애쓸 수 있겠느냐고, 기꺼이 그러겠느냐고,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그 시간에 다시 한 번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이 질문은 어떤 날의 깨달음을 닮았다. 아니, 반복한다. 자 들어보세요. 당신은 철로를 달리는 트롤리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로 시작하는 그 진부하고도 괴로운 질문 말이다. 아무리 봐도 답이 없는 이 질문(과 그 변주들)에는 딱 한 가지 해답이 있다. 어쩌면 탈출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자기희생, 다른 이와 나란한 선에 자기를 두기. 오직 그것만이 답이 될 수 있다. 나에게 누군가를 해칠 권리가 없는 것처럼, 누군가의 참극을 방관할 권리가 없는 것처럼. 그것이 ‘나를 위해서’라면. 달리는 열차 앞에 놓인 누군가를 차마 두고 볼 수 없다면 내 몸을 던지는 수밖에.


어쩌면, 작가의 상상이, 그가 그려내보이는 ‘만약에’가 언젠가에 보내야만 했던 애도일지도 모른다. 후회란 그런 것이다. 그랬어야 했다고, 내가 했어야만 했다고, 돌아갈 수만 있다면 주저않고 나서겠노라고, 몇 번이고 되뇌이게 하는 수많은 ‘만약’이 후회의 다른 이름이다. 기회와 후회는 그렇게 이어진다.

어떤 깨달음, 도저히 혹은 차마 무엇을 어찌할 수가 없음을, 단 한 번의 기회가 남았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사람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알고도 그럴 수는 없기 때문에, 세상 모두가 모를지언정 나 하나만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내게 영웅은, 볼품없고 나약한, 봉변처럼 내세워진 이다. 울며불며 발을 구르면서도 차마 어찌할 수 없어 돌아서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영웅의 조건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 또한 영웅의 이야기이다. 온 세계를 지켜내는 존재의 이야기이다.

“널 지킬 수 있어 좋았어. 지키게 해줘서 고마워.”

p.221 세나의 인격은 과거를 품으면서도 세나라는 인물을 초월해 완전히 새롭게 구성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윤세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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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 헤리티지 - 공단과 구디 사이에서 발견한 한국 사회의 내일
박진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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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어디 사세요? 어디에서 오셨어요?

내게는 이 질문에 답할 말이 없다. 없다기보단, 만족스러운 답은 내놓을 수 없다. 오래 산 곳도, 좋은 기억으로 가득한 곳도, 익숙하다못해 눈 감고도 찾아다니는 길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 곳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 적이 있느냐 하면 그저, 아니요. 사는 곳이 그냥 사는 곳이지, 밖에.

어쩌면 지레 겁을 먹고 마음을 남기지 않으려 애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살면서 수도 없이 마주했던 아름다운 동네, 곳곳에 정 붙인 골목들에 추억과 시간이라는 이름을 붙여 끌어안는 순간, 변화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사라지기 마련인 것들에 오래도록 슬퍼할 것이다.

나는 그런 슬픔을 견딜 수 없는 인간이라고 오래 생각해왔다. 연습으로도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남의 동네, 거주가 아닌 방문의 장소로 여길 수 있는 곳만을 조금 떼어내 모아두며 살아왔다.


그러나 가까이서, 오래,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해도 뜨기 전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 한낮의 버스 안에서 피로에 지친 얼굴로 졸고 있는 사람, 같은 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조금씩 달라지는 옷차림, 척 봐도 멀리서 온 티가 나는 사람(과 짐가방), 사라지는 건물들, 바뀐 주소와 골목 등.

곰곰이 생각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어떤 장소를 생각한다는 것은, 그곳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그려보는 일은 배경으로 밀려난 공간을 전경의 지위에 놓는 것과도 같다. 뭉뚱그려진 장소와 사람의 시간을 살며시 펼쳐보이는 일과도 같다.

어떤 동네는 이름만 들어도 다 안다. 혹은 이름만 들어도 혐오 섞인 우려가 튀어나온다. 어쩌면 회상으로의 여행에 동참할 수도 있겠다. 저자의 ‘구로’는 그런 곳이다. 누군가에게는 공단, 어떤 이에게는 디지털단지, 또 다른 이에게는 “그 중국인 많은 동네”.


그저 다니기 싫은 곳일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곳일까. 수많은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한, 낡고 어두운 곳일 뿐일까. 위험하고 후줄근한 곳일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곳은 역사의 중심이었고, 변화의 중심이었고, 탄생과 성장이 있는 곳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우수하다”거나 “이제는 더 이상 나쁘지 않다”가 아니라, 그런 역사가 있었고 여전히 누군가가 태어나 자라 살아가는 곳이기에 마찬가지로 특별하다고, 다른 곳이 그러하듯 이 도시 또한 경이와 매혹으로 가득한 삶의 터전이라고.

여기서 멈춘다면 이 책은 어느 날의 소묘, 정도로 일축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가 도시의 경계를 넘어서는, 현대 사회의 일면을 들여다보기를 요구한다.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니,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고. 이 문제는 당신에게 이 도시가 그러하듯 ‘남의 것’으로만 남을 수 없다고.


구로는 오래된 도시다. 필연적으로 가난하고 바쁜, 선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가득했다. 그렇게 성장했다. 구로에도 일하는 사람이 산다. 첨단기술과 부의 중심인 어떤 곳과는 사뭇 다를지언정, 구로에는 노동의 역사가 있다. 삶의, 쉼 없는 변화의 역사가 있다.

이 도시를 아시나요? 이 곳의 시간을 아세요? 어떻게 만들어지고 자라 빛이 바래고 낡아가시는지, 낯섦으로 가득한 곳이 되었는지 들어본 적이 있나요?

구로의 역사와 개인의 추억을 직조해가며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
면, 그 곳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독자 또한 저자의 ‘구로‘를 알게 될 것이다. 적어도, 궁금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묻는다. 어디서 오셨어요? 당신의 ‘곳’은 어디인가요? 그곳은 어떤 곳인가요. 어떤 일이 있었나요. 그 동네는, 당신의 ‘곳’은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나요. 당신의 장소와 시간을,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세계에 가 닿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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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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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집에 관한 이야기이자 집을 둘러싼 마음들의 이야기. 라는 소개를 보았다. 자,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언젠가 스쳐지나간, 혹은 옆자리에 잠시 머물렀던 어떤 사람의 곁을 따라 여행하는 독자는 유령이다. 그렇다면 머무르고 숨쉬고 부서지고 휘청이는 이는 무엇이라 불릴 수 있는가? 그는 말할 수 있는가? 서술하시오.

문학에서까지 구질구질한 현실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도리어 묻고 싶다. 어째서 상상이 현실보다 언제나 낫다고 생각하는지. 구질구질하고 평범하고 가난한 삶은 안타까운 눈물을 자아내는 소문 너머, 꼭 그만큼의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누군가의 어떤 현실은 재현되기를 제한당해야만 하는지.

끝없이 작고 상냥하게, 은근하게 이어지는 굴욕, 선뜻 주어지는 동정, 말하고 싶지도 들키고 싶지도 않은 치부가 까발려지는 마음, 삶, 몸, 돈, 공간, 집.

p.87 그것이 만옥을 두렵게 했다. 금방 허물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이 집이 지금껏 이렇게 건재하다는 사실. 재개발을 기다리며 허비한 시간이 7년에 달한다는 사실. 자꾸만 되살아나고 번듯해지는 이 집과의 싸움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는 사실. 다시금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이 책에는 온전히 ‘내 것’을 가진 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얼마간 물러서 있다. 마치 현실에서, 악다구니를 쓰고 아쉬운 소리와 미움을 피로처럼 매달고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처럼.

한국에서 집은 생활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제 힘으로 돈 벌어본 사람 치고 ‘내 집 마련’ 한 번 꿈꿔보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로. 집은, 적어도 이상적으로나마, 거주공간이자 돌아갈 곳이고, ‘나’가 존재하는 곳이다. 안전을 보장받는 곳이다. 내 몸과 나의 물건이 거하는 곳이다. 뽑히고 밀려나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내 집’이다.

여덟 편의 수록작에서 주인공들은 ‘주인’이기도, 세입자이기도 하다. 숱한 광고처럼 안락하고 품격이 넘치지 않는다. 저마다 억울하고 사는 게 팍팍하고... ‘그래도 나 정도면’과 ‘정말 이래도 되나’를 오간다.

p.130 어느 순간이 되자 홍 사장이 소유했던 집들을 차례로 열거하기 시작했고, 각자 짐작하는 구체적인 액수를 떠들어댔다. 집을 소유하고 유지하고, 그러는 동안 홍 사장이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야 했는지 또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홍 사장에 대한 애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 홍 사장은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였고 피해야 할 좋지 못한 선례에 불과했다.


읽는 내내 꼭 선물상자를 열어젖히는 것만 같았다. 혹은 예쁘장한 케이크를 갈라 단면을 내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름다운가. 자세히 들여다보라. 구겨지고 찢어진 포장, 눅눅하게 얼룩진 상자와 예의상 입꼬리를 끌어당겨야만 하는 물건. 갈라지고 주저앉은 크림, 쉰내가 날 것 같이 퍼석퍼석한 빵.

희망찬 선전처럼 가난하지만 따뜻한 정을 나누는 ‘소박한 추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른 누룽지 긁듯 억척스러운 ‘의지’를 뽐내지도 않는다. 그러나 모두가 애를 쓰고 있다. 안간힘을 쓴다. 밀어내기 위해, 밀려나지 않기 위해. 각자가 최소한이라 믿는 것을 위해.

묻고 싶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않냐는 이에게. 안 힘든 사람 없다는데, 그렇게나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끼리 실망하고 미움받고 소리내어 문을 닫는 세상이 정상이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그래야만 하나요? 이미 알고 있잖아요. 잘 알고 있잖아요.

p.166 아무리 오래된 집이라지만 사람이 살 수는 있게 해주셔야죠. 그러고 나서 월세를 달라고 해도 해야죠. 그렇잖아요.


사는 게, 너무 힘들다. 현실을 봐야한다는데, 자꾸만 세상 밖으로 떠밀린다. 그것이 빠져나갈 수 없는 현실이라면, 구질구질하게 살다 고만고만하게 죽을 ‘팔자’라면.

적어도 너는 꽃향기를 좋아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 평생 들어본 말 중 가장 상냥한 한 마디를 품을 수 있겠지. 작은 미래, 초라한 희망을 알사탕처럼 가만히 굴려볼 수 있겠지.

이러면 안 되는 거니까. 누구든 할 수 있으니까. 살그머니 내디딜 수 있겠지. 아껴먹을 수 있겠지. 어떤 행복처럼. 어떤 삶은 있는 줄도 모를테니까. 축복을 비는 마음으로 락스 냄새에 절어 돌아갈 수도 있겠지.

그렇게, 집에. 내 집에. 나의 집에. 나의 ‘ ’에. 즐거운 곳에서 나를 오라 하여도 내 갈 곳은 내 집 뿐이리.

p.201 방향을 바꿀 때마다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순식간에 균형을 잃을 것 같다. 곧장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 같다. 그녀는 다만 넘어지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고 사력을 다한다. 그래서 생각을 더 이어나갈 수도,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도 없다.

p.238 그 순간, 그는 분명 미지의 존재다. 그녀가 짐작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미래에 속한 인물이다. 힘껏 기대하고 바라야만 겨우 가닿을 수 있는 근사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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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연금책 - 놀랍도록 허술한 연금 제도 고쳐쓰기
김태일 지음, 고려대학교 고령사회연구원 기획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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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고백부터 해야겠다. 연금제도, 잘 모릅니다. 가입 기간이야 제법 되었지요. 내가 직접 부은 것도, 모르는 새에 부어지고 있던 것도 꽤 쌓였을걸요.

요즘 학교에선 이런 거 안 가르치고 대체 뭘 하느냐고 묻는다면, 배웠습니다. 시험도 봤고요. 심지어 한국인의 인생증명, 수능에서도 해당 과목은 만접이었다고요.

그러나? 정말 현실이 된 지금에 와서는? 싸그리 잊어버렸다 이겁니다. 수능시험 종료 벨소리와 함께 휘발된 기억은 넣으라니 넣는갑다. 부으라니 붓는갑다. 하며 뭐랄까, 연금이라기보단 소득세도 아니고 대강 소비세 떼이는 것처럼 아주 없던 돈으로 여기게 되었다고요.

p.13 노후 빈곤율이 높은 것은, 우리가 베짱이처럼 내일을 준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개인이 스스로 알아서 노후 대비 잘하는 사회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국가가 제대로 된 노후 소득 보장 체계를 마련하지 않으면, 다수는 늙어서 빈곤하기 마련이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주입식 교육으로 짤짤 흔들어가며 가르쳐놔도 말짱 도루묵, 매년 보고서가 나오네 실지급액이 오르네 내리네 떠들어봐도 흐리멍텅 맹탕. 그렇다고 해서 냅다 안 준다고 하면 당장 들고 일어날 사람 중 하나란 말입니다. 나도. 별반 다를 것 없는 대부분의 국민들도.

벌어먹고 사는 동안이야 떼이는 돈 같지요. 받을 때가 되면 대체 그동안 뜯어간 돈 다 어디다 날려먹고 요것만 남았는가 싶지요. 그럼 아주 없는 셈 칠까요? 연금이고 뭐고 뭐하러 돈 없는 늙은이들 나라가 먹여살려주나. 알아서 살라고 할까요? 어디 한 번 해보세요. 그럼. 사회 꼴이 요지경이 되나 안 되나.

앞서 말했듯이 당장이야 그저 뺏기는 돈 같지요. 안그래도 쥐꼬리만한 임금, 당장 먹고 사는 것도 팍팍한데 언제 불려 언제 돌려받나? 부자는 부자대로 빈곤층은 빈곤층대로 손해만 보는 것 같지요. 연금은 어쩌다 생겨나서 어떻게 운영되는 걸까요. 존속되어야 할 이유가 있기는 한 걸까요?

저자는 연금제도 자체가 아닌 한국의 연금 기금, 그러니까 공적 기금의 운용에서 문제를 찾습니다. 연금재정과 실효성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요.


문제는 국가가 노후생계의 최저선을 보장하는 제도 자체가 아니라 지금의 세대분포에 이르기까지의 사회 구조와 시대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기금 운용 전략에 있습니다.

연금에 대한 가입자들의 불만에는 세대간 불공평을 주축으로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크게 의식되지 않지만, 현행 연금제도는 부과식입니다. 현재 노동인구의 재원으로 연금 지급 비용을 충당하는 셈이지요.

p.49 보험료를 모아 기금으로 적립해서 운용하고, 기금에서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을 적립식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부과식은 연 단위로 그해에 필요한 재원을 보험료로 걷는 방식이다. (...) 적립식이 계속 유지되려면 낸 것과 받는 것 사이의 수지 균형이 필수다.

p.69 낸 것보다 많이 받게 설계되어 있고, 그 정도가 과거에는 더욱 심했던 탓에, 지금 이대로면 2050년대 중반 기금은 고갈되고, 고갈 이후에도 연금 제도가 유지되려면 보험료율이 30% 가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때의 근로 세대는 받는 것보다 훨씬 많은 보험료를 내야 한다. 세대 간에 불공평한 것은 물론이고 지속 가능하지 않다.


내 돈으로 생판 모르는 노인을 먹여살리느냐, 그들이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느냐, 하는 격정적인 불만부터 현행방식으로 운용한다면 수혜인구가 노동인구를 압도하는 초고령화 미래에는 대체 무슨 수로 재원을 충당하겠느냐는 우려까지 터져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래서 대체 어쩌란 말인가? 저자의 의견과는 별개로,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현행 방식의 취약점을 어쩌란 말이냐, 식으로 방관할 게 아니라, 거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불 보듯 뻔히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시장논리’에 맞지 않는다, 있는 사람이 잘 산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묻는 이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사람은 시장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시장은 사람을 먹여살리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차적 기능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최저선을 보장하고,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은 시장의 목적이 아닙니다.

p.85 연금 개혁에서는 세대 내 불평등 완화도 중요하다. 노인 중 국민연금 수급자는 절반에 못 미친다. 연금 수급자는 대부분 중산층 이상이다. 그래서 낸 것보다 많이 받는 혜택은 노인 중에서도 중산층 이상에게 돌아간다.


돈이 돈을 번다고 하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돈을 벌어오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 없이 사회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사람답게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이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는 사람이 사는 사회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전까지의 운영에 예기치 못한, 혹은 의도한 바와 다른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가 있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각자도생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다같이 죽고 싶지 않으면 어떻게든 함께 살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짧게 말하면, 복지입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속하는 바는 돈이 아닙니다. 시스템입니다. 돈이 있어 잘 사는 사람은 시스템의 일부를 점유하거나 타인의 몫까지 차지할 뿐입니다. 연금개혁의 향방도 마찬가지의 논리로 결정되어야 합니다.

p.123 국민연금의 혜택(초과 이익)은 가입 기간에 비례하는데, 가입 기간은 대체로 고소득층이 저소득층보다 길어서 국민연금의 혜택은 역진적이다. 보험료 9%, 소득 대체율 40%일 때 국민연금 초과 이익은 2022년 기준으로 가입 기간 1년 당 16만원 정도이다. 20년 가입한 사람은 매년 320만 원, 30년 가입한 사람은 매년 480만 원의 초과 이익을 얻는 셈이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줄고, 수명은 늘어나는 사회, 굶어죽을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사회. 우리는 이 난국을 헤쳐나갈 책임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방도를 찾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고민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다른 미래를 상상함으로써, 이전과 이후의 성원에게 ‘그냥’은 없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무겁게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합니다.

원래 다 그런 것은 없는 세상에서, 나라님 없는 나라에서, 모두가 비참하지 않게 살아남을 권리를 위해. 누구도 책임지지 못한다 말하는,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책임질 의무가 있는 사회에서. 어렵지요. 예. 저도요.

p.114 명실공히 국민연금이라면, 국민 대다수가 노후에 수급권을 지녀야 하고, 연금만으로도 최소한의 생활은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름뿐이 아니라 실제로 국민의 연금이 되게 하는 것, 이게 연금 개혁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p.139 국민연금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국민연금만 대상으로 하면 안 된다. 기초연금을 포함한 공적 연금 전체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 나아가서는 퇴직연금을 포함한 연금 체계 전반을 대상으로 하면서, 그 안에서 국민연금의 위치와 역할을 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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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과 나 - 배명훈 연작소설집
배명훈 지음 / 래빗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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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래빗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완전한 정착을 말하기엔 멀고, 그렇다고 불가능을 못박자니 가까운데다 제법 가능성은 있어 오래도록 SF 장르의 무대로 사랑받아온 곳, 화성.

이를테면, 화성에 독립적인 행정기관이 수립된다면, 살인사건이 발생한다면, 포기하자니 간절하고 수급하자니 영 요원한 음식이 그리워진다면, 시공간의 벽이 어렵지만 투과(정복이 아니다) 가능한 것이 된다면, 그 모든 만약에 ‘지구인들’이 고개를 쭉 빼고 기웃거리고 있다면.

요컨대 나의 고민은 이런 것이다. 화성에도 사랑이 있을까요. 화성의 노을은 푸르다던데, 붉은 땅에서 바라보는 푸른 노을에도 여전히 눈물짓는 사람이 있을까요. 시간과 중력을 공유할 수 없는 행성에서도 여전히 사람은 사람의 삶을 살까요.

p.10 가혹한 환경과, 화성 표면에서 생명의 흔적을 발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이유 같은 것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며, 여기서는 서로가 서로의 신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럼 우리는 이미 다 끝장난 게 아닌가, 하고 지요는 생각했다.


필요가 정착을, 정착이 토대를. 자연발생이 아닌 모든 것이 계산되고 통제된 형태로 생산되는(설사 그것이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우리는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정상을 구축하게 될까요.

개인적 감상이기는 하나, 수록작에 이전 작품들에 비해 쓸쓸함이 크게 묻어난다. 이미 이주가 시작된, 그것도 허허벌판 꼴은 면한 어색한 환경을 굳이 부정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래서일까. 표지의 홀로 선 사람이 너무도 외로워보였다. 지구는 푸른 별, 그곳의 노을은 붉은데 정반대로 뒤집힌 붉은 땅의 푸른 노을이기 때문일까. 띠지의 “이 행성에서는 지구에서 해결할 수 없던 문제를 가뿐히 초월하기를”, 기원처럼 느껴지는 이 문장마저 쓸쓸하게 느껴졌다.

p.40 ‘다음 날 아침에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서 발견되는 것. 이 행성에는 그게 사건이야. 여기는 차가운 지옥이지만 우리는 매일 그 사건을 일으키고 있어. 그것도 아주 많이. 공동체의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서 아침마다 일으키는 기적이지.’


배명훈이 그려내는 화성은 결핍되고, 척박하고, 어떤 때엔 쫄쫄 굶을 지경인데다 살인을 저지른 자조차도 도망갈 곳 없이 덩그러니 그 자리에 머물 수 밖에 없는, 속된 말로 좁아터진 곳이다.

마음도, 공간도. 이 넓은 우주의 한 행성에 바글바글 몰린 지구인처럼, 그 넓은 행성의 기지 어딘가에 이리저리 낑겨있는 화성인들.

낯선 곳에서의 빈곤한 상황, 우리가 본디 유래하지 않은 환경에 적응하고 나아가 환경 자체를 구축하는 것. 어쩌면 이 모습은 지구에 처음 문명을 건설할 때의 인류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러니, 또한 어쩌면, 작가가 그려내는 화성의 척박함, 설움, 권태, 고립과 무용은 지구인이 수차례 겪어 무뎌진 고통일지도 모른다.

p.60 “쓸모 있는 사람들만 보내서는 100년이 지나도 사회가 완성되지 않아요. 쓸모 있는 인간이란 결국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사람들이니까요. 문명이 완성되는 건 다른 목적이나 임무를 지니지 않은, 쓸모없는 사람이 화성으로 건너가는 순간부터입니다.”


한 번도, 그러니까 그 개념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에 비하면 기존의 것을 삭제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개념도, 존재도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불가능에 맞닥뜨린다. 상상은 쉽지만 말살은 어렵다는 것. 아주 작은 기억만으로도 불씨가 당겨진다는 것.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아주 새로운 곳의 새 문명에서도 어떻게든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배척하려 드는 존재인 동시에 어디선가는 기어코 사랑을 발명해낸다. 그 또한 지구-유래 인간의 오래된 습성이라 할지라도.

그렇기에 때때로 슬프고, 자주 외롭더라도 옆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들이 아닌가. 마치 사는 일이 그러하듯이. 새로운 곳에서 이제까지의 문제를 초월할 수 있기를, 더이상 이렇게 슬퍼하지는 않기를. 화성과 나, 낯선 곳의 외로운 이가, 깊은 우주의 공백을 건너.

p.180 미사일은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안전장치가 부착되지 않은 지하철 자동문처럼 인간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미사일은 키스가 뭔지 몰랐다. 인간의 마음이 왜 움츠러들거나 황홀해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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