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셋 2024
송지영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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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글감을 고르고, 출판사가 작가를 고르는 것 못지않게 독자도 책을 고른다. 종종 말하듯이, 독서는 웬만해서는 수지타산이 맞기 쉬운 취미가 아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입에 뭘 넣어주는 것도 아니면서 “저가”를 표방하는 일은 없는 데다 내내 마음을 울리다 결말부에 속을 뒤집어놓는 일도 허다하다.

차라리 내용이 마음에 차지 않으면 다행일테다. 정성 들여가며 읽고 쌓아놨더니 불현듯 용서 못 할 헛소리를 내질러 그간의 사랑했던 시간을 후회하게 만들기도 하고... 이래저래 어떤 작가와 그의 세계를 좋아한다는 것은 제법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다시 돌아가서, 이런 연유로 독자도 책을 고른다. 그 기준은 출판사가 되기도 하고, 관심분야가 되기도 하고, 수상이력이나 추천사가 되기도 한다. 물론 저자의 이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정보요 기준이다.


그러니 기존의 “공신력 있는” 이력이 없는 작가를 보면 (대체로 전면 책날개의 소개란에 이력보다 자기소개가 더 많은) 슬며시 주저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러나, 읽은 것만 읽고, 아는 것만 알려고 하는 이의 세계는 넓어질 수도 깊어질 수도 없다. 거기서 거기, 그 맛이 그 맛인 나날일 뿐이다.

결국 주저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첫 걸음, 까지도 아니고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이만이 원석처럼 참신하고 빛나는, 거친 세계를 맛볼 수 있지 않은가. 구를 만큼 구르고 내공도 쌓일 만큼 쌓인 중견 작가의 탄탄한 작품세계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그것은 낯선 이, 독자에게도 작가에게도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이들만이 지닐 수 있는, 쉽게 바래고 흐려지는 것이다. 금세 자리하기 전의 긴장감, 새로이 열어젖히는 세계.


이 책은 한겨레의 출간워크숍 프로젝트를 통해 데뷔(라고 해도 좋을지?)한 저자들의 첫 발표작과 그에 대한 해설을 담았다. 주제가 유달리 참신하지 않을 수는 있다. 새로운 이가 익히 알려진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지 않을까.

문학이 작가와의 대화라면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제각기 이름도 모르는 낯선 이를 마음자리에 초대하는 셈이다. 낯가림으로 머쓱하니 지나치기 보다는 기존의 세계에 새로운 빛과 파동을 더하는 이들에 대한 응원의 마음으로 읽기를 권한다.

후면의 추천사를 빌어 감상을 마친다. 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오래된 땅에 돋아오르는 새 잎을 마주함과 같은 기쁨이었다.

"읽는 동안 여러 번 감탄했고 새로운 작가들의 시작 앞에서 조용히 환호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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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 - 영 케어러와 홈 닥터, 각자도생 사회에서 상호의존의 세계를 상상하다
조기현.홍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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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눈부신 기술 발전으로 현대인의 수명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제는 환갑 정도는 어디서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우리는 ‘오래 사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젊음을 연장하는 기술은 그렇지 않다. 그 말은 곧 인간의 삶 중 노년기의 비중이 커졌다는 것과도 같다. 신체 능력의 저하, 사회적 지원 필요성 증가.

그뿐인가, 본디 인간은 생각보다 자주 아프고, 쉽게 다치지만 죽는 일은 그만큼 수월하지 못하다. 앞선 이유와 같이 수명은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사람을 살리는 기술은 보다 정교해지고 또 확대되었다. 삶은 다양해졌고,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 태어남이다.

p.32 사랑, 돌봄, 연대의 관계들이 모두에게 주어져야만 우리가 평등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좋은 돌봄이란 단순히 돌보는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정성을 들이는 돌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돌보는 사람도, 돌봄받는 사람도 모두 사랑, 돌봄, 연대의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는 거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고립인 거죠.


우리 모두는 출생으로 이 사회에 살아갈 자격과 그에 따른 의무를 진다. 태어났기에 부과되는 책임이 있다. 그런데, 사회는 그를 가능케 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가?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세상은 변했고, 삶의 형태는 다양해졌다. 살아있는 시간은 길어졌고 누워서 눈만 끔뻑거리기만 해서는 살아갈 수 없다.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누군가는 돌봄이 필요하며, 그 돌봄을 제공할 사람 또한 필요하다. 양자가 같은 사람이거나, 필요한 돌봄을 제공할 수 없는 사람만 모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다시 묻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정말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환경과 조건을 제공하고 있는가? 작금의 세상은 태어난 존재가, 혹은 태어남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가 생존할 수 있는 곳인가?

p.93 보통 사람들은 중병이 걸렸을 때만 돌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실 사람에게는 매 순간 돌봄이 필요하거든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처럼 사소한 일이라도요. 그렇게 일상적으로 서로를 돌본다면 위기의 순간에 찾아오는 슬픔과 소진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판에 박힌 전형적 이미지에 완벽히 부합하는 사람이 있는가? 응애 하면 태어나 알아서 쑥쑥 자라 돈을 벌고 뼈가 부서져라 일하면 어느날 갑자기 뚝딱 하고 새로운 “정상 가정”을 꾸려 노년기엔 여유로운 일상-이라고 불리는 소외-를 겪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는가?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돌봄에 의존하고 또 돌봄의 주체가 되는가? 사람과 사람이 닿지 않는 해결될 수 있는 일은 또 얼마나 무수하고 또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가?

분명 ‘돌봄’ 자체는 우리 사회에 이미 널리 퍼진 개념이다. 삶의 어느 때에는 돌봄이 필요하고 그를 제공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점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 ‘돌봄’을 어떻게 제공해야 할지, 누가 누구에게로 주고 받아야하며 어떻게 구조화될 수 있는지. 과거부터 지금까지 쭉 누군가의 희생, 짐으로서의 인간, 이 두 가지로 돌려막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회피로 일관해오지 않았는가.


여기서 문제는 “따스한 손길” 따위가 아니다. 물론 정서적 지지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우리가 누군가의 문제를 개인의 것으로 치부할 때, 복지제도를 “돈낭비” 정도로만 여기며 축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든, 언제든 사회적, 육체적 약자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은 특별한 일도, 불행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홀로, "정상적으로", 아무 문제 없이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p.108 이미 기존의 생애주기라는 게 많이 무너진 상황인데 여전히 그 나이대를 돌봄을 받는 시기라고만 보면, 돌봄을 일상적인 관계에서도 문제화하지 못하고, 공공 정책에 개입할 여지는 더 적어지는 거죠. 그런데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진단 말이예요. (...) 저출생과 고령화가 가속되면 더 다양한 돌봄 상황을 어릴 때부터 마주할 수 있어요.


누구나 그렇다. 우리는 연약하게 태어나 무력하게 죽는다. 때로는 순간의 문제일지라도.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지금처럼 먼 산 바라보듯 어떻게든 되겠지, 딴청 부리는 사이에 이름 없는 희생으로 마법같이 해결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에 지원 체계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인장기요양급여, 장애인 생활지원, 산후도우미, 아동 돌봄 서비스 등 다양한 제도가 있으나 너무 파편화되고 더러는 탁상행정의 전형인 탓에 수혜자의 실제적 삶과는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p.129 저는 항상 제도와 제도 아닌 것이 구분되는 게 조금 의문이었어요. 다시 말해서 미시와 거시로 돌봄을 구분할 수 있을까 싶어요.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미시와 거시이지만 (...) 일상에 있는 여러 가지 제도들도 여러 관계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일상에서 맺는 관계, 옆집 사람과 맺는 관계, 오랜 친구와 맺는 관계, 가족과 맺는 관계 등처럼 돌봄서비스를 지원받으면서 맺는 관계가 제도인 거죠.


이제는 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착한 마음씨”에 얼마나 더 기댈 수 있을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가 “수발”을 들어줄 것이라는 꿈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비정상”인 사람들을 어딘가로 몰아넣는 사회, 언제든 나도 "치워질 수" 있다는 공포가 도사리는 사회, 돌봄을 주고받는 데 가장 필요한 인간적 신뢰가 없는 사회가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p.184 결국 제도라는 거는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그 제도의 사각지대를 누가 메꿔야 하느냐, 저는 그게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돌볼 것이냐,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고 봐요.

p.312 우리가 낯선 타인에게 돌봄을 받을 수 있다는 신뢰감이 있는 사회와 그 돌봄이 서비스로만 제공되고 가족에게만 부담 지어진 사회는 질적으로 굉장히 다른 사회라고 생각하거든요. (...) 한국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이 부분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돌봄과 돌아봄은 닮았다. 어쩌면 그 둘은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구태연한 말이지만 사람이라는 글자는 한 명인 동시에 두 명이다. 한 사람이 다리를 벌리고 선 동시에 두 사람이 기대고 선 모양이다.

그처럼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는 한 사람의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나는 이 또한 돌봄이라 부르고 싶다. 돌봄 받고 누군가를 돌보는 것, 그 사이에는 단절도 구분도 없다. 사람 곁에 사람이 있는 것, 상대를 살피고 마음 쓰는 모든 것이 돌봄이다.

누구나 돌봄을 받고,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자연스럽기를 바란다. 돌봄받는 일이 나약함과 무능의 징표처럼 여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은 돌봄을 통해 태어나 돌봄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다 돌봄 받으며 무사히 삶을 마친다.

그 모든 시간에 사람이 사람을 돕고 지지하며 함께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껏 연약할 수 있는 사회, 나는 그런 사회에 살기를 원한다. 내가 사는 곳이, 누군가가 살아갈 곳이 또한 그러하기를. 이제 다시 물어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해야하는가.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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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행복하게, 그러나 - 어떤 공주 이야기
연여름 외 지음 / 고블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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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고블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오래 간직해온 문장이 있다. 어느날 갑자기, 마음에 박혀 잊히지 않는 말, “배경으로 밀려난 이들에게 전경의 지위를 돌려주는 일”. 어렸을 적 읽고 들으며 자라온 공주이야기에는 하나같이 삶을 상실한 여성들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비범한 신분이나 천상의 성품을 타고난 존재로서 유순하고 아름답게 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의 뜻에 따라 삶의 향방을 내맡겼다. 그런 이야기들은 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식의 두루뭉술한 결론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게 전부일까? 가난하고 고통스럽고 비천하고 저주받은 삶에서 “왕자”를 만나 그의 품안에서 살아갔다고 말해지는 이들의 삶은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그들에게는 꿈이 없었을까? 나와 함께 가자며, 자신이 운명의 짝이라 주장하는 이의 손을 뿌리치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만일, 그들이 다른 시대 또는 세계에 존재했다면 어떤 삶을 살아갔을까? 아니, 지금을 살아가는 “공주”은 얼마나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이 책에 실린 배경도, 시대도, 심지어 종족마저도 다른 여섯 편의 이야기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잘 알려진 옛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주인공이 지고의 선인이라거나 빼어난 미인이라든지, 우연한 행운으로 영원한 행복을 거머쥐었다는 전설인지 괴담인지 모를 모호한 운수대통이 아니다.

그저, 분투하는 여성이 있다. 삶에 맞서고, 폭력에 맞서는 여성들이 있다. 그들을 핍박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세계이다. 이 책의 핵심을 관통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속한 세계가 그들의 존재를, 삶을, 자유를 부정하는 데 결코 좌절하지 않는 여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아니 할 수 있대도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벽을 부수고 천장을 뚫고 날아오르는 이들이 있다. 악착같이 생을 거머쥐는 이들이 있다. 설령 온 세계가 그들을 인형, 부속품, 열등한 존재라 깔아뭉갤지라도.

p.102 지구인들은 생식 욕구를 탕으로 끓여서는 인정욕구와 자아 실현과 신성에 대한 욕망이라는 고명으로 장식한 다음, 외모지상주의를 조미료로 뿌린 뒤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라는 그릇에다가 퍼담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모든 여성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안온 다정 무해 삼신기의 성인이냐. 그렇지 않다.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라서, 여성인 동시에 사람이라서 그럴 수는 없다. 누군가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곧 그에게도 그 자신의 욕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등장인물들은 차마 돌아서지 못하는 용기를 보이거나 어리석은 경멸에 마음껏 비웃음으로 받아치고, 가시덤불을 온몸으로 헤쳐나가는 용사가 된다. 그뿐인가, 이해라는 이름의 욕심으로 파탄에 이르기까지 한다.

웃고 우는 여성들, 그 모든 것은 수차례 말했듯이 그들을 사람으로 인정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온전한 그들의 선택이 아닌 이유로 뭉뚱그려져 배경 어딘가에 욱여넣는 것이 아니라.

p.134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외국인인 적 없었으나 이방인 노릇은 이골이 났다. 선희의 얼굴이 곧 자격증이었다. (...) 선희는 이 땅에서 태어난 프로 외국인이었고 심심하면 불려나가서 외국인 대표 노릇을 해온 처지였다.


각각의 수록작들은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오래된 토대에 쌓아올린 작금의 현실을 마주하노라면 지금이라고 달라진 게 있나,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달라졌다. 적어도, 지금의 여성들은 이 고통스럽고 울화통 터지는 세상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알고 있다.

이전까지의 세계에서 어떤 이들에게 여성은 무능하고, 연약하고, 아둔한 존재였다. 부속과 도구 이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다. 그것은 비단 여성이라는 속성 뿐만 아니라 모든 소수자성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능하고 연약하며 아둔해야만 했던 이들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치열하게 부정할수록, 필사적으로 깔아내리고 밀어낼수록 그들은 끈질기게 살아남고 지워질 수 없는 존재의 지위를 공고히한다. 죽임당한 여성이 마녀로 돌아왔듯이.

p.208 “대칸이 저를 좋게 본 건 제가 서른 명을 때려눕혔기 때문이고, 공주라 부르고 융숭하게 대접하는 건 장차 개놈들고 싸워 이기라는 것인데 제가 누구에게 맞아들여지고 누구에게 지켜져서야 되겠어요?”


보라, 가능성을. 들어라, 살아 숨쉬는 이들의 박동을. 그 끝이 사랑, 자유, 파국, 때로는 촌극일지라도 그들은 이제 와 세삼스레 인간이다. 처음부터 그러했듯이, 그리하여 영원히.

p.170 경제적 주체로서 행동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삶의 부박함이 야속하다고 모른 척하기도 어려웠다. 자식이 죽었거나 말거나 선희 삶은 이어젔다. 딸애를 따라가고 싶지도 않았다. 죽는 것도 작심해야 이루어지는데 그런 일을 할 기운도 없었다.

p.227 너른 초원에는 칸들이 거지반 죽고 칸국들의 연합이 와해되었으며 속민들에게는 주인이 없게 되었고 부족들에는 남자가 적어졌습니다. 그러나 여자들과 아이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들판과 산과 호수도 전혀 적어지지 않았으므로 남아 있는 가축들이 그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충분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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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를 해부하다 - 〈키스〉에서 시작하는 인간 발생의 비밀
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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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많은 경우에 〈키스〉가 아닐까. 황금빛 강물같은 옷자락에 휘감긴 연인, 그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세상을 잊고 황홀경에 빠진 듯한 표정. 어떻게 제목마저 ”키스“일까. 벅차오르는 것 같기도, 꿈꾸는 것 같기도 한 표정, 마음처럼 온 몸을 쏟아부어 기대는 연인.

이것만 보자면 클림트의 작품세계는 지극히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것만 같다. 공중을 부유하는 마음으로 살았을까. 과연 그럴까. 인생의 곳곳에서 상실과 비탄을 마주해야만 했던 그의 세계가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스럽기만 했을까. 혹은, 매일같이 세상을 뒤집는 발견이 쏟아져나오던 때의 정신이 그저 영원불멸한 꿈에 젖어있기만 했을까.

클림트가 태어나 자라고 활동했던 시기의 유럽은 가히 전 분야의 격동기라 불려도 과언이 아닌 시기였다. 넓게는 1880년에서 1920년, 좁게는 1890년에서 1918년을 일컫는 ‘빈 1900’, 바로 그 때의 오스트리아에서 집어삼킬듯 나날이 쏟아져나오는 새로운 깨달음과 발상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자. 로댕, 아르투어 슈니츨러, 카를 크라우스, 슈테판 츠바이크, 아놀드 쇤베르크, 에곤 실레,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모리츠 슐리크, 마르틴 하이데거, 에른스트 마흐, 구스타프 말러, 지그문트 프로이트, 찰스 다윈...

이름만 들어도 탄성을 자아내는 쟁쟁한 이들이 별처럼 많았던 시기, 앉은 자리에서 다 말할 수도 손꼽아 세자니 손발을 모아도 모자랄 만큼 쏟아져나오던 바로 그 시기이다. 이렇듯 클림트의 세계는 전 분야에 걸쳐 폭발적인 발전과 참신함이 양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평생 안주를 몰랐던 화가, 죽기 직전까지도 도전과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클림트의 그림에서 동시대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을까? 그의 그림에 예술-신비 너머의 것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단언할 수 없지 않은가?

p.28 ‘빈 1900’은 건축, 디자인, 회화, 문학, 정신분석, 음악, 철학, 정치, 경제학 등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찍는 사상과 인물들을 대거 배출한, 그야말로 ‘문화적 생산성이 대단한’ (...) ‘빈 1900’은 모더니즘을 이끌어낸 시공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과연 그러하다. 무심코 무작위적인 패턴의 일부로 여기고 지나칠만한 요소들에는 인간의 발생과 존재에 대한 수많은 고민과 영감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클림트의 작품은 생물학에 대한 은유로 가득하다.

당시 학계의 중심에 대학이 있었다면, 문화예술계의 주축은 ‘살롱’이었다. 의사, 예술가, 작가, 음악가, 철학자 등 다양한 분야 종사자들이 교류하던 그곳에 클림트라고 예외었을까.

그는 주요 멤버로 활동하던 살롱의 주인 베르타 주커칸들의 소개로 1903년 주커칸들 교수의 ‘예술인을 위한 해부학 강의’에 참석해 인체 구조와 조직, 정자와 난자로부터 발생하는 인체의 신비에 눈을 뜨게 된다.

p.129 생명 탄생의 신비를 신의 뜻으로 설명하는 기독교적인 사고와는 달리, 클림트의 〈의학〉에서 인간을 창조하는 장면은 (...)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어버이로부터 태어나며, 핵심은 여성이고, 자궁임을, 따라서 여자가 생명 창조의 핵심적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당시 과학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다윈의 진화론, 독일의 다윈이라 불린 헤켈 교수의 조직학과 함께 그의 창작관에 깊은 영향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그 증거로 작품 곳곳에서 다양한 포궁, 양막, 세포조직 모티브를 찾아볼 수 있다.

기존의 신학적 관념과 신의 신비로 존재했던, 설명할 수 없는 불변불가침의 존재로서의 인간상을 탈피해 인간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자 했던 클림트의 그림에는 존재에 대한 경이와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것은 그의 일생 전반을 지배한, 고통스러웠던 상실을 포함한다. 그러나 좌절과 무력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생명이고, 살아있는 존재이다. 자연의 일부이며, 지극히 유한한 동시에 영원을 꿈꾼다.

p.217 〈생명의 나무〉는 헤켈의 ‘생명 계통수’로부터 디자인적 측면이나 과학적인 관점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 생명의 나무 가지 형태는 클림트의 〈키스〉, 〈희망Ⅱ〉, 〈죽음과 삶〉 등의 작품에도 나타난다. 이것은 인간은 자연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생물 중 하나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메시지의 상징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 시작된, 경이롭고도 한없이 초라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마주한 클림트의 작품을 과학의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보물처럼 숨겨놓은 수많은 상징과 메시지를 하나하나 발견해가며 감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보이는 것 이상의 충격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신비와 초라함, 인간 존재의 경이와 덧없음이라는 모순을 평생토록 끌어안고 살아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쇠락의 문턱에 선 시대에서의 지식인과 예술인들의 고뇌를 살펴보기를, 또한 그들의 내면에서 경이와 공포와 희망을 마주하기를.

p.274 리베라가 활동했던 시기엔 많은 백신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미생물과 면역학 연구를 통해 감염병에 관한 이해가 증진되어 감염병으로부터 인류를 지킬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그 결과 리베라의 그림에는, 태아를 위협하는 많은 미생물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의학의 도움을 받아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것이고 또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들어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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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 - 나의 생존과 운명, 배움에 관한 기록
임승남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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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어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뭔가 배워야 한다든지, 고난을 보상할 누군가의 은총이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어째서 그것이 개인의 탓으로 떠넘겨지는가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을 단순한 성공담으로는 읽을 수 없다. 다 잘 되었으니 그걸로 그만이라든지, 이렇게 성공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렇지 못하는 이는 게으르고 ‘구제해줄’ 수 없다고 말하는 이를 좀처럼 고운 눈으로 볼 수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책의 저자 임승남은 출판사 대표 출신이다. 다른 사업도 아니고 출판사라니, 그것도 이제는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안다는 곳의 대표였다니 먹물 깨나 먹은 이가 아닌가 싶겠지만 그에게는 사뭇 다른 과거가 있다. 전과 7범, 그것도 강도, 절도, 폭행을 주로 하는. 번듯한 학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자기 이름조차 쓸 줄 알게 된 지 그리 오래 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탄식을 자아내고 마음을 울리는 명절 특선 영화처럼 대의가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숭고한 이상이라도 있었느냐 하면 글쎄, 아마 생의 절반 이상을 그렇지 않은 채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데도 어째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사는 일이 다 그렇듯 얼레벌레 뚝딱 이루어진 게 아닌가 묻는다면, 그가 처했던 현실이, 그가 손 쓸 틈도 없이 내던졌던 유년기의 세계가 그 자신의 책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쟁고아 출신, 무학에 가까운 학력, 툭하면 사람 패고 강도질해서 교도소나 들락거리는 사회부적응자, 실패한 인간, 거렁뱅이... 그가 숱하게 받았을 멸시에는 사회의 책임이 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버려두었던 시간들이 있다.

혼란통에 누구는 안 힘들었나, 하지만 재기를 기다려주지 않고 말 그대로 굶어죽는 사람을 스쳐지나간 부유한 인간이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사회가 묵인하는 동안 수없이 태어나 밀려나고 죽어온 사람들에 대해 사회의 책임이 없었던 때는 단연코 단 한 순간도 없었다.

p.26 쫓아내고 쫓아내도 배고픈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집 안으로 들어가 아무데나 벌러덩 드러눕기도 한다. 때리든 말든, 굶어죽게 생겼으니 차라리 잡아가서 관밥이라도 달라는 식으로 배짱을 부린다.


그가 살아낸 시대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교과서 속에서나, 어쩌면 이전 세대의 회고로나 들어왔을 재앙같은 시기였다. 수틀리면 끌려가 고문당하고 쥐도새도 모르게 존재가 지워지는 일이 흔했다. 하루 굶으면 다행, 죽지나 않으면 그럭저럭 사는 인생이 숱했다. 그는 그런 시대를 살아왔다.

그가 오롯이 자기만의 힘으로 살아왔다면, 또 누군가를 도울 힘이 있었을 때 마땅히 손을 뻗지 않았다면 아마 익명의 무언가(사람도 아닌)로 남았거나 그마저도 남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 뜻이야 어쨌든 나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 성공보다 도움을 읽어내기를 바란다.

저자가 낱낱이 고백하는 이전의 삶, 스스로에게 부끄럽고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간들에서 나는 지금을 본다. 지금이라고 다른가. 내가 모른다고, 아니, 알고 싶지 않다고 외면하는 세상에 수많은 임승남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p.140 한 할머니가 100원짜리 동전을 꺼내 소년의 손에, 그것도 허리를 숙여 조심스럽게 건네주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몽둥이로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의 나는 대체 누구인가. 나는 그 소년과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시인의 글에는 "아무도 온정을 베풀지 않는다면"이라는, 성립될 수 없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 나는 비로소 펜이 총칼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다보면 정말, 세상이 온 힘을 다해 나를 떠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겪은 작은 고난들에도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괴로웠고 또 막막했다. 하물며 사회에 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은, 나라가 나서서 그 존재를 부정하고 몰아내려는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그저 절망만은 아니다. 두 발로, 온 몸으로, 수치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기어나오는 그의 삶을 배워야 한다. 저자에게서 나는, 굴하지 않는 용기를 보았다. 가벼운 말로나 회자되는 것이 아닌, 세월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터득한 ‘꺾이지 않는 마음’의 중요함을 보았다.

p.144 인간쓰레기들은 나처럼 교도소를 자기 집처럼 들락거리는 이들뿐인 줄 알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나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 이 사회의 담장은 나 혼자 잘해서 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담장 자체가 아예 보이지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더 큰 절망에 빠뜨렸다.


한 해의 끝, 없는 사람 살기에 이만큼 고달픈 것도 없다는 겨울의 한가운데를 향해 가는 이 시점에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묻고 또 물으며 읽었다.

그 자신의 역사로, 살다보면 희망이, 그것도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희망이 있다고 몇 번이고 증명해내므로, 나또한 어두운 시대에도 한 줄기 희망이 있다고 믿어보련다.

나의 희망, 우리의 희망, 모두의 희망,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이들의 희망을 놓지 않으련다. 해봐야 한다.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믿어봐야 한다. 우리, 수많은 평범한 이름들에게 달리 선택할 바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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