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 - 키르케고르 아포리즘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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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마냥 낙관적으로 바라보기엔 삶은 고되고 구원은 요원하며 인간의 시간은 너무도 유한하다. 이런 세계에 절망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전능한 신이 우리 인간을 만들었다면, 어째서 고통받을 권리까지도 허락했는가? 지독한 괴로움의 다른 이름은 절망. 절망하는 인간에게 희망이 있을까?

p.69 아무도 죽음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한다. 아무도 울지 않고는 세상에 들어오지 못한다. 아무도 묻지 않는다. 언제 이 세상에 들어오고 싶은지, 또 언제 이 세상에서 나가고 싶은지를.

p.81 절망이라는 질병은 완전히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그런 질병에 단 한 번도 걸린 저이 없다면, 이는 가장 심각한 불행이다. 그질병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도 그 병에 기꺼이 걸리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질병으로부터 나을 기대나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 마침내 진정한 행복을 향한 문이 열린다.


인간은 희망하는 동물이다.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은 역설적으로 현재 바깥의 절망까지도 끌어다 쓰게 한다. 돌아가보자. 절망하는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도 우리의 이성은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그렇다, 고.

p.111 슬픔 때문에 한 사람이 미쳐 버릴 수도 있다. 이는 자명한 사실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삶은 지극히 어렵다. 하지만 사람에겐 강력한 의지가 주어져 있다. 이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그는 그 의지를 갖고 강력한 바람에 맞설 수도 있다. 때로 바람에 휘날려 이상한 존재가 된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의지는 결국 자신의 이성을 구원해 줄 것이다.

p.163 희망 속에 빠져 사는 불행한 사람은 회상 속에 빠져 사는 사람만큼 고통스럽지는 않다. 희망 속에 빠져 사는 사람은 그나마 좋은 느낌을 선사하는 망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가장 불행한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항상 회상 속에 빠져 사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삶은 유한하고,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은 너무도 짧다. 희망이 있기에 절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박차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혼란하고 고통스러운 찰나를 살아가기에, 그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흔들리기만 하는자는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는 자는 끝을 알지 못한다. 울먹이며 주저앉기에는 우리는 너무도 미물이 아닌가. 그러나 혼란 위에 자리한다면, 그 가운데서 우뚝 설 수 있다면, 혼란의 한가운데에 스스로를 세울 수 있다면, 고통이 아닌 나 자신을 주체의 위치에 놓을 수 있다면,

p.149 나는 마치 한 마리의 물새처럼 바다 위를 날아다니며 쉴 곳을 찾지만 모두 헛수고다. 바다는 끝도 없이 요동치고 있어 마음을 내려놓을 곳이 한 군데도 없다. 하지만 이런 흥분된 혼란이야말로 진정 나를 만드는 요소다. 나는 이 혼란 위에 나를 짓는다. 마치 물총새가 바다 위에 둥지를 틀듯이.

p.159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순간 뿐이다. 삶 속에서 마주하는 불안은 그저 순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이 절망의 의미임을 새길 수 있다면, 고통에 스스로를 빼앗기기만 하지 않는다면... 그제서야 삶은 의미를 갖는다. 절망을 움켜쥐고 안팎을 뒤바꾸는 존재에게 고통은 그저 고통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 존재에게 마침내 자유라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진다.

그제서야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는 사랑했고 오늘은 괴로워하고 내일은 죽으리. 그래도 나는 오늘도, 내일도 어제처럼 생각하리.”
고통스러운 세계, 절망을 끌어안는 인간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Life goes on. 삶은 이어진다. "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

p.215 이제 그대는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동안 살아왔던 세상을 향해 다음과 같이 작별 인사를 나눌 것이다. 이렇게 나는 멀리 아주 먼 곳으로 떠나노라. 나의 모자 위에는 그저 별들이 떠 있을 뿐이다.

p.218 어제는 사랑했고 오늘은 괴로워하고 내일은 죽으리. 그래도 나는 오늘도, 내일도 어제처럼 생각하리.


*세창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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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자 씨, 지금 무슨 생각하세요? - 노년의 심리를 이해하는 112개 키워드
사토 신이치 지음, 우윤식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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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증에 더해 법적 성인이 된 지도 한참이고, 어디 가서 갓 사회 나온 초년생 취급 받을 나이도 지났다. 한 사람 몫을 다할 것을 요구받는 일에 익숙해졌고, 더이상 "어른 계시냐", "어른 불러와라" 소리를 듣지도 않는다. 급기야 때때로 부모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른이 되고 사회인으로 자리 잡는 효능감에 익숙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보호자-돌봄대상 관계가 역전되는 것의 두려움에는 전혀 익숙해지지 못했다. 늙고, 약해지고, 느려지고 뒤처지는 부모와 그들을 보호하고 새로운 것에 적응하도록 돕는 역할에 나부터가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시대가 어느 땐데 젊어지는 샘물은 커녕 늙어감을 멈추는 방법마저 똑부러지게 존재하지 않는다. 억울하고 무서워 팔짝 뛸 노릇이래도 별 수가 없다. 그러니 배워야한다. 알아야 덜 무서워진다. 알아야 덜 싸운다. 내 가족뿐만 아니라 같은 사회 성원으로 살아야 하는 타인에 대해서도 그렇다.

p.17 바로 '고령자 씨'입니다. 단순히 나이를 먹어 쇠약해져 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풍부한 경험에 근거하여 우리들의 상상을 뛰어넘은 말과 행동으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그런 뉘앙스를 담은 말입니다.


전통적인 가부장, 대가족, 성장 중심 사회는 고령 사회에 대한 대처 방법이 전무한 상태다. 우리 사회가 그렇다. 늙으면 자연히 사회에서 물러나 익숙하고 편안한 집단, 주로 가정 내에서, "챙겨주고 떠받들어주는" 대로 받아먹다 쇠약해지고 죽는 줄로만 안다. 시대가 어느 시댄데, 아직도.

그러나 요즘이 어디 그런가. 수명은 늘었으나 젊음을 유지할 방법은 없다. 과거에 비해 늙고, 아프고, 겉도는 채로 사는 기간이 늘어났을 뿐이다. 노인의 기준은 변했으나 변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대처하지는 않지만 요구는 한다. 전통적 의미의 노년기는 이미 한참 뒤로 밀려버렸다.

노인은 투표권을 뺏어야 하네, 운전면허를 박탈해야 하네… 우스개로, 분풀이로 쉽게도 말해지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젊지 않고 영원히 젊은이들의 사회에서 인정받고 "기능하는" 성원일 수 없으며, "젊은이"들만 모이는 사회에서 살 수 있지 않으므로. 다른 선택지가 없다. 일시에 죽을 수 없다면 함께 살아야 한다.

세상은 변했고, 인간은 오래 살게 되었다. 늙고 병들고 "덜 기능하는"상태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빠르게 늙어가고 있으며, 나도 늙는다. 아니, 이미 늙어가는 중이다. 도마뱀 꼬리 자르듯 몸뚱이를 훌렁 벗어던지고 도망갈 방도가 있지 않은 한, 어쩔 수 없이 이 늙고 느려지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


제목은 묻는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그리고 설명한다. 왜 그들이 화를 내는지, 왜 느려지는지, 왜 고집을 부리고, 우기고, 과시하고 싶어하며 왜 "답답하게 구는"지, 왜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지. "고령자 씨"와 함께하는 이의 태도는 어때야할지.

다같이 덜 불행하려면, 사람으로 살다 죽으려면 배우는 수밖에 없다. 이런 나와도, 늙었거나 늙어갈 남과도.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은 이상이 아니기 때문에, "~해야한다"로 사람을 뜯어고칠 수 없기 때문에, "바람직한 모습"으로 "훈련시켜야만" 공존하는 게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며, 누구나 그렇게 되기 때문에.

모르면 두렵다. 안다고 두렵지 않게 되는 건 아니지만, 덜 무섭다. 준비할 수 있다면 덜 힘들 수는 있다.

p.124 나이가 들면서 신체 능력과 인지 기능은 쇠퇴하기 마련이며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도 늘어납니다. 자신의 유능감과 할 수 없어진 일에 대한 실망감의 간극이 클수록 스트레스를 느끼기 쉽습니다. 작은 스트레스가 계속 누적되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짜증이 쌓여 (...) 최후의 한 방울이 더해지면 컵에서 물이 넘쳐흐르는 것처럼 감정을 조절할 수 없게 되어 화가 표출되는 것입니다. 고령자 씨이기 때문에 화를 내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사람은 이상으로 단박에 뜯어고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지금 당장"에는 그에 맞는 해결책이 필요하다. 돌보는 사람에게도, 돌봄 받는 사람에게도 삶이 있기에, 각자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술과 시야가 필요하다.

돌보기 위한 배움은 함께 살기 위한 배움이다. 피할 수 없이 도래할 미래를 위한 배움이고, 지금 현재를 같이 살아가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한 배움이다. 알면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하면 기다려주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결국, 모두가 서로를 돌보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은, 스스로가 제대로 돌봄 받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쓰인 내용이라 한국,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이상과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으나 '대체 왜 저럴까', '왜 이럴까', '나도 그도 모두가 언젠가는'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기에는 충분히 도움을 줄 만큼의 내용을 담고 있는 실용서다. 일독을 권한다.

p.157 앞으로의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간접 호혜성 커뮤니티라는 사고방식이다. 장기적인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서로 서로' 지탱해 주는 공동체가 아닌, 도와준 상대와는 다른 별개의 사람과 단체로부터 그 보답을 받는 것이 가능한 공동체다. 도움을 받은 쪽이 필요 이상으로 움츠러들 필요가 없고, 도와준 쪽도 '전혀 감사해하지 않는군' 등의 불만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가볍게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그런 공동체가 실현되면 더욱 많은 고령자 돌봄이 가능해질 것이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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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저녁의 연인들
서윤빈 지음 / 래빗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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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노년기를 '인생의 황혼기'라 부르곤 한다. 해가 뜨고 힘차게 활동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난 하루를 정리하고 가만히, 조용히, 부동과 무의식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처럼 인생을 정리하고 끝을 기다리는 시기라는 뜻일테다.

그렇다면, 나이는 들지만 영원히(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살 수 있게 된다면, 성장을 늦출 수는 없으니 나이듦의 시간을 영원히 영원히 늘여가며 '젊은 노인'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면, 우리의 시간은 영원한 저녁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기약없이 늘어난 삶에서도 사람들은, 사랑을 할까.

다분히 한국적인 상상을 해보자. 인공 장기 기술의 발달로 "장기 구독 서비스(이것도 지독한 블랙코미디가 아닌가?)"가 보편화된 사회에서, 그 돈은 다 누가 대나? 그 때도 건강보험 제도가 버티고 있다면, 어떤 형태로 가난과 부를 구분해낼까?

p.52 임플란트 장기를 제작하는 회사들은 제각각의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는데, 가장 성공적인 캐치프레이즈는 이거였다. "고장 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치료다." 거짓말은 아닌 것이 이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이는 것은 암이 아니라 심장 정지와 폐 정지다. 다른 말로 하면, 모자란 통장 잔고다.


비효율이 곧 사치인 세상, 삶을 즐기는 어리석음은 곧 돈인 세상, 치솟는 "생존 비용"과 정확하게 찾아올 죽음 사이에서 매 순간을 저울질해야 하는 세상, 푸르고 풍요롭고 어리고 넘치는 것을 기다리는 일은 상상조차 못할 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그런 세상.

그런 세계에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은, 가난이 생존을 앞지르는 삶을 어떻게 버티고, 남겨지고, 외로워하고, 숨을 쉬고, 울고, 사랑할까. 그때도 이마를 맞대고, 뺨을 어루만지고, 속삭이듯 이름을 부르고 아낌없이 눈을 감을까.

p.12 인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그 전까지의 인류가 만든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만들어냈다. 옛날 영화들이 몇몇 명작을 빼고는 대부분 잊혔듯, 우리의 기억 역시 선명히 빛나는 새로운 것들만 남고 모두 사라져버릴 것이다. 세계지도가 생겨난 이후로는 아무도 오아시스를 그리워하지 않듯이.

p.111 임플란트 장기가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 시대의 노인들은 세월만큼 침식된 몸을 이끌고 몇 킬로미터를 무작정 산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몸 안에 새겨진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시대의 노화란 세금과 기억만으로 존재하는 건지도 몰랐다.


"남의 돈"이 살아있을 권리보다 먼저가 된다면, 사람들은 제일 먼저 무엇을 미워하게 될까. 머릿속을 속속들이 알아낼 수 있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세계에서 어떤 마음을 가장 먼저 버리게 될까. 한없이 길어지고 "유능해진" 삶에서 여전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사랑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생의 마지막을 바칠 사랑을 찾는 사람. 왜 그렇게까지, 라고 묻는다면, 두려워서, 외로워서, 다른 방법이 없어서. 삶의 마지막에는, 하루의 끝처럼, 누구나 머리를 쓸어주고 눈을 감겨주는 다정한 손길이 필요한 법이니까.

p.43 지저분한 옷들에서 모래 냄새가 났다. 어쩌면 사막의 모래 하나하나는 죽은 이들의 흔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구가 점점 사막화되는 건 단지 이상기후 때문만은 아니리라.

p.123 성아는 아이들의 세계에 어느 날 갑자기 밤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아이들의 세계에 밝은 빛을 비추려고 노력했다. 광합성만 잘 시키면 나무가 빨리빨리 자라 존재통 없이 어린 시절을 졸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사랑을 믿지 않는다 하겠지만, 누구보다도 사랑의 절실함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일테다. 깎여나갈 부분이 누구보다도 먼저 부서지고 닳아버린 사람일테다. 통각에 민감한 사람, 자기 안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살기 위해 돌변한 형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안에도 권력이 있다. 중간에서 이문을 떼먹는 이가 있고, 보다 나중에 죽을 사람이 먼저 죽을 사람을 등쳐먹고,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속인다. 이런 세계에서 발버둥치는 것은, 뜨겁게 쿵쿵 울리는 심장은 멍청한 짓이다. 아파하는 것은 사치이다.

로맨스라고 봐도 좋을까. 제목은 연인들이지만, 내용은 무겁고 흐릿하다. 꼭 저녁처럼, 손을 뻗어 더듬지 않으면 서로의 표정을 알 수 없는 시간처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았지만 한 사람이 살았고, 슬퍼하고, 무언가를 깨달았으며, 누군가는 그를 기억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p.231 138억 년은 모든 과거를 잊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긴 시간이다. 고작 100년씩 살았던 기억을 모아 138억 년을 채우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기억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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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각본집
강승용.오선영 지음 / 씨네21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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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어떻게 보존되는가. 기억은 누구에 의해 지켜질 수 있는가.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혹은 몸소 겪어낸 사람이 없는 기억의 존재 기반은 무엇으로 담보될 수 있는가? 한국사회는 "안전"하다고, 한국은 "비상식적인" 폭동의 가능성을 완전히 지워버린 정적이고 공고한 사회라고 말하는 자, 과연 누구인가.

겨우 40여년 지난 일이다. 그 때쯤 태어난 사람이 마흔이나 조금 넘겨 아직도 창창하게 사회생활을 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꼭 그만큼 지나간 일이 되었다. 그 때 그 곳의 참상을 목도한 이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이 영화는 허구다. 그러나, 어쩌면 그 곳에 이런 사람 하나쯤 없었을까. 해서, 이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가 아니다. 1980년, 가장 뜨거웠던 도시를 뒤로 하고 자리를 뜨는 관객들이 그 때 그 곳의 이름들을 잊지 않는 한 이 이야기는 허구로 흩어지지 않는다.


생전 사람을 향할 일이 없으리라 여겼던 몽둥이에 맞아 죽었기 때문에, 시민 모두에게 두 발씩 박아넣을 만큼 넉넉히 지급된 총알에 뼈가 부서지고 살이 터져나갔기 때문에, 어느 기자들의 말처럼, "사람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죽은 듯이 살라고 입을 틀어막혔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총으로 주먹으로 몽둥이와 권력의 이름으로, 저항하지 않는 나태함으로, 곧이곧대로 믿은 순진함으로, 살아남은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비겁함으로, 자기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하는 비정함으로 해친 것에 사죄해야 한다.

침묵은 기억을 희미하게 한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말해지고 역사의 일편에 자리해야 할 기억의 지위를 불안하게 뒤흔드는 힘이 있다. 지우려 애쓰는 과거를 끊임없이 글로, 말로, 이야기로 불러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모든 비극은 한 번으로도 족하다. 기억에 올바른 자리를 주는 것이 그 시작이다. 끝에서 시작해 빈 자리를 채우는, 마땅히 찾아올 이를 기다리는 이야기는 이 영화를 보고 듣고 읽을 이에게 무엇을 전할 수 있을까. 그저 읽고 듣고 볼 일이다. 잊지 말라, 외침에 잊지 않겠다 약속할 뿐이다. 있는 힘껏.


" 독재 권력이 거대한 국가권력을 앞세워 개인의 욕망을 채우려 할 때 우리의 형제, 가족, 이웃은 그 권력 앞에 무기력하게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인해 인간의 존엄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폭력의 희생자는 여전히 질긴 삶을 영위하고 있다."

" 상처를 평생 가슴에만 묻고 살았을 힘없는 소시민 철수네 가족을 통해, 국가가 휘두른 폭력의 결과가 개인에게 한평생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담고 싶었다. 어떤한 경우든 공권력으로 국민의 존엄을 짓밟는 행위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를 구하고자, 이 이야기를 여러분께 보낸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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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공간에서 너를 그린다 - 세월호참사 10년, 약속의 자리를 지킨 피해자와 연대자 이야기
세월호참사 10주기 위원회 기획, 박내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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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0년 전 바로 그 일의 정확한 경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때의 충격을 기억하지 못 하는 이는 많지 않다. 적어도 "오보"로 순식간에 고꾸라진 희망과 지난한 투쟁을 지켜본 이라면.

특별하지 않은 날, 보통의 어느 날, 수십 수백명의 사람이 해상 재난으로 죽었다. 구조할 시간도 여력도 있었건만 미흡한 초기 대응과 완전히 엇나간 후속 대처로 살랄 수 있었던 목숨을 잃었고, 책임자는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으며, 슬픔은 왜곡과 모욕으로 얼룩졌다.

원인과 추이를 두고 수많은 말들이 오갔다. 생각이 있든 없든, 돌아가는 사정을 알든 모르든 모두가 말을 얹었다. 그렇게 오가는 말들에는 슬픔이, 분노가, 공포가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어떻게 책임을 지는 사람이, 국가가 무고한 사람을 버릴 수가 있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욕과 조롱 또한 적잖이 목소리를 높였다. 누군가는 "내란세력"의 조작을 의심했고, 누군가는 자기 이득을 위해 꾸며내기를 원했으며, 누군가는 "놀러가다 죽은 걸 왜 남을 탓을 하느냐" 소리를 질렀고, 또다른 누군가는 알지 못하는 죽음을 조롱하기 바빴다.

차마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이 시류와 집단과 권력 뒤에서 던져졌다. 죽은 사람과, 죽은 것과 다름 없는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에게.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흐른 지금, 어쩌면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이제는 그만 하라"고 말한다. 잊을 떄도 되지 않았느냐고, 왜 지금까지 물고 늘어지느냐고, 이미 끝난 일이 아니냐고.

정말 그런가? "이제"와 "때"와 "끝난"은 언제, 누구에게 말해질 수 있는가? 슬픔에는 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애도에는 끝이 있어야 하는가?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을 넘어 끝나지 않은, 몇 번이고 반복되는 참사가 현재의 자리에서 쓸려나가지 않도록 있는 힘껏 붙잡는 사람들이 있다. 증거를 남기고, 책임자에게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하고, 잊혀질 수 없는 것을 사라지지 않게 보존하여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것이 정말 상식 밖의 일이라면, 단 한 번의 과오로도 충분하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마땅하다. 정말 그러한가. 그것들은 정말 지나간 일이 되었는가?

"지나간 일"은 책임자가 마땅한 책임을 졌을 때, 해결되어야 할 것이 모두 해결되었을 때, 한 점의 의문도 남지 않았을 때 비로소 말해질 수 있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때, 그것은 비로소 과거에 안착할 수 있다.


이는 그렇게 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수많은 참사들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말과도 같다. 그것들이 과거의 일이기를 원하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살아남아진 사람, 남겨진 사람일것이다.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이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기억 너머로 자연스레 사라지기를 바라는 이일 것이다. 그래도 되기를 가장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직도, 말만 들어도 아는 재난들이 있다. 너무도 끔찍해서 오히려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 죽음들이 있다.그것들은 제대로 기억되고 있는가? 우리와 그들에게는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하여 받아들일 시간이 주어졌는가? 우리 사회에서 '재난'의 지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디의 누구에게라도, 재난을 각오해야 하는 일상은 당연하지 않다. 죽음으로 내몰려도 되는 사람은 없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세월호 희생자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그 때 그 시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는 마음은 여전히 참담했다.

사람이 사람을 향하는 마음을 한 단어로 모으면, '차마'일 것이다.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사람을 돕게 하고 불의에 나서게 하는, 함께하도록 하는 힘일 것이다. 차마 모른척하지 못하는, 차마 잊지 못하고 차마 등돌리지 못하는 이야기에서 나는 세상 무엇보다 깊은 슬픔과 사랑과 큰 힘을 보았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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