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멜론 슈거에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최승자 옮김 / 비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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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이 책에 약간의 개인적 악몽같은 기억이 있다… 이전 판본에서도 아름다웠던 그 표지와 어쩐지 달콤한 느낌을 주는 제목에 홀려 읽었으나 당최 무슨 내용인지,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다는 말인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와 산문의 경계에 걸쳐있는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었던 탓에 몇 번을 읽어도 처음으로 돌아가 '그래서 이게 무슨 내용이라는 건데'에 대답할 수 없었고,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마음을 뗄 수 없는' 책으로 담아두기만 했다.

그렇게 유야무야 흐린 기억 속의 그대(!)로 남겨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든 독자는 나 하나뿐이 아니었던 걸까, 어딜 가나 "명작"의 위엄을 두른 이 책을 마주쳤고, 그때마다 "이 책을 읽어봤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곤란함으로 여태껏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여기엔 줄거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딱 떨어지는 정답, 올바른 해석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심지어 의도된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간의 고민처럼,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마음을 뗄 수 없는' 책으로 두면 족했던 것이다…


해서, 드디어 '좋았지만 설명하긴 곤란한 책' 딱지를 뗄 수 있게 되었음을, 이제서야 홀가분한 마음으로 브라우티건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음을 알린다. 더하여, 이 책의 번역기(?)에는 정말이지 '마음을 울린다'고밖에 할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최승자 시인이 어느 책방에서 우연히 마주한 이 책을 품어와 손수 옮겼다지. 운명이랄지, 기적이라고 해야 할지… 이국의 땅에서 이 책을 마주한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정답이나 올바른 해석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워터멜론 슈거"라는 환상적인 물질로 이루어저 온통 달큰한 향내가 풍길 것만 같은 몽환적이지만 기쁘지 않고 평화로우나 마냥 즐겁지 않다. 어딘가 자꾸만 슬프고 헤매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상한 작품이다.

p.13 나는 너비가 1센티미터인 강을 하나 알고 있다. 내가 그걸 아는 이유는 온종일 강가에 앉아 있으면서 재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오후 한중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었지.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강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다.


읽을 때마다 마음에 콱, 들어박히는 부분과 이입하게 되는 인물이 제각각이라는 점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내내 마음에 담아두게 한 이유가 아니었던가 싶고. 이상하고 슬프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언제 읽어도.

이를테면, 뭔가를, 소중한 것을 두고 온 것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언젠가는 이 평화로운 풍경이 영원하기를 빌었다. 아무도 그들의 일상을 깨트리지 않기를, 언제까지도 이 지루하고 잔잔한 나날이 계속되기를.

또 다른 날엔 가본 적도 없는 아이디아뜨를 그리워하며 울었다. 예측할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곳, 잘 아는 사람과 익숙한 하루가 반복되는 곳.

p.17 오래전 당신에게 있었던 어떤 일에 대해 생각한다고 해보자.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데 당신은 답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혹은 아주 세차게 쏟아졌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 혹은 당신은 어느 강물 속을 바라보았다. 당신 곁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막 당신을 만지려 하고 있었다. 당신은 그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이번에는, 자꾸만 울음이 나서 책장을 덮어야만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증오가 내 것인 것만 같았다. 숨쉬듯이 익숙한 사이가 겉돌듯 엇나가는 일이 꼭 내 얘기인 것만 같았다. 가진 적도 없던 지루하고 고요한 영원을 빼앗긴 것만 같아 서러웠다.

이 작품의 틀을 한정지으려는 시도는 어떤 식으로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읽는다기보다 차라리 부옇게 희미한 빛에 의지해 정처없이 헤맨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는요? 누가 악인이고 주인인가요? 그러나 골짜기 하나, 다리 하나라도 그려내는 순간, 그 연약한 세계는 부서져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에 와서, 작가의 배경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이 작품의 의미를 규명해낼 수 있는가. 조금도 가능하지 않을 뿐이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세계를 자꾸만 돌아보고 사무치게 그리워하기를. 오직 그렇게 알 수 없는 어딘가의 실재로 남겨두기를 바랄 뿐이다.

p.103 "그래, 말해주지. 이곳에서 썩은 냄새가 나. 여긴 절대 아이디아뜨가 아니야. 이건 당신의 상상이 꾸며낸 허구야. 여기 있는 너희 모두가 이 등신 같은 아이디아뜨에서 등신 같은 짓을 일삼는 한 무더기의 등신이란 말이야. 아이디아뜨라고? 하하. 웃기지 마. 이곳은 겉만 번지르르한 곳이야. 아이디아뜨가 벌떡 일어나 너희를 깨문다 할지라도 너희는 아이디아뜨를 모를 거야. (...)"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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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심장 훈련
이서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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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치는 순화와 다르다. 후자에는 일말의 쌍방 노력이랄지, 기만에 가까운 면피책을 욱여넣어볼 수 있겠으나, 전자는 그 알량한 체면치레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하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

어린 동물은 세상에 끄집어내지는 순간부터 순치된다. 원석, 짐승의 그것, 형태를 간신히 갖추고 심장이 뛰고 숨을 쉬어야 하는 세계의 규칙으로 다듬어진다. 꺾이고 깎이고 우그러진다. 비정형존재, 무르고 뜨거운 이를 틀에 넣고 꾹 눌러 쾅 두드려 뽑아내면, 짠. 사람이 됩니다.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 "별나지 않은 것".

그것을, 다시 앞으로 돌아가, 순치가 아니라 말할 수 있는가? 버거운 애, 미친 애, 정말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그런 애. 초대장도 없이 불려나온 규칙 바깥의 존재는 그렇게 얻어맞고 멱살을 틀어잡히고 밀어내지고 수치스러워지며 순응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생존을 위한 복종이다. 여자아이들은 그렇게 사람이 된다.

p.80 내 부모는 아주 많은 순간에 나를 수치스러워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수치심을 연기했다. 서울의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 나와 부모를 노려보았고, 그럴 때마다 부모는 성심성의껏 수치심을 공표했다. 저도 제 아이가 부끄럽습니다. 이런 아이를 낳아서 죽도록 죄송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내 부모를 조금 용서했다. 나는 그 모든 걸 나와 무관한 연극을 감상하듯이 지켜보아야 했다.


어른들의 세계를 평정하러 온 명랑소녀들, 그렇다. 평정이란 이전의 것을 부수고 깔아뭉개고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지극히 잔인하고 타당한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독하고 절망스러워 유쾌한 행보. 인생은 멀리서 봐야 희극이라지. 이 세계의 여자아이들은 말한다. 아니, 독자를 진창에 처박는다. 자, 이제 비극이 됐죠. 감히 동정하지 마세요. 이것이 나의 세계입니다.

무정한 세계의 어린 신. 부서지고 깨지고 멍들어 도저히 제 몰골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이들 절대자는 무엇으로부터 태어났기에 이다지도 지독히 슬프고 끔찍이 고독한가.

p.174 그렇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의 투쟁을, 공포를, 두려움과 슬픔을, 그 모든 절박한 성장을 믹서에 갈아 넣어 통째로 들이마시며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우리의 생을 자위 도구로 전락시키려고, 이제야 겨우 자신만을 위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여자애들의 앞길에 고약한 정액을 뿌리려고.

p.311 나는 이 모든 게 좋은 경험이었다고, 혹은 성장담이랍시고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이랬었다고, 내가 그냥 이렇게 살아왔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젠장, 그냥 이렇게 살아왔다고. 내 생이 겨우 이랬었다고.


하드보일드, 환상, 기록, 그 자체로 거대한 실험, 경계를 무심히 파괴해버리는 무력한 것들. 이 잔인하고 추잡한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린 신, 어쩌면, 초월자. "여자 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고 했던가. 적어도 살려는 둬야 영원 비슷한 무언가에 닿을 수 있을텐데도.

이 세계는 더럽고 잔인하고 추악하며 비참합니다. 얻어맞고 불태워지고 목이 졸리거나 틀어막히는 것들이 것-에서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까?

p.110 사내애들은 잘만 자라나면 늠름한 투견이 된다. 그들은 군인이 될 수도 있다. 군인이 된 강아지들은 전쟁 통에 팔다리를 잃는다. 진실을 불편해하는 사람들 덕분에 군인들은 영웅 취급받는다. 하지만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영웅도 다 있단 말인가?

p.289 철조망 군인들. 그들은 망치에 머리통을 얻어맞아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다. 거대한 총을 한 손에 쥔 채 무심하고 불행한 얼굴로 땅을 감시하고 있다. (...) 사실상 감시당하는 것은 그들이며, 그들의 삶은 황폐하고 비극적이다. 군인들은 철조망이라는 거대한 감옥 울타리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고 총을 짊어지고 있다가 무자비하게 죽는다. 가장 비참한 방식 중 하나로 젊은 신체를 훼손당한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인터넷 서점에서 (사랑하는 서점을 떠올리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이서아"를 검색했고 '검색 결과 1건'에 좌절했다. 어째서 나의 세계에 점으로 나타났습니까.

(사심을 담아) 장담컨대, 이 작가의 다음 책을 설명하는 것은 단 한 문장이면 충분할 것이다. "이서아가 왔다". "바로 그 이서아"가 왔다는 말, 무엇으로도 그보다 더한 찬사를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지독한 세계의 저 밑바닥부터 뒤흔들며 뿜어져나오는 것, 창과 벽을 부수고 길을 내는 것, 단 한 번도 길들여지지 않아 거친 강바닥를 찢고 가르며 돌진하는 말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지극히 무력하여 흉포한 것이 드디어 이를 드러냈노라고. 처음과 같이, 이제 와 영원히, 이 세계를 평정하러 왔노라고.

p.172 공장장 아주머니 아저씨, 시간 나면 신에게 전해주세요. 그 비참하고 불쌍했던 여자애들이 이렇게 망나니 같은 인간으로 컸습니다. 여전히 생은 고되고 지겹지만 웃는 날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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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물리 장난감 - 일상 속 사물들에서 찾은 신기한 과학 원리
김범준 지음 / 이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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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전공에 몸담은 지인에게 '교수나 연구자는 해당 학문의 최전선 아니냐', '실제로 만나보면 어떠냐'고 물으면 매번 같은 답이 돌아온다. "그냥 오타쿠인데 다행히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장르"를 파고 있을 뿐"이라고...

반 농담 반(보다는 좀 더 되는 것 같은) 진담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결국 본질은 다를 바가 없다. 어떤 분야의 주제와 연구가 너무 좋아서, 하다 보니 적성에 맞아서... 기타 등등.

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오타쿠"가 언제 세상을 향해 뛰쳐나오는가, 하면, 눈을 번뜩이며 "이렇게 재밌는 걸 나 혼자 알 수는 없다. 이 재미를 세상에 전파해 새로운 "동지"를 모집하리라"는 결심에 모종의 확신을 얻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고래 이후로 딱히 돈 잘 버는 직업의 대명사였던 적이 없는 전공의 현실을 학부 시절 내내 체감한 자로서 조금 분하긴 하지만, 이 광기와 환희 사이의 어딘가일 "장르 영업"은 생각 이상의 힘이 있다. 확실한 증거로, 나도 홀린지 오래라 틈만 나면 기웃대고 있지 않은가...


이러나 저러나 '사람 바뀌는 일 쉽지 않다'는 말처럼, 나에게도 나름의 고질병 같은 천성이 있다. 바꿔보려고도, 숨겨보려고도 해봤지만 결국 둘 다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고 있는 그것은, 호기심이다. "원래 그래" 내지는 "넌 참 별 게 다 궁금하다"는 핀잔 겸 비난에 익숙한 사람에겐 저 두 마디만큼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도 없다.

아니, 나야말로 '원래 다들 그렇게 궁금해하고 사는 게 아닌가' 싶단 말이다. 솔직히 그렇잖아요. 분명 투명한 개구리알이 컵에 가득 차 있는 걸 봤는데, 물을 부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뭔지, 부리 하나로 손끝에서 떨어지지 않는 신기한 모형은 대체 무슨 원리로 저러는 건지.

마구잡이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공에서 통계적인 규칙을 발견할 수 있을지. 아찔하게(라고 쓰고 고문이라고 읽는)놀이기구의 원리가 대체 뭐길래 다들 좋다고 줄을 서가며 타는 건지.

p.284 요즘 전기로 작동하는 전기차나 하이브리드 자동차도 속도를 줄일 때 전자기 유도를 이용해요. 자이로드롭의 속도를 줄이는 원리와 정확히 같아요. 그리고 이때 생성된 유도 전류를 이용해서 자동차의 배터리를 다시 충전할 수도 있죠.


해서, 읽기 전에 한참을 고민했더랜다.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데다 사회 현안에 대한 분석도 아니라 요약하기가 영 곤란한 이 책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첫 챕터를 마칠 때쯤, 확신할 수 있었다. "아, 이 사람도 "오타쿠"구나...! 이거 영업이네...!"

내내 유쾌했고, 쪼끔, 단언컨대 조금이 아닌, 쪼끔, 분했다. 축하합니다. 이달의 영업왕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렇잖아도 교단에서 꿈나무 양성에 힘쓰고 계시니 교양독자야 뭐, 손쉽게 홀릴 수 있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투정 섞인 애정의 고백이다. 과학은 낭만이다. 정확히는, 과학하는 마음은 낭만적이다. "원래 그래"의 세계의 포장을 굳이 벗겨 속을 들여다보는 것, "별 게 다 궁금해" 파고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

p.78 우리가 중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갑갑해진다면, 하늘 위로 바람을 불어보세요. 평형을 이루며 공중에 떠 있는 탁구공을 상상하면서요.


그래서, 이 넓고 무심한 세계에 이해할 수 있는 구석이 있음을 확인하는 것. 일상에서, 장난감에서, 작고 사소한 물건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를 양껏 상상하고 끌어내는 즐거움을 재발견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말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평생의 즐거움으로 향하는 문, 활짝 열어젖히는 초대는 기껍다. 물리학자 또한, 그렇다. 당연함 너머의 세계, 당연함을 이루는 원리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장난감을 통해, 손끝의 즐거움을 따라.

p.7 너무 익숙해서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어도, 물리학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제법 많아요. 너무나 익숙해서 늘 당연하게 생각했던 현상을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깨달을 때 저는 등골이 오싹한 경이로움을 여전히 느낍니다. 세상도 경이롭고 물리학도 경이롭습니다. 이처럼 경이로운 물리학을 만들어 낸 우리 인간도 참 경이롭습니다.

p.114 빙산의 일각을 이해하면, 얼어붙은 호수 아래에서 물고기가 살 수 있다는 것도 함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재밌어요. 과학의 눈으로 보면 아주 달라 보이는 두 자연 현상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때가 많아요. 이럴 때 저는 제가 과학을 정말 사랑한다고 느낍니다.

*도서 제공: 이김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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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못하는 사람들 - 우리의 인간다움을 완성하는읽기와 뇌과학의 세계, 2024 세종도서
매슈 루버리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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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자찬 내지는 거들먹대는 것처럼 보일 줄을 뻔히 알기에 굳이 꺼내지는 않는 말이 있다. 읽기는 내 삶이었고, '읽기'를 시작한 이후로 내 삶에 책이 없었던 적이 없다. "나를 이루는 것은 팔할이 활자와 종이로 이루어진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읽었고, 다른건 몰라도 읽는 능력만은 숨쉬듯 당연하고 "정상 기준"이 요구하는 선 아래로 벗어난 적이 없었기에 오히려 의식적인 취미 개발로서의 독서를 이해하는 데 곤란을 겪기도 했다. '읽는 아이'였고, '읽는 어른'이 된 지금, 나의 정체성의 많은 부분은 독자로서의 그것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것은 나의 자부심이자 정체성인 동시에 두려움이기도 하다. 물성으로서의 책, 의미로서의 책, 언제나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존재하는, 숨처럼 공기처럼 당연한 존재로서의 책과 그것에 닿을 수 있는 최소 조건인 '읽기 능력'을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는 해묵은 공포가 있다.

p.170 읽기능력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학습한 기술을 잃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존엄성을 상실한다는 뜻이며 부분적 인격 또는 불완전한 인격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 읽기능력을 잃은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완전한 인간'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이 두려움에는 근원이 있다. 나는 이미 뿌리를 잃은 적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 없이 욀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책을, 그 첫 문장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때, "눈이 글자 위를 미끄려져" 붙잡을 수 없었을 때 나의 세계는 바닥부터 흔들려 무너졌다.

이전과 큰 차이 없이 회복한 지금도, 어쩌면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그 때의 기억은 수시로 나를 찾아와 흔들어 놓는다. 이제는 익숙해진 통증에 눈을 감고 무력하게 누워만 있을 때는 마음과 몸이 모두 나의 '읽는 세계'를 앗아갈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다른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비단 남을 위하고 함께 사는 일을 위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 없다는 깨달음은, 다양한 세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앎은 나 자신의 변화, 다양한 '정상'으로의 이동과 적응을 가능케 한다.

p.162 자폐인 독자와 똑같지는 않아도 자폐인 독자도 책과 만나며 즐거움을 느낀다. 자폐적 읽기 방식을 통해 일반 독자에게 읽기와 다른 활동의 경계가 어디인지, 무엇보다 읽기의 경계를 벗어나 텍스트를 느끼는 그들만의 즐거움에 과소평가된 측면으로는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사는 동안 만나온 "'읽기'와 먼 사람들"에는 단 한 번도 책읽기가 즐거웠던 적이 없는 이도, '읽기의 즐거움'을 등지거나 잃어버린 이도, '정상적 읽기' 자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이도, "정상에서 벗어난 '읽기' 방식" 탓에 스스로를 독자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이도 있었다.

"인간의 뇌는 읽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말과 달리, 인간은 읽는 동물이다. 이것은 "인간은 이야기를 짓는 동물"이라는 상투적 표현과는 궤를 달리한다. '읽기'는 고도의 학습 능력이 종합된 결과인 동시에 좀처럼 상실되지 않는 능력이다.

이 책은 난독증, 자폐인, 문해력 상실, 공감각과 환각, 인지증(치매) 등, "정상적 '읽기'" 밖의 독자들과 그들의 전략을 고루 펼쳐보인다. "정상 바깥"의 너무도 넓고 다양해 기존의 의미처럼 단일하고 명확한 '읽기'의 기준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p.315 리딩투커넥트 위원들은 독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텍스트 전체를 이해하든, 몇 페이지에만 머물든, 한 문구를 곱씹든 이미지만 즐기든, 그들은 활자 매체와 상호작용하고 있다.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도우면 인지 결함이 있는 사람도 책과 계속 만날 수 있다. 나는 이런 방식도 읽기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들의 방법이 과거에 읽어왔던 방법과 전혀 비슷하지 않아도 말이다.


"인간의 뇌는 읽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읽는 동물'이다. 이 책의 독자들은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읽기' 혹은 읽기 이후의 세계에 적응하고,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

독자는 어쩌면,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경계를 지우고 다양성이 포괄하는 범위를 넓히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다르다는 것은 실패와 미달의 동의어가 아니라고.

p.339 읽기를 스펙트럼으로 본다고 해서 읽기와 읽기가 아닌 것을 절대로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 하지만 우리는 제한적이지 않은 정의도 염두에 두고, 다양한 행위를 구분하는 일보다 이 행위들의 공통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p.343 신경다양적 독자의 사례는 읽기 방법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음을 알려주고, 다른 사람과 비슷하거나 다른 자신만의 취향을 되돌아보게 한다. (...) 논의를 이어나가면서 자신이 읽기 습관이 완전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을 같은 생각을 해왔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어도 좋다.



*도서 제공: 더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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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 문보영 아이오와 일기
문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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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에 앞서, 고백합니다. 그간 내게 문보영이라는 시인은 어쩌면 묵묵하고 또 담담하면서 쓸쓸하고 건조한 이미지였기에, 이 책 또한 씁쓸한 맛이 강하게 배어나는 점을 빼면, 뭐랄까, 크게 특별하지 않은 에세이들의 반열에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뒤집어졌지만요.

이 사람이 이렇게 귀엽고 엉뚱해 어디로 튈지 전혀 모르겠는 이였던가? 정녕 이 사람이 부슬부슬하고 퍼석퍼석한 환상을 그려내던 그 시인이 맞나?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 문보영의 삶을 제대로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쪼끔(조금 아님) 웃긴..." 이랄까.

p.14 아이오와에 와서 가장 먼저 한 말은 "My room has no view"이다. 작가들은 ‘아이오와 하우스 호텔’이라는 곳에 머문다. 호텔 인근에 아름다운 아이오와강이 흐르고 햇빛이 가득하지만 방은 어둠에 잠겨 있다. (...) 작가들에게 어두운 방을 배정하라는 상부의 지령이 있었나? 그게 아이오와 IWP의 은밀한 목적인 걸까? 빛이 없는 곳에서 어떤 글이 탄생하는지 실험하는…. 여기 일종의 글쓰기 감옥?

p.91 여하간 그렇게 걷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도 없었다. 점점 더 모르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둘은 신나게 대화를 하고 나는 소외된 채, 나아가 방해자가 된 채 걷고 있었다. 난 에바의 옷자락을 붙잡고, 에바야... 이건 좀 에바 같은데, 해 뜨면 가보지 않겠냐고 말했는데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생이 영화라면 아무래도 장르는 호러가 아니겠냐고. 내게 삶은 대체로 불안하고, 끊임없는 계획과 통제와 경계...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자그마한 사랑의 순간과 찰나를 파고드는 공포와 기겁의 연속체다. 하루의 크레딧이 올라갈 쯤엔 이미 모든 기력을 탈탈 털어쓰고 이제 그만 극장 문 닫죠... 의 심정이 되어버린달까.

그러니 이 작가의 기행(여러 의미로...)은 놀라움의 연속이 아닐리가. 두렵지 않은가? 무섭고 불안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꼭 그만큼 즐거웠다. 엉뚱하고 사랑스럽고 다정한, 심심찮게 헐렁한 구석이 있는 시인의 어떤 순간, 삶의 단편을 조금 나누어받는 경험이.

잠시 머무르는 이방인, 생각보다 대책없고 삶의 면면에서 귀엽고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구석을 발견해낼 줄 아는 사람. 여전히 나는 시인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가'도 '사'도 '자'도 아닌, 시인. 시 곁에 나란히 자리하는 사람, 그런 이가 써내는 시를 알알이 들여다보고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하기에.

p.232 몽 씨는 사람을 안 만나고 대체로 사람 아닌 것들로 집안을 꾸며놨는데 (...) 대체로 사람 빼고 좋아하는구나. 내가 사람이어서 미안했다. 저 사람과 있을 때는 최대한 사람답지 않은 모양으로 있어야겠다. 그게 어떻게 하는 거냐 하면 내가 들판 아닌 방향으로 걸을 때 조사한 그 나무들처럼 존재하는 것일 테다. 사람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나 자신에게도 좋으니까, 나는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오래도록 작은 동네의 달팽이처럼 살고 싶다. 강박적인 효율과 계산의 세계에 사는 나는, 정처없이 걸어본 적이 없다. 적어도 자의로는. 들판의 길을 기꺼이 걸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매 순간 단단히 각오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불안에 흔들리며 울먹일까봐.

오래 전에 먼 곳에 자리잡은 친구와 근래 들어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찾아 낯선 땅으로 건너간 이들을 떠올리며 읽었다. 어떤 사람의 세계는 저럴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괜찮다'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부딪혀가며 배울 수도 있겠구나. 사랑을.

p.209 이곳에서 나는 강해지는 것 외의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안다. 어떤 따뜻한 곳에서는 내가 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호구처럼 살아도 된다는 걸 안다. 아이오와에서도 똑같이 움츠려 있지만, 나의 웅크림은 보상받는다. 사람들은 호의를 알아차리고 보답한다. 며칠 전에 타로를 봤다. 이번 달에 당신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 동시다발의 사랑이 발생하여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카드는 말했다. 나는 강해지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변하지 않기로 한다.

p.266 사랑이 있을 때 많이 써둬야 한다. 사랑이 있어야 묘사의 눈을 갖게 되기 때문에 만상을 'devour'할 수 있다. 'devour'이라는 단어는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가오나시가 사물과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장면을 상기시켜 쿡 웃음이 나온다.


다정하지만 무르지 않게, 자기만의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이와 또 그러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읽고 난 지금, 여전히 집달팽이(민달팽이→달팽이→집달팽이 순으로 은둔과 고립의 정도를 더한다는 나의 지론) 인간인 나는 울고 싶은 날에, 바람에 눈을 감고(질끈! 말고 아이고... 정도) 기꺼이 모르는 이와 인사를 나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삶은 여전히 벅차거나 두려울 수 있지만, 어쩌면, 들판의 길로 기꺼이 헤매고 돌아가기를 택한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괜찮을 수 있다고, 조금 슬프고 구겨지고 낡고 닳아 헤진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p.60 I want to live here. I want to leave here. 살다와 떠나다를 구별할 수 없다면, 내가 여기 살고 싶다고 말할 때, 너는 내가 떠나고 싶어 한다고 이해하겠지. 이젠 떠나고 싶다고 말하면 여기서 살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지. 그건 좋은 걸까 나쁘 걸까 아름다운 걸까. 그건 어두운 밤, 강을 건너는 새끼 오리 같은 것이거나 내가 좋아하는 들판의 나무들처럼 슬프겠지. 살고 싶다는 말은 떠나고 싶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p.110 제 하루는 완벽하지 않은 언어로 누구가와 대화를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일어나자마자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말문이 막히는 거 좀 좋지 않나요? 왠지 안전한 기분이 들지 않나요?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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