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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멜론 슈거에서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최승자 옮김 / 비채 / 2024년 5월
평점 :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이 책에 약간의 개인적 악몽같은 기억이 있다… 이전 판본에서도 아름다웠던 그 표지와 어쩐지 달콤한 느낌을 주는 제목에 홀려 읽었으나 당최 무슨 내용인지,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다는 말인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와 산문의 경계에 걸쳐있는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었던 탓에 몇 번을 읽어도 처음으로 돌아가 '그래서 이게 무슨 내용이라는 건데'에 대답할 수 없었고,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마음을 뗄 수 없는' 책으로 담아두기만 했다.
그렇게 유야무야 흐린 기억 속의 그대(!)로 남겨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든 독자는 나 하나뿐이 아니었던 걸까, 어딜 가나 "명작"의 위엄을 두른 이 책을 마주쳤고, 그때마다 "이 책을 읽어봤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곤란함으로 여태껏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여기엔 줄거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딱 떨어지는 정답, 올바른 해석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심지어 의도된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간의 고민처럼,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마음을 뗄 수 없는' 책으로 두면 족했던 것이다…
해서, 드디어 '좋았지만 설명하긴 곤란한 책' 딱지를 뗄 수 있게 되었음을, 이제서야 홀가분한 마음으로 브라우티건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음을 알린다. 더하여, 이 책의 번역기(?)에는 정말이지 '마음을 울린다'고밖에 할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최승자 시인이 어느 책방에서 우연히 마주한 이 책을 품어와 손수 옮겼다지. 운명이랄지, 기적이라고 해야 할지… 이국의 땅에서 이 책을 마주한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정답이나 올바른 해석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워터멜론 슈거"라는 환상적인 물질로 이루어저 온통 달큰한 향내가 풍길 것만 같은 몽환적이지만 기쁘지 않고 평화로우나 마냥 즐겁지 않다. 어딘가 자꾸만 슬프고 헤매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상한 작품이다.
p.13 나는 너비가 1센티미터인 강을 하나 알고 있다. 내가 그걸 아는 이유는 온종일 강가에 앉아 있으면서 재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오후 한중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었지.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강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다.
읽을 때마다 마음에 콱, 들어박히는 부분과 이입하게 되는 인물이 제각각이라는 점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내내 마음에 담아두게 한 이유가 아니었던가 싶고. 이상하고 슬프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언제 읽어도.
이를테면, 뭔가를, 소중한 것을 두고 온 것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언젠가는 이 평화로운 풍경이 영원하기를 빌었다. 아무도 그들의 일상을 깨트리지 않기를, 언제까지도 이 지루하고 잔잔한 나날이 계속되기를.
또 다른 날엔 가본 적도 없는 아이디아뜨를 그리워하며 울었다. 예측할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곳, 잘 아는 사람과 익숙한 하루가 반복되는 곳.
p.17 오래전 당신에게 있었던 어떤 일에 대해 생각한다고 해보자.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데 당신은 답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혹은 아주 세차게 쏟아졌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 혹은 당신은 어느 강물 속을 바라보았다. 당신 곁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막 당신을 만지려 하고 있었다. 당신은 그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이번에는, 자꾸만 울음이 나서 책장을 덮어야만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증오가 내 것인 것만 같았다. 숨쉬듯이 익숙한 사이가 겉돌듯 엇나가는 일이 꼭 내 얘기인 것만 같았다. 가진 적도 없던 지루하고 고요한 영원을 빼앗긴 것만 같아 서러웠다.
이 작품의 틀을 한정지으려는 시도는 어떤 식으로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읽는다기보다 차라리 부옇게 희미한 빛에 의지해 정처없이 헤맨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는요? 누가 악인이고 주인인가요? 그러나 골짜기 하나, 다리 하나라도 그려내는 순간, 그 연약한 세계는 부서져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에 와서, 작가의 배경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이 작품의 의미를 규명해낼 수 있는가. 조금도 가능하지 않을 뿐이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세계를 자꾸만 돌아보고 사무치게 그리워하기를. 오직 그렇게 알 수 없는 어딘가의 실재로 남겨두기를 바랄 뿐이다.
p.103 "그래, 말해주지. 이곳에서 썩은 냄새가 나. 여긴 절대 아이디아뜨가 아니야. 이건 당신의 상상이 꾸며낸 허구야. 여기 있는 너희 모두가 이 등신 같은 아이디아뜨에서 등신 같은 짓을 일삼는 한 무더기의 등신이란 말이야. 아이디아뜨라고? 하하. 웃기지 마. 이곳은 겉만 번지르르한 곳이야. 아이디아뜨가 벌떡 일어나 너희를 깨문다 할지라도 너희는 아이디아뜨를 모를 거야. (...)"
*도서제공: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