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 도시로 숨 쉬던 모던걸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기까지
김명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짧게 자른 머리에 양장을 하고, 맵시 좋게 화장을 한 채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 최신 유행과 고학력으로 무장한 여자. 직업을 갖고, 이름을 대고, 고립되고 침묵하기를 거부하는 여자. 욕망과 의견이 있는 여자. "현모양처"가 되어 몸이 부서져라 가족을 위해 희생할 의무에 순종하지 않는 여자.

"모던 걸이 아니라 못된 걸". 사치와 허영에 빠져 돈 쓰기를 허투루 하는 여자. 연애며 낭만에 넋을 빼고 달려드는 여자. "소박하고 순진한" 도덕을 버리고 외제 사치품에 남자만큼이나 밝은 여자. 욕심도 많아 더 배우고 더 돌아다니기를 원하는 여자. "감히" 여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일제강점기, 조선 아닌 조선에, 경성 거리 한복판을 누볐던 신세대 여성들, 이른바 '신여성'을 칭했던 말들이다. "여자다운 맛"이 없는, 사회악인 동시에 계몽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새 시대를 열어갈 변혁의 아이콘이었던 여성들. 선망과 폄하를 한몸에 받았던 그들, 그 많던 신여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p.11 1920년대 초반 《신여성》의 첫머리에 실린 논평•논설류 기사들은 여성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인재로 거듭나야 함을 부르짖으면서도, '밖'에 등장한 신여성을 끊임없이 비난했다. (…) 사회의 이중적 잣대, 강력한 여성혐오, 노동 기회의 원천 봉쇄 등으로 신여성은 '밖'에 자리하지 못하고 점차 도시의 거리에서 사라져 갔다. 그 많던 신여성은 다 어디로 갔을까?


1923년 창간되어 1934년 폐간된 《신여성》은 제목처럼 '신여성'을 주독자로 삼은 최신 유행 잡지였다. 여성의 계몽과 사회참여, 변혁을 요구하는 동시에 공고한 차별과 혐오로 점철되었던 잡지, 외모를 가꾸고 유행을 좇는 여성은 천박하지만 탈성화된 노동자로서 공적 영역에 나선 여성은 여자다운 매력이 없다고 반성을 요구하던 잡지.

여성을 순진무구하고 연약한 보호대상으로 그림과 동시에 탐욕스러운 간계로 남성을 유혹하는 사회악으로 치부했던, '신여성'을 꾸짖는 《신여성》의 엘리트 남성집단과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압력, 더 완벽하고 더 무지할 것을 요구받았던 100년 전 '신여성'과 이 시대의 여성들의 모습은 얼마나 다른가.

p.131 식민지 여성교육은 소수의 여성에게 교육자 에이전트의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상상 속의 근대 가정,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주부를 유통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여학교는 이런 과정을 통해 함께 증식되는 욕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핍진한 현실 속에서 매번 미끄러지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결정 불가능한 욕망이기도 했다.

p.248 '아동'만 있고 '여성'이 없었던 《신여성》의 과학적 양육법은 신여성에게 '막힌 출구'와 다름없었다. (...) 스위트 홈은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좋은' 어머니와 그 품속에 안긴 아기의 모습에서 구체화되었으나, 가정이 '스위트'하게 되면 될수록 여성은 어머니로, 아내로, 주부로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스위트 홈이란 고립된 섬에 갇히고 만다.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당대의 여성혐오와 계몽일지 이상향 주입일지 모를 것이 뒤섞여있던 《신여성》의 명확한 한계와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그 막막한 장벽의 균열을 볼 수 있다. 가리려 애쓸수록 드러나는 금처럼. 강력한 부정과 통제의 다른 말은 명징한 증거다. 오래 닫혀 벽으로 착각되더라도, 문은 문이듯이. 벽을 부수고 나가면 그것이 곧 문이 되듯이.

《신여성》의 창간으로부터 근 100여 년이 흘렀다. 《신여성》과 '신여성'의 시대와 지금 우리 시대는 얼마나 다른가? 끝없이 태어나고 자라 등장하는 우리 사회의 '신여성'들은 100년 전의 그들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그때의 희망, 이상, 한계와 비판은 바라던 대로 '구시대의 한계'로 흘러갔는가?

p.98 강력한 남성의 '시선' 체제가 작동하는 담론의 장이 잡지 《신여성》임에는 분명하다. 그와 동시에 그 시선 체제를 탄생시킨 불온한 신여성의 존재감 또한 분명하다. 여우털 목도리 때문에 한껏 조롱당할지언정 비로소 자기 몸을 보살필 수 있는 여성이 등장했고, 교만과 허영으로 가득한 사랑을 꿈꾼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p.180 신여성의 대중문화 소비가 단순히 여성의 지갑을 여는 일에만 관련되어 있었다면, 남성들이 여성의 문화소비와 즐거움 추구를 그렇게 맹렬하게 공격하며 위험과 경계의 담론을 오랫동안 반복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여성들의 문화소비는 분명 남성적 사회 질서에 틈을 만드는 지점으로 작용했고, 그녀들의 욕망이 표출될 수 있는 적극적인 기제였다.


안타깝게도 어느 정도는 그렇고, 어느 정도는 여전히 그러하거나 더 처참해졌다고 할 수 있다. 매일같이, 말그대로 매일 여성혐오로 점철된 사건, 기사, 언동이 사회로 배설된다. 이 시대의 여성들은 더 완벽해지고 더 새로워지는 동시에 더 구시대적이고 더 연약해지기를 요구받는다. 마치 인간 이전에 여성이라는 이름이 있어 인간인 동시에 여자여야 한다는 듯이, 곱절로 촘촘한 틀에 꼭 맞게 생산되어야 한다는 듯이.

그러나 동시에, 세상은 달라졌다. 참지 않는 여자들, 순종하지 않는 여자들, 여성인 동시에, 여성이므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살아남은 마녀의 후손들, "못된 걸". 이 시대의 '신여성'들은 다음 세대의 '신여성'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한 걸음에 희망이 있다. 영원히 부서지지 않을 천장은 없으니.

p.249 우리는 당면 과제 해결을 위한 출구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 출구는 열려 있을까? 설마 막힌 출구를 또 만들어 내는 건 아닐까? 지금 우리가 만든 출구를 100년 후 세대들은 어떻게 평할까? 당시 《신여성》을 읽던 신여성들처럼 막힌 출구를 진정한 출구라고 믿으며 열심히 만들고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솔직히 두렵다. 그러나 출구를 만드는 일을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드는 출구는, 우리가 그러했듯이 뒤 세대들의 교훈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p.291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 일하는 것 자체가 여성해방일 수 없고, 남성이 집 안으로 들어와 일을 해야만 자유든 해방이든 논해볼 수 있다는 인식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현실은 인식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 1920-1930년대 '직업부인'들은, 슈퍼우먼이 되지 못할 바에는 직장 생활을 포기하라는 사회적 압력에 시달리는 현대 직업여성들의 원형이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 상관으로 한국사 교과서 심의 문제로 소란하다. 툭하면 애국과 민족을 부르짖는 나라답게 온 사회가 발칵 뒤집어졌느냐 하면 역시나 그렇지는 않고, 조용히 소란하다. 아는 사람만 알고 이상한 줄 아는 사람만 그냥 두면 안 된다고 성토할 뿐 대체로 유야무야 넘겨질 분위기다.

아무리 나라 꼴이 말이 아니고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는 해도 차츰차츰 붕괴되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진 않았다. 주변에서는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p.31 리샹란, 아니 야마구치 요시코와 그의 동료들은 "아무리 사과해도 아물 수 없는 상처"라며 죄를 고백했다. 그러고서도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지 않는 편법을 추진했다고 비판받았다. 지금은 한국 대통령이 나서서 일본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며 손을 젓고 있다. (역사의) 전진이나 후퇴와 같은 거칠고 자의적인 표현은 가급적 삼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써야만 한다.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p.96 약육강식의 질서를 승인하게 되면 약자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벌이는 투쟁이 무의미해진다. 강자는 지배할만해서 지배하고, 약자는 지배당할만해서 지배당한다.


콰이강의 다리, 자유인의 긍지를 그린 영화로도 남은, 실상은 무자비한 착취의 현장이었던 그곳에서 조선인은 ある(사물이 '있다')였을까, いる(생명, 마음이 있는 것이 '있다')였을까. 새까만 김상사와 "맹호"와 "청룡". 한때는 조선인이었고 언젠가는 한국인이었을 그들은, 그곳에 '가 있었던'걸까, '보내졌던' 걸까.

혹자는 대중을 개돼지라 한다. 혹자는, 심지어 독재정권을 겪은 적 없는 이가, 총칼이 시민을 겨누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또다른 누군가는 '엄격한' 피해자 상에서 벗어나는 '우리'를 부정한다. 반대로 누군가는 가난하고 힘없던 시절을 깡그리 잊는 일에 힘쓴 나머지,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지배자라는 환상에 얼굴을 파묻고 싶어한다.

p.255 "대부분의 독일인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p.224 사할린 한인의 삶을 그저 소수의 예외 사례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작은 일이라고, 국민국가에서 태어나 단일 민족으로 자라는 삶이 당연하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런 단호한 믿음이 만들어지기 위해 저 수많은 유형과 무형의 폭력이 있었다. 기억해야 할 일들이다. 무심히 던지는 상처들도 여전하다. 경계해야 할 우리 모습이다. 작은 것 속에 세계가 들어 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 하겠다고 다짐하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과연 지워진 기억 속에서 순박한 피해자이기만 했나.

스스로가 글을 쓸때만 자유롭다던 저자는 역사와 개인을 분리하는 떠내려가기 식의 책임 회피 대신, 역사와 개인을 끊임없이 '연루'되어온 관계로 재조명한다. 간결명료한 가해와 피해, 선과 악의 이분법 대신 답 없이 고민하고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기를 요구한다.

p.62 구조적 악이 있다면 그에 동조한 개인의 윤리적 책임은 간단히 면제될 수 있을까? 이학래가 수기에서 고백하듯 결코 그렇지 않다. 일본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져야 할 몫의 역사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때에만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

p.162 이광수의 시대가 지나간 지 오래다. 심지어 선진국이 됐다는 21세기 한국인데 집단 열병처럼 과학 천재에 대한 숭배가 폭발하곤 한다. (...). 황우석은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였다. 시기하는 무리에 의해 희생된 우리시대의 이순신이었다. 저 불의의 무리에 비하면 그의 공인된 조작조차 찬란하게 빛난다. 한국인의 가슴 속에 식민의 한이 퍽이나 서럽게 쌓여 있었나 보다. 비극이라고 해야 할지 희극이라고 해야 할지.


사람은 복잡하다. 사람이 모여 만들어낸 사람의 역사 또한 필연히 그렇다. 그는, 그 자신을 포함한 '우리'를, 기어코 사람의 자리, 책무의 자리에 앉힘으로써 다시금 부끄럽게 한다. 표면상으로 이 책은, 문화예술로 보는 격동의 세계사다.

그러나 파고 들어갈수록, 흔들리는 인간, 비열하거나 평범했던 평범한 인간, 번민하는 인간이 드러난다. "역사에 휘말리고 역사를 만들다가 이윽고 역사가 되는" 이름과 땅과 시간의 기억이다. 무겁고 심란하게 읽히길 바란다. 책임을 떠안는, 휘말리고 엮이는 인간으로서의 우리로 거듭날 독자들에게.

p.6 "우리가 사랑하고 실수하는 인간, 꿈과 욕망을 가진 인간"(…) 이 인간의 실존 조건이, 한 인간을 두고도 그 선악을 쉽사리 가늠할 수 없게끔 한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우리는 인간이 져야 할 역사적 책임, 역사가 그들에게 져야 할 책임에 대한 질문을 놓을 수 없다. '연루됨', 그 자체가 인간의 실존 조건이고, '자신을 역사에 연루시키는 일', 그 자체가 인간 고유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p.187 동정과 연민이 절실한 시대였다. 하지만 그게 늘 아름답지는 않았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이 되기 일쑤였고, 세상의 모순과 갈등을 덮는 포장지가 되기도 했다. 성정이 불처럼 뜨거웠던 경성의전 부속의원 의사 유상규가 동정심을 비난한 이유이기도 하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향신료 전쟁 - 세계화, 제국주의, 주식회사를 탄생시킨 향신료 탐욕사
최광용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회사는 어디일까? 기준이야 여럿이겠다만. 구글? 애플? 미쓰비시? 삼성? 다 틀렸다. 오래전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교과서나 사료 속 연도로 더 익숙할 17세기 초,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다.

유럽의 각국들이 넓어진 세계와 팽창하는 제국주의 경제에 막 익숙해졌을 무렵, 지리보다는 신비의 영역이었을 이른바 "오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거점을 두고 지금으로서도 엄청난 수백명 규모의 직원을 고용한 방대한 조직 말이다. 그 전성기의 시가총액은 현재 화폐 가치로 8조억을 훌쩍 넘는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합산이 6조 4천 가량임을 보았을 때, 그때나 지금이나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엄청난 부와 패권을 휘두르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어째서 200년 역사에도 불구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는가? 뻔하다면 뻔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할 경위로, 영국 동인도회사와의 경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더니, 뛰는 날강도 위에 나는 도적패가 있는 셈이다.

p.61 당시 네덜란드 상인들이 가진 배의 숫자는 다른 모든 유럽 국가의 배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한다. (...) 선박 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조선업이 발달했다는 의미이다. 당시 네덜란드 선박 건조비는 영국의 반에도 못 미쳤다. 대량 생산 체제의 기본인 표준화 작업이 앞서 있었기에 원가를 절감한데다 설계 능력도 뛰어났다.


17세기 이전 유럽의 식문화는, 적어도 위생과 향신료 부분에서는, 지금에 비해 가히 처참한 수준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강렬한 향미와 부패방지 효능을 가진 각종 향신료들이 그네들의 땅에 자라지 못하는 탓이다. 나름 먹을 것에 진심인 편에서 보건대, 심심하고 느끼하기만 해서 어찌 먹나, 싶었으리라 짐작한다.

앞서 말했듯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배 타고) 나가면 도달할 "미개척지"에 대한 환상과 팽창하는 제국주의의 야망이 콱, 들이박힌 사회에, 빈부격차가 극심한 사회에도, 아니, 그렇기에 부자가 있기 마련이니, 돈 많고 욕심은 더 많은 이들이 '새로운 것'에 눈독을 들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던 차에 산 넘고 물 건너, 말그대로 이국의 향취를 품고 실려온 낯선 향신료에 온 "문명 사회"가 들썩인 것도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용감하게 깃발을 펄럭이며 "야만인"과 "미개척지" 정복에 성공하면 돈이며 땅이 줄줄이 쏟아져나온다는 눈부신 "희망"을 본 이들이 어디 가만히 있을까.

p.192 15세기 말부터 시작된 이러한 도전은 '대항해'란 말로 표현 되는데 그로부터 수백 년에 걸쳐 이어졌다. 많은 사람이 폭풍우에 휩쓸려 수장되었고, 먹을 것이 떨어져 굶어 죽었고, 괴혈병과 이질 등에 걸려 죽었다. 풍토병, 말라리아와 같은 열병도 있었다. 마침내 미지의 육지에 닿았다가 그곳 원주민들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 보니 소통이 안 되어 오해가 생기면 곧바로 위험에 빠졌다. 북방 항로를 개척하겠다고 북극으로 향한 사람들은 얼음에 갇혀 죽었다.


한 번 돈맛을 보니 두 번은 더 쉬웠다. 낯선 선박과 사람, 무기에 때로는 경계하고 때로는 환대했던 선주민들은 어차피 사람으로 치지도 않았으니, 무주공산에 말뚝 하나 콱 박고 깃발부터 찌르면 제 땅이 된다고 믿던 때였으니 "문명인"이라도 냅다 밀어내고 통나무집 하나 새로 지으면 그만이었다.

항로 개척, 새로운 향신료와 안정적인 공급처를 차지하기 위한 무력 충돌로 끝없이 심화되는 경쟁은 도적이 도적을, 강도가 강도를 털어가는 꼴이었다. 자기들끼리 털고 털리는 때가 아니면 "야만인"을 짐승몰이하듯 죽이거나 죽을 때까지 부렸다. 환상과 낭만으로 부풀려진 야망은 각국이 묵인하는 학살과 약탈로 꽃피우기 일쑤였다.

p.35 유럽의 패권국들이 패권을 유지하는 필요 충분 조건은 바로 '부'였다. 그리고 이는 찬탈로 시작됐다. 그들은 자원과 노동력을 찬탈하는 것으로 자기들의 부를 키워 나갔다. 믈라카도 그랬다. 정복자들이 들이닥치면서 평화롭던 경제 활동은 중단되었고 그로부터 440년을 식민지가 되어 살아야 했다.

p.159 1605년 어느 날, 암본에 네덜란드 선박이 나타났다. 갤리언선으로 보이는 배 한 척이 수평선에 나타나더니 점점 해안으로 다가왔다. 얼핏 보아도 위용이 대단했다. 돛을 달아맨 마스트가 몇 개인지 세어 보기도 전에 갑판 밑에 촘촘히 입을 벌리고 있는 대포들이 보였다. 갑판에는 머스킷 총을 둘러메고 서 있는 병사들이 사뭇 위협적이었다.


밝히듯, 저자는 학술적 연구 대상이 아닌 실제 생활의 경험을 엮어냄으로서 생생함을 더한다. 보다 흥미롭게, 현장의 눈으로. 그러면서도 부제에서 말하듯, 이 모든 과정이 수탈의 역사임을 잊지 않는다. 제목처럼 미지의 식재와 영토를 향한 탐욕은 익히 알려진 폭력의 역사를 여는 서막이었다.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에게도 쉽게 쓰였으나 내용만큼은 무겁다. 흥미로운 무역사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무거운 마음으로, 우리 일상에 스며든 맛이 어디서 어떻게 흘러왔는지 가늠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향긋하고 강렬한 순간에 언뜻, 연기와 신음이 들려올지 모르는 일이니.

p.227 1만 5000명으로 추정되는 반다제도 전체 인구에서1000여 명만 살아남고 일부는 바타비아에 노예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들 역시 항해 도중 상당수가 사망했다. 반다에서 바타비아는 돛배로 달포를 넘겨야 갈 수 있는 거리다. 아이섬의 학살, 런섬의 학살, 이제는 론토르섬의 학살, 그리고 곧 이어질 암본 학살. 그럼에도 기록은 쿤이 반다 주민의 죽음에 대하여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p.279 향신료는 이미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었다. 가격도 많이 내려가고 새로운 향신료들이 발견되어 음식 조리법도 달라진 상황이었다. 영국은 향신료 말고도 돈벌이가 될 상품들을 개발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 지역을 떠날 것이니 영국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바로 그들의 식민지에 정향과 육두구를 옮겨 심는 것이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망과 열정의 시대 - 일제강점기 장르 단편선
곽재식 외 지음 / 구픽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년이 광복 80주년이란다. 벌써, 라고 하기엔 나와 그 이후 세대에는 일제강점기를 교과서 내지는 옛날 얘기로나 알고 자랐다. 그런 이유로 "나라 없는 슬픔"을 이해하기엔 너무 먼, 말 그대로 '언젠가'의 이야기로만 이해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반대는 어떠한가. 이제 겨우, 라고 할만한, 채 100여년도 되지 않은 이 떄에,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혹시나 해서 검색한 "광복 80주년"의 연관 기사로 내년 국제관함식에 "욱일기 형상" 깃발을 단 일본 함정이 참가한다는 내용이 뜨는 세상이다.

뭐가 그리 무서워서, 해방을 맞고도, 압제에서 벗어났다면서 뭐가 그렇게 눈치 보이는지, '전범기'도, 딱 잘라 "욱일기"라고 쓰지도 못하고 구차하게 말꼬리를 늘이는지. 누군가는 목숨을 버려가며, 또다른 누군가는 이를 악물고 숨죽여 전해온 말과 글과 이름이 다시금 홀랑 팔아넘겨질 세상이 아닌가.

나라를 빼앗긴, 주권 없는 나라의 사람 아닌 사람의, 망국의 시간이 꼭 35년이었다. 경술국치에 태어난 아이가 자라 머리가 굳은 어른으로 자라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동시에 기약 없는 희망을 갖기에는 너무도 긴 시간이다. 더구나 이 날부터 이 때까지, 딱부러지게 정해둔 것도 아닌, 끊임없이 쇠락하는 땅에서 태어난 자라온 이가 '다른 내일'을 기대하기에는 너무도 막막한 시간이 아니었나.


수많은 사람이 조금도 가질 수 없는 존엄에, 보이지 않는 내일에, 나날이 더해가는 치욕과 굴욕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 절망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되찾은 이름이, 사람으로의 지위가 다른 무엇도 아닌 빛이었기에, 그것이 바로 이태껏 광복이라 부르는 이유다.

혹자는 당시 조선인의 무지와 태만을 탓한다. 약육강식, 팽창하던 제국주의의 시대에 힘의 논리에서 밀린 약소국의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숱하게 보았다. 당장 그 누구도 나라 잃은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매국노가 여전히 파렴치한의 대명사로 쓰이는 것은, 매국이 전쟁까지 겪은 나라에서 여전히 용서받지 못할 죄로 여겨지는 것은, 단순히 대의 앞에서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말 그대로 팔아넘겼기에, 저 혼자 살겠다고 다른 이들을 짐승처럼, 물건처럼 내버려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도 자기만은 편하게 살겠다고 탐욕을 부렸기 때문이다. 존경과 신뢰를 배신으로 갚았기 때문이다.


이에 거창히 민족주의자의 이름까지 필요하지도 않으나, 민족의 이름으로 말살이 자행된 만큼 민족 개념을 떼어놓고 말하기 어렵다. 동시에 비단 "민족"에 국한되지 않는 폭력이기도 했다. 악한 자가 약한 자를 수탈했다. 약한 자가 더 약한 자를 사지에 밀어넣었고, 알량한 권세를 틀어쥔 자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타인의 목숨을 갈아넣은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나라를 잃었던 시간이라는 것은, 절망이 비단 추상에 그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일상의 형태를 띄고 삶의 모든 기반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가정맹어호, 가혹한 정치가, 나라와 권세의 이름으로 가해진 모든 폭력이 핍박과 폐허의 수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었다.

p.93 이제 영락없이 사내 잡아먹은 계집이 되었구나. 그래서 나는 괴물인가. 이선은 다시 생각했다. 그런데 일제는 (...). 온 세상을 가짜 신의 나라로 만들려고 넓디넓은 중국 땅에도 폭탄을 퍼붓는다. 젊은 처자들을 감언이설로 꾀어 군인들의 노리개로 던져 준다. 이런 일도 버젓이 일어나는 세상에서 어쨌거나 사람인 자를 먹은 자신은 괴물인가.

p.215 "원장님.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하는 자를 도라고 합디다. 남을 못살게 굴다가 목숨까지 빼앗는 자는 적이라고 하고요. 원장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음해하고 부당한 시국에 눈을 감는 것으로 남의 것을 취하셨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이 죽었으니 양자에 다 해당하십니다."


어쩌면, 부패와 혹정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괴물이 판치는 세상에서 내가 왜 괴물이냐고 되묻는 이가 있었다. 절망을 열정으로 바꾸는 것은, 끝이라고 여겨지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내는 이는 언제나 있었다. 부끄러움을 잊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절망(絕望)은 끊어지지 않는 한 여전히 망, 바람이다. 끊어지지 않은 바람은 절망(切望), 간절히 바라는 것이 되어 뜨겁게 끓어오른다.

이 책은 그 기록인 동시에 잊혀진 시간을 파고드는 가능성이요, 상상이다. 수많은 '어쩌면'의 이름으로 닿기를 바란다. 어쩌면 이번에는, 어쩌면 이렇게는 아닌, 어쩌면 누군가는. 그렇게 무너지고 지워지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고, 지금의 우리는 그렇게 지켜낸 희망 위에 살고 있다고.

p.181 "어리석고 못난 것들이 권세를 잡았다고 어리석고 못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무식해지고 모자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놈들에게 무섭다. 무섭다해 주면 자기들이 진짜로 무섭고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콧대가 높아지다 더 큰 업보를 쌓는 노릇이니 (...) 더러운 놈에게는 더럽다고 해 줘야 옳은 말이지 않습니까."

p.225 "제가 저답지 못하고 제가 저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 동생들을 돌보지 아니하여 돌아가신 아버님 앞에 부끄럽고 낳아 주신 어머님 앞에 낯을 들 수 없다면 그것이 가장 무서운 노릇입니다."


*도서제공: 구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에게 없는 밤
위수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진다, 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아주 잠깐 가졌다가, 영영 되찾을 수 없는 것, 혹은 가졌는지도 모르게 흘려보내고 부재를 통해서 지난 존재를 실감하게 되는 것, 어쩌면, 가진 적조차 없었던 것, 그래서 더 갈망하고 입귀를 비틀며 오래도록 바라보게 만드는 것. 가진다는 말의 대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혹은, 가졌다는 말에도.

익숙한 따뜻함, 노년과 주변인에게서 대가 없는 관용으로 주어지기를 바라는 온화한 시선과 의례적인 추앙을 그리지 않는다. 노력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희망찬 내일을 그리지도 않는다. 대신, 넘을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것. 욕망과 고독, 치미는 말을 꾹 삼키는 시간을 내민다. 이것을 고스란히 떠안는 것이 당신의 몫이라고.

p.76 원희에게서 조금 떨어진 벤치 주위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남녀 무리가 보였다. 짧은 스커트에 어깨가 드러난 셔츠. 누군가 농담을 던졌는지 무리는 동시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못 견디게 아름다웠다. (...) 원희는 한동안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무지하기를 바랐다. 실수를 반복하고 좌절하기를. 그리고 후회하기를, 내가 그랬던 것처럼.

p.239 최근 들어 나는 악몽을 많이 꾸었다. 그러나 남편은 불안한 잠재의식의 발현일 뿐이라고 했다. 나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악몽에 대해 듣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특히 임부의 악몽에 대해서는 더더욱.


위수정의 세계에서 계급은 언제든 뛰어넘어 인간 대 인간의 교감을 가능케하는 허상의 경계가 아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소재가 돈, 경제적 "지위", 가난이다. 그가 그려내는 가난은 소박한 따뜻함, 인간미가 가미된 "진정성"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 오히려 그것은 소리로, 냄새로, 모멸과 안도와... 일상에 스며드는 감각으로.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것들의 형태로 인간을 압도한다. 냄새가 나고 등을 결리게 하는가. 동정과 경멸은 무섭도록 닮아있다. 열등감이 치부의 탈을 쓰고 극복되기를 요구할 때처럼. 그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깊은 금이 패인다. 무엇으로도 메워질 수 없다. "태생"이 그런 것처럼, "감촉부터 다르다"는 명품처럼.

p.99 규희네 집은 조용했다. 규희네 집에서 처음 자기로 한 날 밤, 한나는 고요한 밤이 무엇인지 처음 알았다. 아니, 소음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해야 할까. 한나네 집에서는 밤중에도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이 있구나. 고요한 것은 이렇게 편안한 거구나. 어둠 속에서 한나는 잠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고요를 좀더 오래 느끼고 싶었다.

p.196 집에 들어설 때마다 재순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그것을 자신이 오래 참지 못하리라는 것을 민희는 알았다. 불쌍한 앤데. 민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면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불쾌함을 누를 수 없었다. 뻔뻔하잖아. 미어캣을 닮았다고 생각한 얼굴은 더러운 생쥐처럼 보였다.


누군가에게 집은 돌아갈 곳이다. 반드시 떳떳하게 돌아가야 한다고 여겨지는 곳이고, '언젠가는' 돌아갈 거라고 확신처럼 딛고 서게 하는 곳이다.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집이 없다. 비단 House와 Home의 차이가 아니다. 사방이 곰팡이 슨 벽지와 정 대신 땀에 찐득하게 들러붙는 바닥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위수정이 그려내는 세계는 노골적으로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누군가는 이 '불편'을 '불쾌'로 경험할 테다. 작가는 그가 불러낸 이름들, 제각기 안팎을 갖는 인물들의 세계와 내면으로 독자를 불러들인다. 그 초대는 일면 포획과 흡착의 형태를 띄고 있어 독자는 익숙한 불쾌감 내지는 표백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p.261 사람들은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대로는 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갈 수 있는 곳이 이제는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부분은 자신의 전 재산과 가까운 이들의 돈까지 이곳에 묻었기에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 머물렀다. 어떻게든 다시 되돌리고 싶어서.

p.326 한참 가만히 가라앉으면 거기에 비로소 나의 집이 있다. 물고기와 해초와 바위들 사이에 있는 나의 집. 거기에는 김치찌개도 상한 우유도 없다. 곰팡이도 부모도 없다. 냄새도 날씨도 없이 나는 집에서 조곤조곤 대화를 나눌 것이다. 나와 같은 말을 쓰는 당신과 함께. 집이란 그런 곳이니까.


이 모든 것이 그저 고통과 좌절, 현상 기술에 그쳤다면 열 편의 수록작을 애써 읽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고통이 무력에 그치도록 몰아가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 자신 외의 독자에 닿을 힘을 갖지 못하는 까닭이다. 글로 그려내는 세계에는 반드시 결론이 있는 까닭이다. 무력의 자리를 채우는 것은 욕망이다. 앞서 말했듯, 소리와 냄새와 형태를 갖고 덮쳐오는 고통의 감각이다.

본능과 그를 휘감는 격차의 인식. 독자가 발 디딜 곳에 '고여있는' 것. 담담하게 쓰여진 문장이 드러내는 핵심이 바로 이것이라 믿는다. 모든 독자에게, 부디 생생하게 고통스럽기를, 모르는 말처럼 먼 사랑을 속삭이기를, 살아있는 이의 눈을 오래도록 응시하기를. 그곳에 있음을 알기를,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감각하기를, 깨닫기를.

p.144 지수는 은선을 보았다.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와 까칠한 피부, 터진 입술. 그리고 항상 입고 있는 티셔츠. 그래도 은선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지수에게 말할 때 은선의 눈빛은 거의 언제나 확신에 차 있었다. 지수는 그런 눈빛을 보는 게 좋았다.

p.159 지수는 베스의 따뜻한 등에 얼굴을 대어보았다. 베스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느끼며 한참을 어둠 속에 있었다. 야옹, 야옹. 지수는 고양이 소리를 흉내 내었다. 그러나 베스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곧 다시 눈을 감았다. 지수는 베스의 커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모르는 단어 같았다.


*도서제공: 문학과지성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