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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열정의 시대 - 일제강점기 장르 단편선
곽재식 외 지음 / 구픽 / 2024년 8월
평점 :
내년이 광복 80주년이란다. 벌써, 라고 하기엔 나와 그 이후 세대에는 일제강점기를 교과서 내지는 옛날 얘기로나 알고 자랐다. 그런 이유로 "나라 없는 슬픔"을 이해하기엔 너무 먼, 말 그대로 '언젠가'의 이야기로만 이해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반대는 어떠한가. 이제 겨우, 라고 할만한, 채 100여년도 되지 않은 이 떄에,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혹시나 해서 검색한 "광복 80주년"의 연관 기사로 내년 국제관함식에 "욱일기 형상" 깃발을 단 일본 함정이 참가한다는 내용이 뜨는 세상이다.
뭐가 그리 무서워서, 해방을 맞고도, 압제에서 벗어났다면서 뭐가 그렇게 눈치 보이는지, '전범기'도, 딱 잘라 "욱일기"라고 쓰지도 못하고 구차하게 말꼬리를 늘이는지. 누군가는 목숨을 버려가며, 또다른 누군가는 이를 악물고 숨죽여 전해온 말과 글과 이름이 다시금 홀랑 팔아넘겨질 세상이 아닌가.
나라를 빼앗긴, 주권 없는 나라의 사람 아닌 사람의, 망국의 시간이 꼭 35년이었다. 경술국치에 태어난 아이가 자라 머리가 굳은 어른으로 자라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동시에 기약 없는 희망을 갖기에는 너무도 긴 시간이다. 더구나 이 날부터 이 때까지, 딱부러지게 정해둔 것도 아닌, 끊임없이 쇠락하는 땅에서 태어난 자라온 이가 '다른 내일'을 기대하기에는 너무도 막막한 시간이 아니었나.
수많은 사람이 조금도 가질 수 없는 존엄에, 보이지 않는 내일에, 나날이 더해가는 치욕과 굴욕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 절망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되찾은 이름이, 사람으로의 지위가 다른 무엇도 아닌 빛이었기에, 그것이 바로 이태껏 광복이라 부르는 이유다.
혹자는 당시 조선인의 무지와 태만을 탓한다. 약육강식, 팽창하던 제국주의의 시대에 힘의 논리에서 밀린 약소국의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숱하게 보았다. 당장 그 누구도 나라 잃은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매국노가 여전히 파렴치한의 대명사로 쓰이는 것은, 매국이 전쟁까지 겪은 나라에서 여전히 용서받지 못할 죄로 여겨지는 것은, 단순히 대의 앞에서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말 그대로 팔아넘겼기에, 저 혼자 살겠다고 다른 이들을 짐승처럼, 물건처럼 내버려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도 자기만은 편하게 살겠다고 탐욕을 부렸기 때문이다. 존경과 신뢰를 배신으로 갚았기 때문이다.
이에 거창히 민족주의자의 이름까지 필요하지도 않으나, 민족의 이름으로 말살이 자행된 만큼 민족 개념을 떼어놓고 말하기 어렵다. 동시에 비단 "민족"에 국한되지 않는 폭력이기도 했다. 악한 자가 약한 자를 수탈했다. 약한 자가 더 약한 자를 사지에 밀어넣었고, 알량한 권세를 틀어쥔 자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타인의 목숨을 갈아넣은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나라를 잃었던 시간이라는 것은, 절망이 비단 추상에 그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일상의 형태를 띄고 삶의 모든 기반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가정맹어호, 가혹한 정치가, 나라와 권세의 이름으로 가해진 모든 폭력이 핍박과 폐허의 수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었다.
p.93 이제 영락없이 사내 잡아먹은 계집이 되었구나. 그래서 나는 괴물인가. 이선은 다시 생각했다. 그런데 일제는 (...). 온 세상을 가짜 신의 나라로 만들려고 넓디넓은 중국 땅에도 폭탄을 퍼붓는다. 젊은 처자들을 감언이설로 꾀어 군인들의 노리개로 던져 준다. 이런 일도 버젓이 일어나는 세상에서 어쨌거나 사람인 자를 먹은 자신은 괴물인가.
p.215 "원장님.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하는 자를 도라고 합디다. 남을 못살게 굴다가 목숨까지 빼앗는 자는 적이라고 하고요. 원장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음해하고 부당한 시국에 눈을 감는 것으로 남의 것을 취하셨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이 죽었으니 양자에 다 해당하십니다."
어쩌면, 부패와 혹정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괴물이 판치는 세상에서 내가 왜 괴물이냐고 되묻는 이가 있었다. 절망을 열정으로 바꾸는 것은, 끝이라고 여겨지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내는 이는 언제나 있었다. 부끄러움을 잊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절망(絕望)은 끊어지지 않는 한 여전히 망, 바람이다. 끊어지지 않은 바람은 절망(切望), 간절히 바라는 것이 되어 뜨겁게 끓어오른다.
이 책은 그 기록인 동시에 잊혀진 시간을 파고드는 가능성이요, 상상이다. 수많은 '어쩌면'의 이름으로 닿기를 바란다. 어쩌면 이번에는, 어쩌면 이렇게는 아닌, 어쩌면 누군가는. 그렇게 무너지고 지워지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고, 지금의 우리는 그렇게 지켜낸 희망 위에 살고 있다고.
p.181 "어리석고 못난 것들이 권세를 잡았다고 어리석고 못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무식해지고 모자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놈들에게 무섭다. 무섭다해 주면 자기들이 진짜로 무섭고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콧대가 높아지다 더 큰 업보를 쌓는 노릇이니 (...) 더러운 놈에게는 더럽다고 해 줘야 옳은 말이지 않습니까."
p.225 "제가 저답지 못하고 제가 저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 동생들을 돌보지 아니하여 돌아가신 아버님 앞에 부끄럽고 낳아 주신 어머님 앞에 낯을 들 수 없다면 그것이 가장 무서운 노릇입니다."
*도서제공: 구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