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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없는 밤
위수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7월
평점 :
가진다, 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아주 잠깐 가졌다가, 영영 되찾을 수 없는 것, 혹은 가졌는지도 모르게 흘려보내고 부재를 통해서 지난 존재를 실감하게 되는 것, 어쩌면, 가진 적조차 없었던 것, 그래서 더 갈망하고 입귀를 비틀며 오래도록 바라보게 만드는 것. 가진다는 말의 대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혹은, 가졌다는 말에도.
익숙한 따뜻함, 노년과 주변인에게서 대가 없는 관용으로 주어지기를 바라는 온화한 시선과 의례적인 추앙을 그리지 않는다. 노력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희망찬 내일을 그리지도 않는다. 대신, 넘을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것. 욕망과 고독, 치미는 말을 꾹 삼키는 시간을 내민다. 이것을 고스란히 떠안는 것이 당신의 몫이라고.
p.76 원희에게서 조금 떨어진 벤치 주위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남녀 무리가 보였다. 짧은 스커트에 어깨가 드러난 셔츠. 누군가 농담을 던졌는지 무리는 동시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못 견디게 아름다웠다. (...) 원희는 한동안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무지하기를 바랐다. 실수를 반복하고 좌절하기를. 그리고 후회하기를, 내가 그랬던 것처럼.
p.239 최근 들어 나는 악몽을 많이 꾸었다. 그러나 남편은 불안한 잠재의식의 발현일 뿐이라고 했다. 나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악몽에 대해 듣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특히 임부의 악몽에 대해서는 더더욱.
위수정의 세계에서 계급은 언제든 뛰어넘어 인간 대 인간의 교감을 가능케하는 허상의 경계가 아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소재가 돈, 경제적 "지위", 가난이다. 그가 그려내는 가난은 소박한 따뜻함, 인간미가 가미된 "진정성"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 오히려 그것은 소리로, 냄새로, 모멸과 안도와... 일상에 스며드는 감각으로.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것들의 형태로 인간을 압도한다. 냄새가 나고 등을 결리게 하는가. 동정과 경멸은 무섭도록 닮아있다. 열등감이 치부의 탈을 쓰고 극복되기를 요구할 때처럼. 그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깊은 금이 패인다. 무엇으로도 메워질 수 없다. "태생"이 그런 것처럼, "감촉부터 다르다"는 명품처럼.
p.99 규희네 집은 조용했다. 규희네 집에서 처음 자기로 한 날 밤, 한나는 고요한 밤이 무엇인지 처음 알았다. 아니, 소음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해야 할까. 한나네 집에서는 밤중에도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이 있구나. 고요한 것은 이렇게 편안한 거구나. 어둠 속에서 한나는 잠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고요를 좀더 오래 느끼고 싶었다.
p.196 집에 들어설 때마다 재순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그것을 자신이 오래 참지 못하리라는 것을 민희는 알았다. 불쌍한 앤데. 민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면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불쾌함을 누를 수 없었다. 뻔뻔하잖아. 미어캣을 닮았다고 생각한 얼굴은 더러운 생쥐처럼 보였다.
누군가에게 집은 돌아갈 곳이다. 반드시 떳떳하게 돌아가야 한다고 여겨지는 곳이고, '언젠가는' 돌아갈 거라고 확신처럼 딛고 서게 하는 곳이다.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집이 없다. 비단 House와 Home의 차이가 아니다. 사방이 곰팡이 슨 벽지와 정 대신 땀에 찐득하게 들러붙는 바닥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위수정이 그려내는 세계는 노골적으로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누군가는 이 '불편'을 '불쾌'로 경험할 테다. 작가는 그가 불러낸 이름들, 제각기 안팎을 갖는 인물들의 세계와 내면으로 독자를 불러들인다. 그 초대는 일면 포획과 흡착의 형태를 띄고 있어 독자는 익숙한 불쾌감 내지는 표백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p.261 사람들은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대로는 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갈 수 있는 곳이 이제는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부분은 자신의 전 재산과 가까운 이들의 돈까지 이곳에 묻었기에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 머물렀다. 어떻게든 다시 되돌리고 싶어서.
p.326 한참 가만히 가라앉으면 거기에 비로소 나의 집이 있다. 물고기와 해초와 바위들 사이에 있는 나의 집. 거기에는 김치찌개도 상한 우유도 없다. 곰팡이도 부모도 없다. 냄새도 날씨도 없이 나는 집에서 조곤조곤 대화를 나눌 것이다. 나와 같은 말을 쓰는 당신과 함께. 집이란 그런 곳이니까.
이 모든 것이 그저 고통과 좌절, 현상 기술에 그쳤다면 열 편의 수록작을 애써 읽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고통이 무력에 그치도록 몰아가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 자신 외의 독자에 닿을 힘을 갖지 못하는 까닭이다. 글로 그려내는 세계에는 반드시 결론이 있는 까닭이다. 무력의 자리를 채우는 것은 욕망이다. 앞서 말했듯, 소리와 냄새와 형태를 갖고 덮쳐오는 고통의 감각이다.
본능과 그를 휘감는 격차의 인식. 독자가 발 디딜 곳에 '고여있는' 것. 담담하게 쓰여진 문장이 드러내는 핵심이 바로 이것이라 믿는다. 모든 독자에게, 부디 생생하게 고통스럽기를, 모르는 말처럼 먼 사랑을 속삭이기를, 살아있는 이의 눈을 오래도록 응시하기를. 그곳에 있음을 알기를,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감각하기를, 깨닫기를.
p.144 지수는 은선을 보았다.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와 까칠한 피부, 터진 입술. 그리고 항상 입고 있는 티셔츠. 그래도 은선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지수에게 말할 때 은선의 눈빛은 거의 언제나 확신에 차 있었다. 지수는 그런 눈빛을 보는 게 좋았다.
p.159 지수는 베스의 따뜻한 등에 얼굴을 대어보았다. 베스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느끼며 한참을 어둠 속에 있었다. 야옹, 야옹. 지수는 고양이 소리를 흉내 내었다. 그러나 베스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곧 다시 눈을 감았다. 지수는 베스의 커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모르는 단어 같았다.
*도서제공: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