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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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966년, 뉴욕의 한 사진전에서 안정적이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아한 중년 여성 케이티는 생각지도 못한 얼굴을 맞닥뜨린다. 젊음의 초상이자 기억 속의 사랑을. 사진 속의 얼굴은 더없이 초라하고 지쳐있었으나, 동시에 숨길 수 없는 어떤, 불꽃같은 빛을 지니고 있었다. 여전히, 그때와 같이.

약간 비껴나간 폐허에서 재건된 사회, 상실과 파괴의 냄새를 풍기는 거대한 부, 안정된 일상이라는 허상. 개중에서도 가장 우스운 것은 그 모든 기억을 안고도 여전히 잘만 굴러가는 사회. 우리는 '그 일'이 아니었다면 여전했을까. 어쩌면,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고, 초라하고, 경이로운지. 그때와 같이.

p.10 1950년대에 미국은 세상을 거꾸로 들고 탈탈 털어서 주머니에 든 동전까지 챙겼다. 유럽은 가난한 친척 같은 존재가 되었다. 가문의 문장만 남았을 뿐, 식탁을 제대로 차릴 수는 없는 존재.

p.18 그런데도 내 생각은 나도 모르게 과거로 향했다. 힘들게 쌓아올린 지금의 완벽한 모습에 등을 돌린 채, 나는 달콤했지만 불확실하던 과거를, 그때의 우연한 만남들을 찾아 헤맸다. 그때는 정말 우연하고 열띤 만남 같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마치 운명 같다는 느낌이 그 위에 내려앉았다.


가히 한 세기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여파 혹은 특수가 적당히 일상의 더께로 자리잡은 시기, 구시대의 무게를 벗은 젊은이들의 비격식이 새로운 유행으로 다가오던 때, 재즈와 낭만이 폭풍처럼 사교계를 휘감던 바로 그 시대, 1930년대, 미국. 이야기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꿈과 낭만, 새로운 인생은 고사하고 당장 하루 살기도 바빠 죽을 지경인 케이트와 이브에게 완벽한 신사의 표본과도 같은 팅커 그레이와의 만남은 충동이자 열정이었고,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어딘지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는, 그러나 점잖고 세련되기 짝이 없는 그와의 시간에,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p.63 "저 젊은이는 누구야? 자네 친구인가, 아니면 친구의 친구인가? (...) 그런 건 오래 못 가, 날씬이." "그건 아저씨 말이죠." "아니, 해도, 달도, 별도 하는 말이야."

p.114 흡혈귀는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고들 한다. 어쩌면 이브는 사고로 인해 흡혈귀와는 반대의 속성을 지닌 유령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 이브는 거울에 비친 모습 외에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고 이후, '그'는 달라졌다. 아니, 여전한가. 적어도 셋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간다. 새로운 삶에 적응하려 애쓰는 사이, 더는 함께할 수 없는 갈림길에서 서로의 길을 응원하며, 그리고... 생애 최고의 충동에 몸을 던지며. 불타오르는 사랑, 서로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미래는 산산이 부서졌다.

우리는 더이상 '우리'가 아니게 되었다. 어째서,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당신은 대체 누구지. 망가진 관계, 폐허의 자리, 그제서야 보인다. 손에 쥐고 태어난 것만 같았던 세련된 태도와 겸양인 줄 알았던 미소는 억눌린 마음의 반증이었다는 것을. 숨길 수 없이 반짝이던 눈 깊은 곳에 타오르던 불꽃이 무엇이었는지를.

p.303 "사진이란 참 웃기는 거야, 그렇지? 사진이라는 매체 전체가 순간을 기반으로 하고 있거든. 몇 초 만이라도 셔터를 열린 채로 그냥 두면, 사진이 시커멓게 나오지. 우리는 자신의 삶이 연달아 이어지는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자신이 성취한 것들이 계속 쌓이고, 스타일과 의견들이 물 흐르듯이 이어진다고 말이야. 하지만 사진은 16분의 1초 동안 엄청난 파괴를 저지를 수 있어."

p.441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콩 껍질을 벗기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야. 하지만 1천 명에 한 명쯤은 놀라움을 담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지. 크라이슬러 빌딩을 보고 빙충맞게 입을 쩍 벌리는 걸 말하는 게 아냐. 잠자리 날개나 구두닦이의 사연 같은 것에 감탄하는 걸 말하는 거야. 순수한 마음으로 순수한 시간을 걸어가는 것."


끝내주게 짜릿하고 눈물나게 씁쓸하다. 이것이 바로 어른의 맛. 일견 전형적인 로맨스 플룻으로 보이는 이 이야기는 허무와 폐허의 시대, 어딘가를 살아낸 언젠가의 평범한 이들에게 보내는 찬사로 가득하다. 서서히, 잔잔하게 닳아지고 희미해질지언정 여전히 끝나지 않은 자리에서 서서, 그렇게 세월의 무게 너머로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무모한 젊음, 덧없는 열정,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꿈, 그리고 하루하루의 소박한 일상. 어두운 시대, 마지막 순수와도 같았던 그 때, 그 곳의, 그 사람들. And all that Jazz.

p.475 처음 만나서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뒤,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유대가 워낙 특별해서 시간과 관습의 한계를 초월한다고 정말로 확신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 누군가는 그 뒤로 이어질 나의 시간을 완벽하게 만들어줄 능력 못지않게 온통 뒤엎어버릴 능력 또한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p.519 나는 팅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오랜 세월을 흘려보낸 나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 내 입술에는 그의 이름이 걸려 있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수많은 날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도서제공: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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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몸으로
김초엽 외 지음, 김이삭 옮김 / 래빗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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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강물에는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인간 신체의 세포는 주기적으로 교체된다. 길어야 10여 년 정도면 이전의 것이 전부 대체된다. 존재하는 것은 흘러가고 변한다. 지금 이 순간에조차. 그렇다면, 끊임없이 변하는 이 우주, 이 세계에서 무엇이 이 강이 어제와 같은 것임을, 맞잡은 손이 여전한 그 사람임을 증명하는가?

기이하리만치 과거에 매이지 않는, 아니, 과거와의 연결이 희미하다못해 부유하는 나의 연인, 어느날 전세계에 그와 같은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말과 기억이 와해된다. 어제와 오늘, 지금과 미래는 조금도 연결점을 갖지 못한다. 보지 않는 것, 닿지 않은 것은 말끔히 지워져버린다. 사람과 사람, 존재의 연속을 증명하는 모든 것이 힘을 잃었다.

p.87 나는 언어가 한 사람의 가장 짙고도 깊은 바탕색이라고 믿었다. 과거의 모든 흔적을 대뇌에서 지워낼 방법이 없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모어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샤오광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부드러운 시폰 같았다. (...) 반면 관광객이라는 걸 모두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나는 항상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그녀가 현지 말투로 내게 말을 걸 때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낯섦과 불쾌함을 느꼈다.


사람 뿐만 아니다. 언어가, 그로 매개된 사회가, 우주 전체가 변하고 있다. 빨리감기처럼, 마치, 우주라는 거대한 뇌가 시냅스를 재구축하는 것처럼. 제멋대로 분해되고 재연결되는 시공간에서 기존의 관념은은 더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어떻게든 해야, 아니, 너를,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네가 없는 세계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나의 우주는 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지. 어떻게 해야 내가 너의 세계에 여전히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오래된 의문이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음을, 너의 존재는 유일무이하며 영원하다고 믿고 싶은 인간의 마음만큼이나. 어떻게 우리가 여전히 우리일 수 있을까. 오늘의 사랑은 어떻게 어제의 기억을 담아낼 수 있는가. 흔들리지 않는 토대, 교집합, 연속선, 이를테면, 진리에 가까운 무언가가 없다면. 공통분모가 깨끗이 지워진, 재편성된 세계에서 여전히 너의 안에 내가 있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p.90 모어는 인간 개개인에게 흔들리지 않는 존재였다. 어린 시절에 습득한 언어적 습관이 종종 평생을 가기도 했으니까, 물론 삶에서 마주하는 것들이 미묘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 그런데 언어의 진화 속도가 달라진다면? 1,000배나 빨라 진다면? 외국에 간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자기 모어를 잃게 된다면?

p.112 "별의 위치가 바뀌었어." 그녀가 잇새로 말을 짜내듯 뱉었다. (...) "넌 언어가 변화하면 그걸 알아채지 못해?"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두 눈이 붉어져 있었다. 별이 바뀌었어, 혼란스러워졌다고. 언어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처럼 말이야!"


유한한 존재는 영원을 갈구한다. 흔들리고 위태로운 것은 불변하는 진리에 매달리고자 한다. 인간, 말로 매개되는 동물, 걷기도 전에 언어를 흡수하는, 연약하고 무력한 짐승이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은 뇌리 깊은 곳에 심어지는 뿌리와도 같다. 그것을 잊는다면, 너무도 쉽게 새로운 뿌리가 심겨지고 또 사라진다면, 우리는 그 자신의 존재를, '그 언어'로 매개된 관계를 어떻게 증명해낼 수 있을까.

또다시 오래된 물음. 아무도 없는 숲의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누구도 듣지 못했다면, 그 숲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은 것과 같을까? 누구에게도 인식되지 않는,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은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을까? 경험한 적 없는 속도로 재편성되는 우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기억. 네가 없어도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의 우주는 네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어.

p.118 모어를 잃는 건 괜찮았다. 모든 걸 잊어도 괜찮았다. 심지어 나 자신을 잊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그녀만큼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샤오광을 잊는다면 내 마음의 구멍은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언니, 언니는 충분히 강한 사람이에요."


쓰러지는 나무를 막을 수는 없다. 흩어진 소리를 주워담을 방법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서로가 서로를 증명하는 일, 손을 내밀고, 기꺼이 품으로 뛰어드는 일. 이 세상은 여전히 예측할 수 없고 끊임없이 변화하겠지만 너의 존재는, 너로 인한 나의 세계는 그렇지 않음을 믿는 일. 서로가 서로의 곁이 되는 것. 네가 나를 증명해. 내가 너의 존재를 증명해.

'그 일'이 있든 없든, 세계는 여전할 것이다. 상관 없다. 두렵고, 이해 가능한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말 그대로 천지가 뒤바뀌는 우주라고 해도. 네가 나의 세계이듯, 나또한 너라는 작은 우주의 일부일테니. 내 곁에 네가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이 믿음에 붙일 이름을 아직 찾지 못했다. 상관없다. 텅 빈 숲, 쓰러진 나무에게 또다른 나무가 그러했듯이.

p.119 그 건물이 어쩌다가 창문 밖에 나타나게 된 건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기이한 일이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다. (...) 내가 두 팔을 뻗기도 전에 그녀가 폴짝 뛰었다. 샤오광은 내게 날아들었고, 우리 둘은 카펫 위로 넘어졌다.

p.120 샤오광이 내게 말했다. 나를 잊을 수가 없었다고. 이건 내 환각일까? 아니면 우주가 과거의 기억을 포기한 샤오광처럼 신경세포를 재조직하고 있는 걸까? 만물을 깨뜨렸다가 다시 연결하는? 뭐든 상관없었다. 샤오광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우주에 적응할 것이다. 우주 자신도 앞을 향해 나아갈 거고.


*도서제공: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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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새 언덕의 마법사
오키타 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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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도 마법도 평범한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한 어느 세상,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 빼고는 뭐든지 가능한 마녀와 마법사. 그들은 평범한 이들과 섞이는 듯, 그러나 한 곳에 머무는 법이 없이 떠돌며 살아간다. 어느 날인가부터 소문이 들려온다. 종달새 마을에는 마녀가 살고 있다. 마음 속 가장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마녀가.

언덕 중턱에 위치한 작은 마법상점에 가면, 찾아온 이가 누구든, 얼마나 큰 대가를 내밀든, 그것이 마녀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무엇이든 이루어준다고 한다. 무엇이든. 누구든. 그곳을 찾는 이들은 제각기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기적같은 힘을,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그 소원을, 마법으로 해결해주기를.

p.155 마법은 어떤 기적이든 행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마법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한 번 더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 마법으로 그 구멍을 메울 수만 있다면, 하루코는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다. 앞으로도 소설가로 살아갈 수 있다.

p.216 유카를 잃고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도키오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 년 사이에 요시히코의 상처가 아문 것 같지 않았다. 형이 슬퍼하지 않는 이유는 그 감정을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요시히코는 마음에 새겨진 깊은 상처가 필사적으로 호소하는 아픔을 무시할 뿐이다.


전능한 힘에 비해 그들은 좀처럼 마법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종달새 언덕의 마녀'만 해도 어느 나라의 대통령인지도 그렇게 애원했다는데 눈도 깜빡하지 않고 단칼에 거절했단다. 또 누군가는 그저 재밌겠다는 이유만으로 흔쾌히 마법을 부렸다는데...

이야기는 그 작은 마을에 마녀가 찾아오고도 한참이 지난 어느 날로 시작된다. 간절한 소원을 들어준대. 그렇다면, 나도, 어쩌면... 저마다 미련과 슬픔, 외로움, 자괴감과 상실을 끌어안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과연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

p.116 "언젠가 쿠로와 만나면 부디 친구가 되어주렴. 왠지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어쩌면 이미 친구일지도 모르겠구나." (...) 친구가 되어달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그 아이와 실컷 놀아달라고. 뛰어다니기를 좋아하는 활발 한 아이니까 공원에서 뛰놀고, 나비를 쫓아다니고, 놀다 지치면 햇살 드는 곳에서 같이 낮잠을 자달라고.

p.169 무얼 쓴다고 한들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다. 가치 없는 소설을 만들어내는 자신도 아무 가치 없다. 언제나 머릿속에 있던 이야기들이 무너져내리고 사라져갔다. 공백이 되어버린 자리에 새로운 이야기는 태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설가이길 원했다. 하루코에게는 소설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발버둥질하다가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지만, 자신이 더는 소설가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인정할 수 없었다.


마녀가 감각하는 시간에 비하면 평범한 인간의 그것은 찰나와도 같다. 그들의 힘에 비하면 인간은 그저 무력하고 아둔한, 하루하루와 눈앞의 일에 벅차 허덕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런 인간을, 마녀는 지켜본다. 그리고 말한다. 정말 그렇게 되길 원하느냐고. 네 진정한 소원은 그게 아닐 거라고. 마치, 인간이 인간인 채로, 유한하고 무력한 그 자체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것처럼.

작가가 굳이 사람 바깥의 세계를 끌어온 이유는, 오랜 시간 수많은 이들이 이처럼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존재를 그려온 이유는 어쩌면 바로 이것일지 모른다. 나약하고 무력한, 찰나의 존재인 탓에, 수많은 그리움과 좌절과, 목숨만큼 소중한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그 마음을 잊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왔기 때문에.

p.67 메이, 사실 넌 지금도 흉터 따위 전혀 상관없지 않아?" 메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이가 고개를 끄덕이듯 눈을 깜빡였다. "네가 정말로 없애고 싶은 건 흉터가 아니라 유토 마음속에 있는 짐일 거야."

p.121 쿠로는 미노루와의 나날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어째서 옆에 있어주는 것일까. "언어는 확실히 중요하지. 하지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인 건 아니야."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스이가 말했다. 미노루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러니 마법은 그저 찰나의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 등 뒤에, 긴 시간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홀로 남겨진 사람이 때때로 눈물짓고 어떤 날엔 무너지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짧은 생의 유한한 기회 속에서도 내일이, 누군가가 있음을 잊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은 결국 현실이다. 마음이다. 긴 이야기의 끝에 남겨진 이에게, '그' 또한 그러했듯이.

오늘도, 작은 마을의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상점, 그곳의 문을 열면 긴 머리를 한 아름다운 '마녀'가 언제와도 같은 목소리로 맞이한다. 안녕, 나는 스이. 무슨 일로 왔어? 그러면 당신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겠지. 당신이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바로 '그 마녀'인가요. 나는, 내 소원은...

p.78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많은 걸 잃어. 그중에는 더없이 소중한 것도 있지. 막을 수 없는 이별도 있어. 그러니 부디 소중히 대해줘. 잃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해."

p.255 떠나버린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옆에 있어줄 수도 없다. 그런데도 이제는 없는 사람에게 집착하니 마음에 계속 생채기가 나는 것이다. 그러니 산 사람이 어떻게든 해줘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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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할미 - 짧게 읽고 오래 남는 모두의 명화수업
할미 지음 / 더퀘스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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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오랜만에 미술관을 찾았다. 만난 적 없는 작가의 그림은 역시나 평면으로 고요했고, 주말답지 않게 썰렁한 곳엔 대단히 유명한 적 없는 작가의 세계 그까짓 것 알 게 뭔지, 시큰둥한 얼굴로 서성이거나 나도 그리겠다고 속삭이는 사람이 태반인 가운데 신나게 길 헤매다 이른 더위에 넋이 나간 사람 하나만 멍하니 오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인데, 몰라 나도, 낙서같다, 그치... 속삭임이 빠져나간 조명 아래 마지막 사람이 물었다. 물론 정물처럼 자리한 안내원에 챙길 체면은 있었으니 그저 생각이 그랬다는 뜻이다. 이걸 보고 우는 사람이 있을까. 매끄러운 평면과 모호한 이미지에 마음을 빼앗겨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까.

p.56 고흐가 편지에 적었듯, 사이프러스 나무는 여태 한 번도 그림에 제대로 등장한 적 없을 정도로 아무도 그 미적 가치를 특별히 알아주지 않던 존재였어. 하지만 사실은 놀라운 아름다움을 그 안에 가지고 있었지. 살아생전 세상으로부터 끝없이 외면받던 화가 고흐는 어쩌면 사이프러스 나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게 아닐까?

p.93 "예술은 당신이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보게 만드느냐의 문제요." 단순히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몸짓을 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관객들이 그 너머에 있는 그늘진 진실을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던 거야.


언젠가 보았던 그림이 있다. 유명하대서, 도 아니고 별 생각 없이 갔는데 마침 전시 중이길래. 그 뒤로 전시기간이 끝날 때까지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그것 하나 이해해보자고, 아니, 그저 잊히질 않아서. 뭔진 몰라도 마음을 그 그림 앞에 두고 온 것 같아서. 마크 로스코의 유작이었다.

'그림은 말을 한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던 그 날, 미술 과목 시험 내용이나 달달 외우던 내게 처음으로 취향 비슷한 게 생겼다. 그렇게 지금까지, 유난히 문턱 높은 분야인 탓에 뭐가 좋다싫다 말하기 어려워 홀로 좋아하는 그림이 몇 있다. 너무 감성적인가, 싶은 멋쩍음을 더해.

p.78 이중섭은 가족을 다시 만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든 그림을 한 장이라도 더 팔려고 뛰어다녔어. (...) 이 은종이 그림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한 가지 특징은 거의 항상 '아이들'이 등장했다는 거야. 그 당시 가족을 향한 그의 그리움이 얼마나 절절했는지가 배어나오고 있지.

p.117 바렌초프는 가난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경제적으로 변변치 않았대. 그래서 소피아라는 여자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지만 그녀의 부모가 둘의 결혼을 절대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하지. (...) 의연한 척 소피아의 결혼을 축하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녀의 결혼식에서 주례까지 맡게 되었다고 하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주례를 서야 하는 상황이라니, 정말 참담한 심정이었을 거야.


기실 이는 나만의 수줍음이 아닐 테다. 낯설어서, 대체 뭐가 다른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다들 좋다는데 화면만 봐서는 와, 그렇구나, 말고는 할 말이 없어서. 난감하고 어려운 '감상의 요령'이 미술관을 재미없는 곳으로 못박는 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터놓고 말해, 뭐든 직접 가서 보고 듣는 걸 선호하는데다 안 그래도 영상매체와는 거리가 먼 성질머리라 연주 영상도 아니고 그림 이야기라니, 저자 소개가 없었더라면 뭔데 노인 행세인가 가자미눈을 뜨고도 남았을 터다.

p.233 할스는 그림을 그릴 때면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을 유심히 들여다 보곤 했어.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에 빠져들어 짓는 표정이나, 술꾼들이 헤실거리며 웃는 모습, 장난스런 아이의 얼굴 같은 것 말이야. 그는 억지로 근엄한 포즈를 취한 귀족들의 모습보다 이런 자연스러운 표정들 속에 진짜 삶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거든.

p.265 누군가는 인생을 정리할 나이라고 하는 76세에 그림을 시작해 평생 1,5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 모지스 할머니. 지금도 그녀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단다.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기엔 결코 늦은 나이란 없다는 걸 자신의 인생으로 멋지게 증명해냈으니 말이야.


그렇게 불순한 마음으로 읽다보니 결국 좋아하는 것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다 같구나, 싶더라. 너무 좋아서,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었다고, 당신에게도 그 찬란하고 다정하고 고마운 순간이 깃들길 바란다고, 혹은, 이 비참과 설움을 알아달라고, 그렇게 말하는 마음은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할머니'라는 말에 괜시리 눈물이 핑 돌고 기대고픈 마음이 드는 모든 이들에게 미술이 어렵지 않았으면, 화가가 내보이는 세계에 오롯이 몸과 마음을 맡기는 일이 자연스러워지면 좋겠다. 그렇게 위로가 되면 좋겠다. 시공과 캔버스를 넘어 어느 순간의 화가에게 그림이 그랬듯이, 그림 너머의 이야기까지 알아주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그러했듯이.

p.82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에 그린 〈피 묻은 소〉와 〈덤벼드는 소〉를 보면, 소가 광기에 서려 피를 흘리고 있거나 이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축 처진 모습이야. 생전 그토록 그리워하던 가족을 두 번 다시 품에 안지 못한 그는 병든 몸으로 붓을 들었고 그 마음은 고스란히 그림 속 소에게로 옮겨졌지.

p.139 독일 장교 한 명이 피카소의 작업실을 찾아와 게르니카 그림을 한참 유심히 보더니 물었대. "이 그림을 당신이 그렸소?" 그러자 피카소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지. "아니, 이 그림은 당신들이 그린 것이오." 전쟁을 일으키고 무수한 생명을 죽인 건 바로 너희들이라는 걸, 그래서 이 끔찍한 그림의 진짜 작가는 너희라는 걸, 피카소는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꼬집었던 거야.


*도서제공: 더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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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집사 백 년 고양이 2 래빗홀 YA
추정경 지음 / 래빗홀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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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집사의 탄생을 향한 운명의 톱니바퀴는 멈추지 않았다. 어떤 고양이는 목숨을 빼앗기고, 어떤 자는 욕망으로 타오르고 있으며, 어떤 집사는 한 치 앞을 모르는 채 여전히 한 발씩 나아가고 있다. 휘말린 이상 빠져나갈 방도는 없다. 작가는 주인공들과 독자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일까?

이번 권에서는 한층 커진 스케일로, 고대 신성과 신화가 더해졌다. 지난 이야기에서 흩뿌려진 조각들은 서서히 형체를 갖춰간다. 거듭하는 생이 그러하듯이, 커다란 슬픔이 이해되는 과정이 그러하듯이. 그만큼 위협도 거세졌다. 제각기 상처받은 두 사람과 고양이들을 위협하는 음습한 힘이 시시각각 조여오는 것이 느껴진다. 과연 그들은 고양이 결사단에 힘입어 무사히 '천 년 집사'가 될 수 있을까?

p.34 "나 자네 좀 휘감아 올라감세." 칡은 자기가 감고 올라갈 울타리에게 그리 정겨운 부탁의 말을 전했다. 인간에게 징글징글한 칡이 자연에서는 어찌 공생하며 질긴 목숨을 이어 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함께 공존하는 것, 또한 존재를 부탁하는 것

p.103 사람들은 그런 치기를 전문 용어로 '한때'라고 불렀다. 그들 역시 한때가 있었고 '한때' 자기 일에 열의를 불태우던 시절이 있 었다. 그러나 부족한 시스템의 구멍을 사람의 노동력으로 끼워 맞추는 데 버틸 장사는 없었기에 늘 젊은 한때가 오고 그 한때를 다한 이들은 떠났다.


차가운 도시의 생을 건너 얽힌 연이 인과에 박차를 가한다. 남을 해치고 짓밟는 자가 있는가 하면, 온몸으로 누군가를 살리려는 자가 있다. 그러니 어째서, 이 고통을, 다 알면서, 라고 묻는다면. 미움은 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지 않기란 어려우니까. 어렸던 너의 차마 외면하지 못했던 괴로움이 작고 어린 생명에게 온기로 가닿은 순간을 기억하니까. 그러니까, 너를 도울거야. 보은과 복수는 고양이의 율법이니까.

여전히 무거운 이야기 속 도처에 가득한 생명은 경이롭고, 생생하다. 자기를 넘어서는, 타자를 향해 뻗어나가고 기꺼이 내어주기를 택하는 마음을 용기가 아니면 무어라 부를까. 점점 빠르게, 선명하게 나아가는 이야기는 독자를 어디로 이끌게 될까. 다음 여정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돌아본다. 사납고 낯선 도시를 살아가는 고양이들의 존재를.

p.192 "차 한잔 나누지 못하고 긴 세월을 사는 건 저주가 될 걸세. 앉아 차를 마신다는 것은 서로의 시간을 함께한다는 것이고, 마음의 식사를 뜻하지. (...) 평생 마음의 식사를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축복이겠는가, 저주겠는가?"

p.291 분홍이란 이름으로 그의 고양이가 되고 집사로 이어진 순간, 밀적은 그렇게나 엿듣고 싶었던 연꽃의 비밀을 알게 된 듯했다. 생이란, 결국 사는 동안 숱한 시간을 함께하는 것. 그 시간이 찬란하든 비루하든. 그리하여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 채 오직 그 기억만을 선물로 안고 떠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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