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평점 :
좋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너무'를 너무 많이 붙이고도 모자라겠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을 만나면, 기쁨보다는 낭패감이 차오른다. 분명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만 같다는 생각에, 삶의 어느 순간에 불쑥 차올라 잠겨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에. 홍보문구며 추천사에 눈길 줄 새도 없이 빠져드는 경험은 행운일까, 벅차도록 즐거운 재앙일까.
평범 그 자체인 장의 일상은 한 문장과 함께 송두리째 뒤엎어진다. "트렁크에 넣어뒀습니다". 범인도 동기도 알 수 없는 납치사건. 수없이 떠올리고 둘었으나 여전히 불가해한 그 날을 기점으로 그의 세계는 불운의 클라인보틀처럼 비현실에 맞닿아버렸는지 모른다. 그는 여전히 몰랐다. 아니, 모르고자 했다. 이 불행이 더 큰 불행의 전초전에 불과했음을.
p.11 아무도 장의 불행을 덜어 가려고 하지 않았다. 장은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게 전부 내 것이라고? 이렇게나 크고 많은 것이? 이 정도 불행이면 모두가 함께 나눠야 공평하지 않은가? 비록 내가 누군가의 불행을 나눠 가진 적이 없더라도 말이야. 그의 불행은 온전히 그의 것이기만 했다. 자꾸만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지? 그런 질문조차 사소해지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p.143 어쩌면 세계가 불행해진 건 아닐까? 장은 자신의 불행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썼다. 타인의 불행을 달래기 위해 은행 창구로 왔던 그 사람의 얼굴이 먼지가 잔뜩 낀 유리창처럼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다른 나라의 낯설었던 그 이름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의 이전에 말뚝이 있었다. 기원도 정체도 알 수 없이, 한때는 사람이었다고만 알려진 그것은 바다 한가운데에 나타나 무리지어 존재할 뿐이었다. 어느날 이름도 정체도 알 수 없는 그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엇인가? 죽었으되 채 죽지 못한 것, 덜 죽은 것, 완전히 죽음에 이르지 못한 것들.
장은 묻는다. 나의 불행이 세계의 불행과 연결된 것은 아닐까. 불행한 자들의 불행한 세계에 다가오는 말뚝의 도래는 차라리 범람에 가깝다. 그 앞에 선 사람은 이유도 모르는 채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다. 영문도 모르는 채, 속절없이. 그냥 두면 사람이 아니지. 온갖 의미를 쥐어짜낸다.
p.159 그때 누군가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장의 옆에 있는 사람도 훌쩍였다. 흥 하고 코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장도 코가 매워졌다. 눈이 간질거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장의 눈에도 이유를 모르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훔쳐낼 틈도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울고 있기는 유리문 밖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저기요. 너무 이상해서 그런데 지금 왜 울어요?" 옆 사람이 울면서 장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눈물이 나요."
p.191 죽은 사람도 여전히 사람인가? 살아 움직이지 않더라도? 어쨌든 그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로 돌아온다는 건 분명했다.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혹자는 종말을, 권력의 영속을, 누군가는 단 한 번도 패배당한 적 없는, 아쉬움도 구김도 없는 얼굴을 들이미는 와중에도, 장은 알고 있다. 이것은 죽음이다. 얼굴 없는 자, 잊혀진 이름의 죽음이다. 이는 누군가 말했듯이, '도처에 널린 죽음'이다. 그들은 묻는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최진영, 『원도』)". '물음에 처해진 자'는 물음을 이어갈 의무에 놓인다. 이 죽음은 어째서 고요한가.
죽음에는 애도가 필요하다. 어떤 죽음도 아무렇지 않아서는 안 된다. 없던 것처럼 갈아치워져도 좋을 이름은 없다. 마땅한 애도가 허락되지 않으므로 완결되지 못한 죽음. 그러므로 말뚝이 도래한 사회는 제대로 죽지 못한 이들로 가득하다. 웅크린 울음은 무리지어 피할 길 없는 반향으로 들이닥친다. 빛나는 것, 묵묵히 놓인 것, 바로 언젠가의 그 때까지만 해도 살아있었을 사람.
p.171 장은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눈물이 났다.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누구세요. 어떻게 죽으셨어요. 입은 열리지 않았다. (...) 꼬깃꼬깃 접은 종이를 장에게 건네던 손이 떠올랐다. 이름.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떠오르지 않았다. 부르튼 손등과 짧게 닳아 있던 손톱만 생생했다.
p.208 "안 되는 게 어딨어요. 그냥 하지 마요." 차 대리의 어조는 단호하면서도 이유가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질 것 같았다. 수거자가 차 대리에게 반문했다. "그럼 뭐 해요?" "마스크 벗고 같이 울어요."
그러니 감은 눈을,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미완의 죽음을 목도한 이가 가장 먼저 처해지는 의무는 애도이다. 눈물 흘리는 일이다. 치워버리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제대로, 마땅히 슬퍼하는 일이다. 모르는 이의 죽음에 나의 책임이 있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작중 '그'에게의 내용증명은 부채의 고백에 다름아니다.
초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들며 쉴새없이 질주하는 이야기의 끝에서, 돌이킬 수는 없어도 되풀이하지는 않을 수 있음을 믿는다. 이미 지나간 일이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될 때, 애도와 언어는 고발과 증언의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누구도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삶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지는 빚으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믿는다. 제발, 제발. 타자의 안위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믿는다. 우리 연약한 짐승이 이 잔인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은 오직 "빚을 빛으로 기억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뿐이었음을 믿는다. "바다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내 앞으로" 도래한 말뚝들의 세계에서.
p.265 장은 이제까지 삶에 대해 너무 큰 거짓말을 해왔다는 걸 이쯤에서 인정하고 싶었다. 희망 같은 건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지금은 기적을 믿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다는 명백한 느낌을 믿었다. (...) 두려움은 희미해졌다. 그러니 제발.
*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