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엑시트 - 불평등의 미래, 케이지에서 빠져나오기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불평등의 케이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 '불평등의 케이지'란 무엇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사회다. 그것도 지금 당장의. 한국사회의 불평등은 이미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그 양상은 익히 알려져 있으며, 견해에 따라 그 원인과 기원만 모아도 역사가 될 지경이다.

그러나, 돌아가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 나아가 현대-도시화된 세계 대부분의 사회에 불평등이 문제의 시발점이자 문제 자체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시 범위를 좁혀, 한국 사회의 세대, 계층, 집단 간 불평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어떻게 생존을 도모하고, 점점 해체되고 분열되어가는 사회의 미래는 과연 어디로 향하는가?

p.15 탈출을 꿈꿔보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어 이렇게 살고 있다고? 탈출을 시도해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언젠가는 탈출을 감행할 것이라고? (...) 어떻게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나도 모른다). 대신, 왜 우리가 탈출을 꿈꾸는지, 왜 꿈꾸면서 이 체제에 그대로 머무는지, 이 모순과 불일치의 원인과 결과는 무엇인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p.23 이 책은 ‘탈출’을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그 탈출을 좌절시키는 기제, 즉 ‘충성’과 ‘순응’을 야기하는 기제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탈출의 옵션이 중요한 만큼, 탈출을 좌절시키는 옵션 또한 중요하다. 이 옵션의 작동 방식을 이해해야만, 탈출이 왜 가능하고 불가능한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이른바 "성공 신화"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가? 실력과 업적에 합당한 보상이 있는가? 격차는 능력과 노력으로 메워질 수 있는가? 상향이동이 불가한, 자본-계급이 생득적 권력의 지위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또다른 "기회의 땅"을 향해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이 절망과 좌절에서 탈출할 가능성을 소거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이 사회에 가두는가? 저자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지난 연구에 이어 이 '소셜 케이지'의 기원과 현재를 벼농사 체제에서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 문화에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통해 분석한다.

p.80 위로 올라가는 통로가 닫히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꼭 자리가 아니어도, 소득이나 자산이 늘어날 여지가 봉쇄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 이동성이 저하된 사회에서 경기가 나빠지고 불평등이 증대되면, 중하층 계급은 대안적인 정치 세력을 지지하거나 스스로를 조직화하여 혁명을 꿈꿀 수도 있다. 하지만 후자의 옵션(혁명)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선진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p.115 개인의 입장에서 엑시트 옵션이 적은 사회와 많은 사회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사회인가? 엑시트 옵션이 많은 사회가 개인이 살아가기에 더 좋은 사회다. 그 사회는 인간의 정주 욕구와 이주 욕구 중, 후자를 극대화하는 사회다. 물론 정주 욕구를 극대화하는 사회와 조직도 계속 생존할 것이다. 인간은 안정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철밥통이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애석하게도, 책머리에서 밝히듯이, 이 책은 "생존기술"에 대한 지침서가 아니다. "나라도 살아남아보자" 식의 로드맵도 아니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어떤 실용적인 지침이나 성공으로의 열쇠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느껴질만큼 냉정하고 현실적인 길을 모색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어떤 이상으로의 투쟁과도 거리가 멀다.

혹자는 이에 절망할 것이다. 어쩌면 분노할 수도 있겠다. 일면 동의한다. 누군가에겐 공허한 이상이 당장의 생계에 맞닿아있는 탓에 역설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내던지고 온몸으로 나선 이들이 있다. 학문이 현실과 유리되는 현장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현장 바깥으로 나와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이 글은 저자가 그 점을 잘 알고 본업에 충실하려 했다는 가정 하의 감상이다.

p.23 소셜 케이지 혹은 소셜 케이징은 '탈출을 좌절시키는 기제'다. 한 인간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나 집단, 조직을 탈출하고자 할 때, 이를 좌절시키거나 단념시키는 '심리적-제도적-환경적 장벽'이 소셜 케이지다. 다시 말해서 소셜 케이지는 내가 현재의 사회적 관계와 구조를 이탈하지 않고 이 자리에 머물도록 만드는 생태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인센티브 메커니즘과 제도의 총체다.

p.117 결국 한국의 상층 노동시장은 좀 거칠게 이야기하면 노동조합, 연공제, 학별로 버텨온 시스템이다. (...) 전작에서 이 제도들의 뼈대 역할을 하는 연공제가 벼농사 체제의 유산이라고 주장했다. 벼농사 체제에서 만들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벼농사 체제의 연공/위계 문화와 강력한 친화성(선택적 친화성)이 있는 임금체계라는 뜻이다.


한국 사회의 현재에서 탈출을 어렵게 하는 소셜 케이지는 학벌주의, 제한된 노동시장, 연공제가 복합적으로 뒤엉킨 합작품 내지는 오래된 유산의 역기능적 현현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실패가 곧 재기불가능한 추락으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노동자는 어떻게 자본권력에 맞서 자유도를 높일 수 있을까. 노동자가 또다른 노동자, 즉, 외부사회로부터 유입된 "노동력"과 약자 간의 출혈경쟁을 반복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모든 것을 지금까지의 패러다임, 케이징을 벗어나 사고하는 일은 과연 요원하기만 할까, 그 점이 궁금할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모방한 AI와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노동의 가치는 임금으로 저당잡히며, 인생의 한 지점이 삶 전체를 지배하는 세계는 단순히 "취업시장"만의 문제가 아닌 현재에서. 채 답하지 못한 질문으로 3부작의 끝을 맺는다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결국 많은 일이 그러하듯, 남은 것은 미래의 일이다. 독자는 물어야 한다. 당신은 어떻게 살 작정인가?

p.299 MAGA를 외치며 중하층 백인을 결집하는 트럼프의 정치도 이러한 문화주의 우파를 자양분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이민 이슈는 좌파정당뿐만 아니라, 우파정당 내부에도 균열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균열은 미국과 유럽에서 국제주의와 세계화를 추진해온 전통 우파가 사그라들고, 신 극우파가 출현하여 우파정당을 장악하게 된 구조적 배경이기도 하다.


*도서제공: 문학과지성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 기존의 호혜, 증여, 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불확실성의 인류학
오가와 사야카 지음, 지비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지 못하는 이를 신뢰할 수 있는가? 낯선 타인과 동석해 하루를 나눌 수 있는가? 누구도 진심으로 신뢰하지 않는 동시에 타인의 일면과 순간을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가? 비정형적이고 강제되지 않는 집단 내의 호혜를 기대하고 또 그 연쇄에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가? 호의가 배반으로 돌아올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는 성립 가능한 것인가?

이 모든 질문에 망설임 없는 긍정은 고사하고, 그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조차 허황된 꿈, 어리석은 이상론으로 치부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사회에 살고 있다. 아니, 그렇지 않은 실현을 경험한 적조차 없다. 불가지 혹은 이해-전은 곧 불신으로 직결되고, 정보우위가 곧 생명인 세계에서 타인은 언제나 암묵적인 경쟁대상이므로, 제거와 압도를 목표해야만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 과연 그러한가?

p.6 이들은 누구도 믿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열린 커먼즈를 구축한다. (...) 뼛속까지 장사꾼인 이들이 타자를 돕는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너를 도우면 '누군가'가 나를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도운 당사자에게 보답을 기대하는 대신, 누군가를 돕는 행위를 더 넓은 세계로 이전함으로써 세계 자체를, 커먼즈로 만드는 셈이다.

p.92 카라마와 동료들은 (...) '지금'의 상황에 한정하는 형대로만 타자를 평가한다. 언뜻 냉정하게도 보이지만 이는 일종의 관용과도 표리일체다. 즉, '페르소나'와 그 뒷면에는 '민낯'이 있는데 '민낯'을 모르니까 신뢰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일관된 불변의 자기 같은 건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유일한 진리가 아니다. 그저 믿어진 규칙, 그렇다고 선언되기 때문에 믿어지는, 이외의 가능성을 완전히 소거했다고 믿기 때문에 유일한 것처럼 여겨지는 일종의 방향 혹은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공고하게 구축된 불신과 경계의 토대에서 호의의 순환경제는 요원하거나 공허할 뿐이다. 그러나 '헐렁한 이상론'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곳이 있다.

비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 상인의 도시. 돈과 물건과 사람이 쏟아지듯 밀려오고 스쳐지나가는 곳, 홍콩, 그 중에서도 가히 "국제적인 비공식 경제의 거점"으로 알려진 청킹맨션. 천차만별의 인간군상이 득실거리는 곳, 짝퉁과 내일을 장담하지 않는 이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곳에 바로 그 가능성이 있다. 그를 향한 여정의 안내를 맡은 것은 역시나 도통 못 미더운 동시에 모두에게 신뢰받는 자칭 타칭 '보스' 카리마다.

p.157 TRUST가 공식 중고 거래/경매 사이트와 다른 발상으로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TRUST가 '신용할 수 있는 브로커/고객'과 '신용할 수 없는 브로커/고객'을 점차 가려내는 플랫폼이 아니라는 점이다. TRUST에는 변함없이 누구나 신용할 수 있고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세계·인간관이 유지되고 있고, 거래 실적이나 자본 규모, 과거의 실패나 배신과도 관계 없이 누구에게나 기회가 돌아간다.

p.173 비즈니스에 관한 이기적인 관심과 타자에 대한 이타적인 행동을 분간하기 어렵게 맺어져 있는 구조가 구축되면, 누군가가 내게 베푼 친절에 직접 갚아주지 못하더라도 이게 그 사람의 기회로 이어질 수 있으며 (...) 즉, 여기에도 '부담'을 애매하게 만들며 자발적인 도움을 촉진함으로써 '분명 누군가가 도와준다'라는, 국경을 초월한 거대한 안전망을 형성하는 장치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홍콩과 아프리카를 잇는 가품과 모조, 도박과 도전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공식 경제에 참여하는 이들과 생활을 공유하며 그들의 독특한 호수관계에 주목한다. 모두가 입을 모아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낯선 이에게 의탁하고, 호의를 베풀며, 그것이 배반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각자를 하나로 묶는 것은 그때그때 달라지는 처지와 불안정한 연결 뿐이다.

서로의 전체와 근원을 파악할 수 없는 유동적 관계에서 이 완벽한 불신과 절대적 신뢰의 기묘한 공존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담보 없는 신뢰, 잠재적 폭력을 예비하지 않는 우호적 관계 구축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숱하게 증명된 호의와 선의의 순환이 전지구적, 전사회적으로 확대되어야 할 필요는 무엇이란 말인가?

p.249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다. 돈을 버는 건 좋은 일이다, 우리는 어떤 기회도 자신의 이익으로 바꿀 수 있다, 라고 누구나가 공언하기 때문에 가볍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 자본주의경제에 대항하는 지점으로 증여경제 또는 분배의 구조를 구상하는 게 아니라, 증여경제나 분배경제가 잠재적으로 내포한 부정적인 측면이 자본주의경제에 의해 활용될 수 있는 힌트가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p.282 돈벌이라는 목적은 이들을 순식간에 연결하는 동시에 연결을 적절히 끊는 것도 가능하게 한다. (...) 동료를 만들고 증여를 순환시키기 위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벌이를 동료나 증여를 순환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돈벌이야말로 사회를 만드는 놀이라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전반적 금융, 상업 시스템은 불신에 기반한다. 각자도생을 전제하고 대가를 선지불하지 않으면 신뢰도 없다. 시작이 없으니 성취도 없다. 조력이 없으니 회복도 없다. 저자는 청킹맨션의 사례가 정답이라 말하지 않는다. 호수 시스템 유지와 구축에 '낭비되는' 유무형적 자원에 대한 비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특수성'을 보편신념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담보가 신뢰에 앞서는 사회에서 순간의 실패가 회복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은 곧 누구도 안전할 수 없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담보를 갈구하는 길로 이어지기 떄문일지 모르기에. 느슨한 연대, 무관심의 관용, 그렇게 펼쳐질 가능성의 세계.

p.259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안심', '안전'을 부르짖으며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준다는 확약 없이는 줄 수 없는' 사회적 관습을 강화하고 '빌려준 것'과 '빌린 것'을 즉시 청산하려는 태도를 낳는다. (...) 매 순간 빌려준 것과 빌린 것을 셈해서 딱 맞아 떨어지는지 신경 쓰인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면 선순환의 상호성은 손쉽게 악순환의 상호성으로 전환한다.

p.292 이들이 효율성과 편의성을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우위에 두거나 신뢰의 등급화를 목표로 삼는 것과는 다른 회로로 실현하고 있음을 밝혔다. 이에 대한 방법론으로 민족지를 통해 세련된 사회경제 시스템의 이론과는 다른 인간 사회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우리가 반드시 '위험한 타자'나 '이질적인 타자'를 배제하지 않아도 공유할 수 있음을 사고하는 한 걸음이 된다면 기쁠 것이다.


*도서제공: 갈라파고스

#청킹맨션의보스는알고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녀서 거장의 클래식 5
천쉐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 미친 여자가 있다. 그 이름은 언제, 어떻게 붙여졌을까. 가엾게도 여자를 밝힌 탓에, 아니, 밝혀진 여자이기 때문에, 아니, 여자가 밝은 탓에, 별다른 도리가 없이? 다시 생각해보자. 미친 여자가 있다. 날 때부터 미쳐있었는지, 어느날 갑자기 360도에 18도쯤 더 돌아버린 건지, 나름 숨 쉬고 살 붙이며 잘 살고 있는데 느닷없이 미친 여자로 "지정된" 탓에 그렇게 된 건지 알 도는 없지만, 마치 "저것은 해로운 새"처럼.

어느 작가가 있다. 너무도 음란하므로 '18세 이하 열독 금지'라는 가림막 너머로 보내진다. 숱한 이가 묻는다. 왜 이런 글을 썼는지. "비정상"을 굳이 드러내서 얻는 게 대체 뭔지. 아, 그러니까, "그게 싫다"는 건 아니고 이해는 하지만 "굳이 드러내는 건 싫다 "뭐 그런 뜻이지. 또다른 숱한 이가 물었다.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는지. 작가는 말한다. 나한테도 없는 걸 어떻게 달란 말씀이신지. 수많은 복간 요청 끝에 30여년의 세월을 지나 금서가 돌아왔다.

p.26 "나는 글을 써.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나는 줄곧 내 몸 안에 닫힌 자아가 하나 숨겨져 있다고 생각해 왔다. 어떤 힘이 그걸 닫히게 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건 도대 체 어떤 모습일까? 알 수 없었다. 내가 희미하게 느낀 것은 겹겹이 봉쇄된 무거운 상태와 불안한 소란, 그리고 내 왜곡되고 변형된 꿈 속에, 내가 아주 허약할 때의 잠꼬대 속에, 깊은 밤 억제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드러나는 그 외롭지만 뭔가를 갈망하는 자신이었다.

p.49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웃을 때는 몹시 방자하고 오만하면서도 우렁찼다. 우리가 길을 걸을 때면 모든 남자가 그녀에게로 눈길을 던졌지만 그녀의 눈은 나만 주시하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반복적으로 훑고 있었다. 눈빛으로 내 옷을 한 겹 한 겹 다 벗겨버리려는 것 같았다. 그녀의 그런 눈빛에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심하게 뛰어 손발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네 편의 이야기, 어쩌면 회고 혹은 어떤 밤의 기억에는 하나같이 글 쓰는 작가, 또는 그의 이름에서 갈라져나간 또다른 천쉐가 등장한다. 그는 사랑한다. 욕정한다. 파괴하고, 방황하며, 글을 쓴다. 마치, 어느 세계에서든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는 듯이. 어떤 환상과 환각의 가능성에서도 '쓰지 않는 자신'이 존재할 리가 없다는 듯이.

탐하고, 전율하고, 찢어발기고 무너지는 몸, 더없이 질척하고 뜨거운 소리, 그리고, 글, 쓰는 사람, 쓰여진 것. 이 작가에게 그것은, 그 가능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p.27 "차오차오, 꼭 완성해. 그리고 내게 살아갈 기회를 줘." 아쑤는 펜을 내 손에 쥐여주면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나를 안고는 가볍게 책상 앞 의자에 앉혀주었다. "자신의 천재성을 두려워하지 마. 이게 네 운명이니까." 나는 악마의 가면을 쓴 천사를 보았다. 비틀비틀 더러운 진흙탕 위에서 몸을 일으켜 한 칸 한 칸 문자의 긴 사다리를 향해 파리하게 마른 두 팔을 뻗었다. 그렇게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다...

p.63 "내게는 이야기가 없어" 그렇게 지리멸렬하고 더없이 황당무계한 잠꼬대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타오타오. 지나친 호기심은 고양이 한 마리를 죽일 수 있지.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과다하게 긴장했던 상황은 결국 지나가고 그저 전율과 공포... 혐오만 남아. "나는 듣게 될 거야, 네가 반드시 말해줄 테니까"


그의 세계에서 욕정하는 여자, 여성의 정욕은 결코 사랑스럽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독한 폭력으로 덧칠된다. 잘못 자란 풀, 있어서는 안 될 것처럼, 네 편의 이야기, 그 이상의 환상 혹은 기억에서 그들은 언제나 숨어든다. 달아오른 숨을 나누고 사랑을 속삭이지만 마주치는 시선 바깥,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들이 함께 존재할 자리는 없다.

작가는 끊임없이 묻는 듯하다. 어떻게 욕망하지 않을 수가 있지, 생각만 해도 뺨이 달아오르고 다리를 꼬게 하는데. 어떻게 사랑이 아닐 수 있지, 입 맞추고 가슴께로 글어당겨 젖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 그의 글과 사랑, 욕정(혹은 정욕)은 모성애와 닮아있다. 아니, 모호한 경계로 뒤얽혀있는지도 모른다.

p.75 "나는 이 세상이 싫어." (...) 그때 나는 그 애가 내 몸 깊숙이 죽음의 뿌리와 싹을 심어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싹은 내가 직접 물을 주고 키워야 했다. 내가 만신창이가 되어 부서지고 쇠잔하면 그 싹이 다시 나를 산 채로 집어삼킬 것이었다. 나는, 구차하게 살고 있다. 그 애가 버린 세상, 그 애가 떠나버린 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p.190 그녀는 여자라 월경이 오는 것이 당연했다. 월경이 오면 나처럼 몸이 아팠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게 아주 창피한 일인가? 여자인 게 잘못이란 말인가? 왜 우리는 여자임을 인정하는 일이 그렇게 부끄러운 것일까? 서로를 사랑하는 두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왜 그리 부끄러운 일이란 말인가?


현실과 환상을 그늘처럼 오가는 이야기에 평온하고 달콤한 휴식, 서로의 내일에 당연히 얽어넣어지는 희망 따위는 없다. 도리어 죄악감과 불안의 냄새를 풍긴다. 마주친 눈동자에는 서로만 가득한데, 대낮같은 세계의 규범 아래서는 아무리 끌어안고 몸을 겹친대도 그것은 "없는 일"이다. 편견과 혐오가 아닌 이름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이는 절망의 흔한 기록인가. 그렇지 않다. 독자는 짓눌린 고백, 단절되지 않는 환희와 열락의 틈새에서 어떤 가능성을 본다. 언제나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그러므로, 결코,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 처음으로 돌아가 묻는다. 여기, 미친 여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무엇인가.

p.228 나 쉐가 네 눈앞에 있잖아. 확실히 존재하고 있잖아. 과거보다 더 강인하고 더 용감해져 있잖아. 나는 나 자신의 창작과 인생이 세상의 온갖 질의에 직면해 있다는 걸 잘 알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을까? 그럴 리 없어. 영혼을 잃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으니까. 더 이상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방향을 포기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p.237 우리가 『악녀서』에서 볼 수 있는 여성 동성애 감정들은 거의 전부가 의도적으로 사회적 맥락을 피하지만 사회적 간섭을 피하려 할수록 오히려 사회의 노예로서의 일면을 드러내고 만다. 천쉐의 작품에서 모든 여성 동성애의 정욕은 죄악의 느낌으로 가득하다. 사실 이러한 느낌이 호소하는 것은 배후에서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사회적 제약으로서 이야기의 주인공들과는 아무런 필연성을 갖지 못한다.


*도서제공: 글항아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966년, 뉴욕의 한 사진전에서 안정적이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아한 중년 여성 케이티는 생각지도 못한 얼굴을 맞닥뜨린다. 젊음의 초상이자 기억 속의 사랑을. 사진 속의 얼굴은 더없이 초라하고 지쳐있었으나, 동시에 숨길 수 없는 어떤, 불꽃같은 빛을 지니고 있었다. 여전히, 그때와 같이.

약간 비껴나간 폐허에서 재건된 사회, 상실과 파괴의 냄새를 풍기는 거대한 부, 안정된 일상이라는 허상. 개중에서도 가장 우스운 것은 그 모든 기억을 안고도 여전히 잘만 굴러가는 사회. 우리는 '그 일'이 아니었다면 여전했을까. 어쩌면,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고, 초라하고, 경이로운지. 그때와 같이.

p.10 1950년대에 미국은 세상을 거꾸로 들고 탈탈 털어서 주머니에 든 동전까지 챙겼다. 유럽은 가난한 친척 같은 존재가 되었다. 가문의 문장만 남았을 뿐, 식탁을 제대로 차릴 수는 없는 존재.

p.18 그런데도 내 생각은 나도 모르게 과거로 향했다. 힘들게 쌓아올린 지금의 완벽한 모습에 등을 돌린 채, 나는 달콤했지만 불확실하던 과거를, 그때의 우연한 만남들을 찾아 헤맸다. 그때는 정말 우연하고 열띤 만남 같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마치 운명 같다는 느낌이 그 위에 내려앉았다.


가히 한 세기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여파 혹은 특수가 적당히 일상의 더께로 자리잡은 시기, 구시대의 무게를 벗은 젊은이들의 비격식이 새로운 유행으로 다가오던 때, 재즈와 낭만이 폭풍처럼 사교계를 휘감던 바로 그 시대, 1930년대, 미국. 이야기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꿈과 낭만, 새로운 인생은 고사하고 당장 하루 살기도 바빠 죽을 지경인 케이트와 이브에게 완벽한 신사의 표본과도 같은 팅커 그레이와의 만남은 충동이자 열정이었고,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어딘지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는, 그러나 점잖고 세련되기 짝이 없는 그와의 시간에,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p.63 "저 젊은이는 누구야? 자네 친구인가, 아니면 친구의 친구인가? (...) 그런 건 오래 못 가, 날씬이." "그건 아저씨 말이죠." "아니, 해도, 달도, 별도 하는 말이야."

p.114 흡혈귀는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고들 한다. 어쩌면 이브는 사고로 인해 흡혈귀와는 반대의 속성을 지닌 유령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 이브는 거울에 비친 모습 외에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고 이후, '그'는 달라졌다. 아니, 여전한가. 적어도 셋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간다. 새로운 삶에 적응하려 애쓰는 사이, 더는 함께할 수 없는 갈림길에서 서로의 길을 응원하며, 그리고... 생애 최고의 충동에 몸을 던지며. 불타오르는 사랑, 서로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미래는 산산이 부서졌다.

우리는 더이상 '우리'가 아니게 되었다. 어째서,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당신은 대체 누구지. 망가진 관계, 폐허의 자리, 그제서야 보인다. 손에 쥐고 태어난 것만 같았던 세련된 태도와 겸양인 줄 알았던 미소는 억눌린 마음의 반증이었다는 것을. 숨길 수 없이 반짝이던 눈 깊은 곳에 타오르던 불꽃이 무엇이었는지를.

p.303 "사진이란 참 웃기는 거야, 그렇지? 사진이라는 매체 전체가 순간을 기반으로 하고 있거든. 몇 초 만이라도 셔터를 열린 채로 그냥 두면, 사진이 시커멓게 나오지. 우리는 자신의 삶이 연달아 이어지는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자신이 성취한 것들이 계속 쌓이고, 스타일과 의견들이 물 흐르듯이 이어진다고 말이야. 하지만 사진은 16분의 1초 동안 엄청난 파괴를 저지를 수 있어."

p.441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콩 껍질을 벗기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야. 하지만 1천 명에 한 명쯤은 놀라움을 담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지. 크라이슬러 빌딩을 보고 빙충맞게 입을 쩍 벌리는 걸 말하는 게 아냐. 잠자리 날개나 구두닦이의 사연 같은 것에 감탄하는 걸 말하는 거야. 순수한 마음으로 순수한 시간을 걸어가는 것."


끝내주게 짜릿하고 눈물나게 씁쓸하다. 이것이 바로 어른의 맛. 일견 전형적인 로맨스 플룻으로 보이는 이 이야기는 허무와 폐허의 시대, 어딘가를 살아낸 언젠가의 평범한 이들에게 보내는 찬사로 가득하다. 서서히, 잔잔하게 닳아지고 희미해질지언정 여전히 끝나지 않은 자리에서 서서, 그렇게 세월의 무게 너머로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무모한 젊음, 덧없는 열정,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꿈, 그리고 하루하루의 소박한 일상. 어두운 시대, 마지막 순수와도 같았던 그 때, 그 곳의, 그 사람들. And all that Jazz.

p.475 처음 만나서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뒤,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유대가 워낙 특별해서 시간과 관습의 한계를 초월한다고 정말로 확신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 누군가는 그 뒤로 이어질 나의 시간을 완벽하게 만들어줄 능력 못지않게 온통 뒤엎어버릴 능력 또한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p.519 나는 팅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오랜 세월을 흘려보낸 나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 내 입술에는 그의 이름이 걸려 있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수많은 날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도서제공: 현대문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몸으로
김초엽 외 지음, 김이삭 옮김 / 래빗홀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같은 강물에는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인간 신체의 세포는 주기적으로 교체된다. 길어야 10여 년 정도면 이전의 것이 전부 대체된다. 존재하는 것은 흘러가고 변한다. 지금 이 순간에조차. 그렇다면, 끊임없이 변하는 이 우주, 이 세계에서 무엇이 이 강이 어제와 같은 것임을, 맞잡은 손이 여전한 그 사람임을 증명하는가?

기이하리만치 과거에 매이지 않는, 아니, 과거와의 연결이 희미하다못해 부유하는 나의 연인, 어느날 전세계에 그와 같은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말과 기억이 와해된다. 어제와 오늘, 지금과 미래는 조금도 연결점을 갖지 못한다. 보지 않는 것, 닿지 않은 것은 말끔히 지워져버린다. 사람과 사람, 존재의 연속을 증명하는 모든 것이 힘을 잃었다.

p.87 나는 언어가 한 사람의 가장 짙고도 깊은 바탕색이라고 믿었다. 과거의 모든 흔적을 대뇌에서 지워낼 방법이 없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모어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샤오광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부드러운 시폰 같았다. (...) 반면 관광객이라는 걸 모두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나는 항상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그녀가 현지 말투로 내게 말을 걸 때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낯섦과 불쾌함을 느꼈다.


사람 뿐만 아니다. 언어가, 그로 매개된 사회가, 우주 전체가 변하고 있다. 빨리감기처럼, 마치, 우주라는 거대한 뇌가 시냅스를 재구축하는 것처럼. 제멋대로 분해되고 재연결되는 시공간에서 기존의 관념은은 더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어떻게든 해야, 아니, 너를,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네가 없는 세계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나의 우주는 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지. 어떻게 해야 내가 너의 세계에 여전히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오래된 의문이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음을, 너의 존재는 유일무이하며 영원하다고 믿고 싶은 인간의 마음만큼이나. 어떻게 우리가 여전히 우리일 수 있을까. 오늘의 사랑은 어떻게 어제의 기억을 담아낼 수 있는가. 흔들리지 않는 토대, 교집합, 연속선, 이를테면, 진리에 가까운 무언가가 없다면. 공통분모가 깨끗이 지워진, 재편성된 세계에서 여전히 너의 안에 내가 있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p.90 모어는 인간 개개인에게 흔들리지 않는 존재였다. 어린 시절에 습득한 언어적 습관이 종종 평생을 가기도 했으니까, 물론 삶에서 마주하는 것들이 미묘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 그런데 언어의 진화 속도가 달라진다면? 1,000배나 빨라 진다면? 외국에 간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자기 모어를 잃게 된다면?

p.112 "별의 위치가 바뀌었어." 그녀가 잇새로 말을 짜내듯 뱉었다. (...) "넌 언어가 변화하면 그걸 알아채지 못해?"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두 눈이 붉어져 있었다. 별이 바뀌었어, 혼란스러워졌다고. 언어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처럼 말이야!"


유한한 존재는 영원을 갈구한다. 흔들리고 위태로운 것은 불변하는 진리에 매달리고자 한다. 인간, 말로 매개되는 동물, 걷기도 전에 언어를 흡수하는, 연약하고 무력한 짐승이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은 뇌리 깊은 곳에 심어지는 뿌리와도 같다. 그것을 잊는다면, 너무도 쉽게 새로운 뿌리가 심겨지고 또 사라진다면, 우리는 그 자신의 존재를, '그 언어'로 매개된 관계를 어떻게 증명해낼 수 있을까.

또다시 오래된 물음. 아무도 없는 숲의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누구도 듣지 못했다면, 그 숲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은 것과 같을까? 누구에게도 인식되지 않는,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은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을까? 경험한 적 없는 속도로 재편성되는 우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기억. 네가 없어도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의 우주는 네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어.

p.118 모어를 잃는 건 괜찮았다. 모든 걸 잊어도 괜찮았다. 심지어 나 자신을 잊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그녀만큼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샤오광을 잊는다면 내 마음의 구멍은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언니, 언니는 충분히 강한 사람이에요."


쓰러지는 나무를 막을 수는 없다. 흩어진 소리를 주워담을 방법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서로가 서로를 증명하는 일, 손을 내밀고, 기꺼이 품으로 뛰어드는 일. 이 세상은 여전히 예측할 수 없고 끊임없이 변화하겠지만 너의 존재는, 너로 인한 나의 세계는 그렇지 않음을 믿는 일. 서로가 서로의 곁이 되는 것. 네가 나를 증명해. 내가 너의 존재를 증명해.

'그 일'이 있든 없든, 세계는 여전할 것이다. 상관 없다. 두렵고, 이해 가능한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말 그대로 천지가 뒤바뀌는 우주라고 해도. 네가 나의 세계이듯, 나또한 너라는 작은 우주의 일부일테니. 내 곁에 네가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이 믿음에 붙일 이름을 아직 찾지 못했다. 상관없다. 텅 빈 숲, 쓰러진 나무에게 또다른 나무가 그러했듯이.

p.119 그 건물이 어쩌다가 창문 밖에 나타나게 된 건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기이한 일이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다. (...) 내가 두 팔을 뻗기도 전에 그녀가 폴짝 뛰었다. 샤오광은 내게 날아들었고, 우리 둘은 카펫 위로 넘어졌다.

p.120 샤오광이 내게 말했다. 나를 잊을 수가 없었다고. 이건 내 환각일까? 아니면 우주가 과거의 기억을 포기한 샤오광처럼 신경세포를 재조직하고 있는 걸까? 만물을 깨뜨렸다가 다시 연결하는? 뭐든 상관없었다. 샤오광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우주에 적응할 것이다. 우주 자신도 앞을 향해 나아갈 거고.


*도서제공: 래빗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