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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평점 :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966년, 뉴욕의 한 사진전에서 안정적이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아한 중년 여성 케이티는 생각지도 못한 얼굴을 맞닥뜨린다. 젊음의 초상이자 기억 속의 사랑을. 사진 속의 얼굴은 더없이 초라하고 지쳐있었으나, 동시에 숨길 수 없는 어떤, 불꽃같은 빛을 지니고 있었다. 여전히, 그때와 같이.
약간 비껴나간 폐허에서 재건된 사회, 상실과 파괴의 냄새를 풍기는 거대한 부, 안정된 일상이라는 허상. 개중에서도 가장 우스운 것은 그 모든 기억을 안고도 여전히 잘만 굴러가는 사회. 우리는 '그 일'이 아니었다면 여전했을까. 어쩌면,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고, 초라하고, 경이로운지. 그때와 같이.
p.10 1950년대에 미국은 세상을 거꾸로 들고 탈탈 털어서 주머니에 든 동전까지 챙겼다. 유럽은 가난한 친척 같은 존재가 되었다. 가문의 문장만 남았을 뿐, 식탁을 제대로 차릴 수는 없는 존재.
p.18 그런데도 내 생각은 나도 모르게 과거로 향했다. 힘들게 쌓아올린 지금의 완벽한 모습에 등을 돌린 채, 나는 달콤했지만 불확실하던 과거를, 그때의 우연한 만남들을 찾아 헤맸다. 그때는 정말 우연하고 열띤 만남 같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마치 운명 같다는 느낌이 그 위에 내려앉았다.
가히 한 세기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여파 혹은 특수가 적당히 일상의 더께로 자리잡은 시기, 구시대의 무게를 벗은 젊은이들의 비격식이 새로운 유행으로 다가오던 때, 재즈와 낭만이 폭풍처럼 사교계를 휘감던 바로 그 시대, 1930년대, 미국. 이야기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꿈과 낭만, 새로운 인생은 고사하고 당장 하루 살기도 바빠 죽을 지경인 케이트와 이브에게 완벽한 신사의 표본과도 같은 팅커 그레이와의 만남은 충동이자 열정이었고,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어딘지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는, 그러나 점잖고 세련되기 짝이 없는 그와의 시간에,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p.63 "저 젊은이는 누구야? 자네 친구인가, 아니면 친구의 친구인가? (...) 그런 건 오래 못 가, 날씬이." "그건 아저씨 말이죠." "아니, 해도, 달도, 별도 하는 말이야."
p.114 흡혈귀는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고들 한다. 어쩌면 이브는 사고로 인해 흡혈귀와는 반대의 속성을 지닌 유령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 이브는 거울에 비친 모습 외에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고 이후, '그'는 달라졌다. 아니, 여전한가. 적어도 셋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간다. 새로운 삶에 적응하려 애쓰는 사이, 더는 함께할 수 없는 갈림길에서 서로의 길을 응원하며, 그리고... 생애 최고의 충동에 몸을 던지며. 불타오르는 사랑, 서로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미래는 산산이 부서졌다.
우리는 더이상 '우리'가 아니게 되었다. 어째서,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당신은 대체 누구지. 망가진 관계, 폐허의 자리, 그제서야 보인다. 손에 쥐고 태어난 것만 같았던 세련된 태도와 겸양인 줄 알았던 미소는 억눌린 마음의 반증이었다는 것을. 숨길 수 없이 반짝이던 눈 깊은 곳에 타오르던 불꽃이 무엇이었는지를.
p.303 "사진이란 참 웃기는 거야, 그렇지? 사진이라는 매체 전체가 순간을 기반으로 하고 있거든. 몇 초 만이라도 셔터를 열린 채로 그냥 두면, 사진이 시커멓게 나오지. 우리는 자신의 삶이 연달아 이어지는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자신이 성취한 것들이 계속 쌓이고, 스타일과 의견들이 물 흐르듯이 이어진다고 말이야. 하지만 사진은 16분의 1초 동안 엄청난 파괴를 저지를 수 있어."
p.441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콩 껍질을 벗기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야. 하지만 1천 명에 한 명쯤은 놀라움을 담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지. 크라이슬러 빌딩을 보고 빙충맞게 입을 쩍 벌리는 걸 말하는 게 아냐. 잠자리 날개나 구두닦이의 사연 같은 것에 감탄하는 걸 말하는 거야. 순수한 마음으로 순수한 시간을 걸어가는 것."
끝내주게 짜릿하고 눈물나게 씁쓸하다. 이것이 바로 어른의 맛. 일견 전형적인 로맨스 플룻으로 보이는 이 이야기는 허무와 폐허의 시대, 어딘가를 살아낸 언젠가의 평범한 이들에게 보내는 찬사로 가득하다. 서서히, 잔잔하게 닳아지고 희미해질지언정 여전히 끝나지 않은 자리에서 서서, 그렇게 세월의 무게 너머로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무모한 젊음, 덧없는 열정,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꿈, 그리고 하루하루의 소박한 일상. 어두운 시대, 마지막 순수와도 같았던 그 때, 그 곳의, 그 사람들. And all that Jazz.
p.475 처음 만나서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뒤,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유대가 워낙 특별해서 시간과 관습의 한계를 초월한다고 정말로 확신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 누군가는 그 뒤로 이어질 나의 시간을 완벽하게 만들어줄 능력 못지않게 온통 뒤엎어버릴 능력 또한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p.519 나는 팅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오랜 세월을 흘려보낸 나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 내 입술에는 그의 이름이 걸려 있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수많은 날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도서제공: 현대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