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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는 프랜시스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평점 :
글에도 물성이 있을까? 지면에 놓인 형태나 활자의 모양이 주는 느낌이 아니라, 문장 자체가 주는 소리와 냄새가 있다면 어떨까. 다시 한번 그 답을 마쓰이에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었다. 분명 글에 불과하나 몹시도 감각적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가본 적 없는 작은 마을의 계절을 이다지도 그리워할 수 있다니.
작은 마을에서의 길지만은 않은 시간, 그 짧은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온몸으로 감각하게 만드는 문장으로 가득하다. 부서지지 않고 쌓이는 눈, 파도처럼 일렁이는 밀밭, 따뜻하게 밀려들어오는 나무 냄새, 깨질 것처럼 쨍한 햇살... 그리고, 소리. 형체와 무게를 갖고 범람하는 소리들.
p.122 날이 얼음을 깎는 소리는 어디에도 반향하지 않고 그저 넓은 겨울 하늘에 빨려들어가 사라져버린다. 날의 메마른 소리와 자기 숨소리 외에는 모든 소리가 멀고 덧없었다. (...) 눈이 내린다. 올려다본 어슴푸레한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은 하얗지 않고 회색으로 보인다. 자신이 내뱉는 숨소리만이 들린다.
p.167 봄에서 여름으로의 전환은 장마가 없는 홋카이도에서는 커다란 벽걸이 달력을 오른손으로 단칼에 떼어내듯이 싱겁게 이루어진다. 변하는 것은 하늘의 푸르름의 농도와 벌레 울음소리, 그리고 햇살의 강렬함이다.
무요 게이코, 듣는 사람마다 되묻게하는 흔치 않은 이름의 그는 도쿄의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소문도 사정도 다 그만저만한 작은 마을, 안치아이의 우편배달인이 되었다. 희한한 이름의 낯선 여자. 얼추 자리를 잡아가는 그의 일상은 잔잔하다기보다는 잠잠하고, 숨소리처럼 고르게 흘러간다. 여느때와 같은 배달 중 가즈히코라는 파랑을 만나기 전까진.
음악이 아닌 음을 수집한다는 남자. 현실에 주저하는 게이코는 자신과 달리 숨김없는 욕망을 드러내는 그에 빠져들고,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그인 선은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약간의 비일상을 가미한 느릿하고 미지근한 열락. 결코 영원을 증거할 수 없는.
p.23 격류에 실려온 커다란 바위나 큰 나무줄기처럼, 거기에 멈춰서서 형태를 남기는 것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좀처럼 흘러오지 않는다. 그렇게 친숙하고 친했던, 못 알아볼 리도, 잊을 리도 없는 몸짓과 목소리와 냄새는 망망한 시간 앞에서 여지없이 패배한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이윽고 잊히고 사라진다
p.100 "이 부근은 옛날옛날 아주 옛날에는, 해가 뜨거나 지는 것을 볼 수 없고 바람도 빠져나갈 수 없는 원시림에 뒤덮여 있었지요. 무성한 나무 잎사귀에 가로막혀서 석양빛은 줄기나 가지 옆구리로 조각조각 들어올 수 있었을 뿐, 땅은 하루 종일 축축한 채, 정말 어두침침한 곳이었어요."
'한창때'를 지난 연애는 풋풋한 청춘의 그것처럼 뜨겁지도, 심장이 터질듯한 순간의 연속도 아니다. 경험으로 짐작하는 '다음'과 미묘한 거리감을 품은 그것은 영화 속 장면처럼 무모하고 화려한 맹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의 최후이자 최고의 사랑일 수 없다는 것을, 아니, 그런 건 어디에도 없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조금쯤 건조하고 씁쓸한 맛에 가깝다.
한 번 불거진 균열은 좀처럼 잠재워지지 못한다. 작은 마을에서 재빠르게 오가는 소문을 무시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얻어야 할 확신이 아니지.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뭘까. 여전히 이방인인 나는 다시 어딘가로 '돌아가야' 할까.
p.101 "형태가 있는 것은 언젠가 사라져버리지만, 사라진 것은 형태를 잃음으로써 언제까지고 남지요. 나한테 보이는 것은 그런 거예요. 많은 것이 흘러 여기까지 왔어요. (...) 여기는요, 그러니까 누구한테도 목적지가 아닌 셈입니다. 태곳적부터."
p.156 "동면이라는 건 말이에요. 일단 죽는 거예요. 돌아올 수도 있고, 간 채 끝나버리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죽은 거나 같죠. 그래서 봄에 동면에서 깨어난 곰한테는 가을 곰하고 다른 영혼이 들어가 있는 일이 있어요. 선수 교체인 거죠. 계절이 한 바퀴 돈다는 것은 그만큼 큰 사건이거든요."
모든 일에 명쾌한 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는 관계만 있다면 인생살이가 얼마나 편하고 또 얼마나, 얼마나... 단조로울까. 그럴 수 없기에 우연은 설렘이 되고, 열정은 고뇌가 된다. 쉬이 떨쳐지지 않는 여운은 작가가 그려내는 '어른의 연애'가 결국 알고도 내딛는 한 발짝의 결심을 피하지 않는 데서 오는지 모른다.
자연에 파묻힌 작은 마을, 그 안의 더 작은 사람들을 통해 드러나는 삶. 수천년을 이어져오는 땅과 물의 기억. 생의 감각은 눈으로 읽고 온몸으로 감각하는 문장으로 곳곳에 범람한다. 섬세하게 그려진 계절의 풍경은 독자로 하여금 미묘하고 쌉쌀한 관계의 맛을 느끼게 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이가 부디 먼 곳을 가만히 바라보게 하는 고요에 닿기를.
p.156 "그러니까 죽을 거면 제대로 죽어야 해요. (...) 절대로 억지로 일어나려고 하지 말아요. 아무리 큰 소리가 나도, 아무리 누가 흔들어대도, 속으면 안 돼요. 정신 차리고 진짜 소리를 들으세요."
p.189 두 사람 위에 바닥 모를 깊이와 밀도로 암흑이 펼쳐져 있었다. 그 구석구석에 몇억이라고도, 몇조라고도 할 수 있는, 몸이 떨릴 만큼 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몇천 년 전에도, 몇만 년 전에도 별하늘은 이렇게 펼쳐져 있었고, 원시림을 내려다보고, 아낌없이 빛을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다.
*도서제공: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