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내가 원한 것
서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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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좋아하시나요.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혹은, 좋아하는 계절로 여름을 꼽는 이가 있다면, 혹시 더위라도 먹은 게 아닌지 반문하고 싶어진다. 대놓고 그럴 것까진 아니라도, 솔직한 심정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치만, 아무래도 그렇잖아. 뜨겁다 못해 숨이 턱턱 막히고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한 그 계절을, 적어도 기억 속에는, 단 한 번도 좋아해본 적이 없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다, 를 넘어 몸서리치게 두려워한다. 이 고백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에 따라붙을 나의 음울하고 축축하고 노상 비실거리는 자아를 꺼내보이는 일이 영 마뜩찮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여름마다 죽었다 살아나 재작년쯤에 삼만이천번째 죽음에서 부활하신 기네스 신기록 메시아가 되었을 것이다. 그만하면 삼도천에서도 간보기 금지라고 써붙였을걸.

p.193 개떡 같은 날씨 100번에 끝내주는 순간 한 번으로 대낮의 더위가 용서되었던 날도 있다. 습기에 습기를 더하는 비도 가끔은 괜찮다. 그런 날씨는 일상으로부터 나를 밀어내는 듯하다.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에서 비를 피하기도 하고, 비를 맞으며 짧은 거리를 달려보기도 하고, 갈아입을 계획이 없던 옷을 벗게 한다. 변수가 많은 계절이면서 동시에 그 변수에 몸을 내맡기는 충동성도 함께 주는 날씨다.

p.258 여름이 아닐 때도 여름밤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향수를 찾아다녔지만, 향수는 좋기만 해야 해서인지 그 냄새를 구현하지 못했다. 플랑크톤과 세균과 안 좋은 것이 섞인 냄새. 흙 먼지 냄새. 불운한 기운… 그 모든 게 합쳐져야 그리운 냄새가 되는 것인지.


두려움의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뜨겁고, 선명하고, 타는 듯한 햇살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지나치게 생생한 감각이 온몸을 찌른다. 매미 우는 소리, 비 내리는 하늘, 감은 눈 뒤로 시뻘겋게 타오르는 세상. 살다가 살다가 죽어버리라는 것만 같아 천천히 가라앉다 흩어져버리고 싶은 나 같은 종자에게는 겨울의 적막이 그저 숨통 트일 구석일 뿐이라서.

그래서일까.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도 어쩐지 이해하기 어려운 별종 같다. 이 살다 못해 죽어가는 계절에 사랑할 구석이 있다니, 찐득하고 축축하게 젖어드는 온도에 낭만 비슷한 것이 들러붙는다니.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게 틀림없군요… 동시에, 대책없는 긍정 비슷한 것을 슬몃, 부러워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여름의 감정. 여름 맛. 귀여웠다 늘어졌다 하는, 내게 없는 것들.

p.73 너무 좋은 것은 자아를 파괴한다. 박살난 자아는 바로 재조립된다. (...) "애인 만들고 싶은 여자" 이런 문장을 읽기만 해도 내 마음속에는 어떤 이미지가 단번에 피어오른다. 너무 좋아서 마구 뛰어다니고 싶다. 이건 머리로 씹어서 몸으로 먹는 음식이나 다름없다. 내 몸이 있고 이 소설이 있는 게 아니라 이 소설이 있고 비로소 내 몸이란 게 만들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p.98 이 세상 것이 아닌 정신이야말로 이 세상을 놀라게 할 말을 한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의 정신을 저세상으로 보낸다. 정확히 그 에너지만큼 우리를 이 세상에 달라붙게 한다. 내가 궁금해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있으니까. 그가 우리의 언어로 말하고, 우리의 언어로 생각하니까.


하여간 그런 이유로 여름의 기분이란 뭘까, 절로 묻게 되는 것이다. 슬픔은 겨울의 전유물이라고, 마음껏 외로워할 수 있는 시간은 해가 낮고 밤은 긴 계절 뿐이라는 생각이 틀렸을지 모른다. 여름의 흔적 또한 묘한 슬픔과 아릿한 서글픔으로 남는다. 오래 앓은 사람의 몸이 그러하듯이. 그러니 "여름 좋아 인간"은 대책없는 처치 곤란의 재앙덩어리가 아니라 그저 온 몸으로 부딪히고 끌어안는 사람일지 모른다.

찬란한 청춘이나 상쾌한 웃음 따위는 차원 너머에나 존재하는 관념일 뿐인 계절.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하고 지나치게 가까워 눈을 감아도 소란하고, 숨막히는 더위와 축축한 공기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들러붙어오는 계절. 그 계절의 어느 구석을 사랑으로, 추억으로, 기다림으로 남겨두는 사람은 필경, 물렁한 웃음을 짓고 어깨에 힘을 빼는 법을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p.15 모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지옥을 돕는다. 이 지옥이란 것은 시기마다 달라져서, 사랑이 시작되기 전에는 욕망의 지옥이고, 사랑이 끝난 뒤에는 자기 내면과 혼자 남는 지옥이 펼쳐진다. 그리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처절하게 느끼게 하고, 제 발로 걸어 나오게 한다. 그것이 내가 그 여름에 배운 사랑의 힘이다.

p.164 생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은 어떤 순간 아주 순수하게도 보인다. 나는 그것을 반만 닮았다. 그는 상쾌한 것을 좋아한다. 지극히 행복한 상태는 시원하게 화장실에 다녀온 뒤 샤워하고 누워 있는 가뿐함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름의 에너지다.


아 싫다. 이대로 읽다간 외롭고 외로워 온몸이 안으로 웅크러들다 끝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을 슬쩍 접어두고 뜨거운 햇살을 그리워하게 될지 모른다. 이 미움과 두려움을 얼마간은 더 남겨두고 싶어진다. 그야, 무섭잖아. 달라진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충동에 발길을 맡기고 낯선 사람과 낯선 공기를 사랑해버린다는 건.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해서 가끔은 일 년 내내 지구를 떠나고픈 충동에 빠져들게 하는 계절을 조금쯤 사랑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에너지레벨의 저 반대편에 있는 사람 같은 이 계절이 귀여워지고 만다. 여름을 사랑하는 이를 사랑해버리고 만다. 충동적이고 기세등등한, 여름을 닮은 것들을.

p.4 내가 탐닉하는 여름의 이미지는 실제 여름과 별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하는 사랑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했던 사랑이 더 달콤하고 실감나며 애절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내가 글을 써서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실제보다 부풀리고 없는 것을 상상하면서 현실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느끼는 것. 사라진 것이 내 곁에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

p.246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자신이 인생에서 목격한 진실을 나름대로 말하고 싶어 하는 중인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보이는 지하실이다. 스스로의 고독에 짓눌려 편히 쉴 수 없는 이들을 기꺼이 환영하는 짓눌렸던 만큼 거기서 해방감과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쾌락을 느낄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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