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탐정 허균 - 화왕계 살인 사건
현찬양 지음 / 래빗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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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오만 무서운 게 있다 해도, 사람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 그런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침대 밑의 괴물보다 무서운 것은 침대 밑에 있는 사람이라고.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반만 옳았다. 열 길이 아니라 스무 길, 가장 깊은 물 속보다도 알 수 없는 게, 당장 눈앞의 사람 아니던가. 얼마나 오래 알았든, 얼마나 가까이 했든.

결국 자기자신조차 알 수 없는 게 사람이다. 그러니 사람의 말만큼 못 믿을 게 또 있던가. 배우고 익히기는 하였으되 하필이면 사람 잡을 손이라, 죽은 사람도 사람이니 그 쪽으로 갈밖에. 그 와중에 가만 두면 맛 따라 멋 따라 휭하니 나돌아다닐 양반한테 코 꿰이고 손목 잡혀 한양 떠나 남도까지 내려온 의생 이재영의 앞날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p.40 "그저 그런 살인 사건이 괴담 하나로 애생이의 삶을 재구성하는 연극이 되지 않었소. 애생이를 죽인 사람은 그런 것까지 생각한 모양이지라. 아름다운 여인에게 걸맞은, 그럴싸한 최후의 이야기 말이어라." 나는 애생을 검험한 의원이다. 애생의 후두부를 강타하여 생을 빼앗은 것은 고작 고기 한 덩이였다. 한데 죽은 이를 다시 죽일 수 있는 것은 혓바닥 하나로구나.

p.68 "사람이 죽으면 아무 말도 못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산 사람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지만 도리어 죽은 사람은 진실만을 말하는 법이야."


제목 그대로, 작게는 먹는 것 좋아하고 노상 허허실실하는 남자와 함께하는 좌충우돌 수사기행이겠으나 그 이면에는 가늠할 수 없이 매서운 물음이 있다. 웃는 낯 뒤의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와 헤아릴 수 없는 증오를 품은 여자, 그리고, 묻고, 묻고 또 묻는 남자가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무엇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어중간하고 초라한 이가.

전란 후의 조선, 나라도 사회도 폐허가 된 가운데 명분만이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고 버티는 나라. 있는 집에는 고깃국에 과자가 오르고 없는 자는 헐벗은 땅의 풀뿌리조차 구하지 못해 굶어 죽는다. 같은 임금의 나라. 어버이 되시는 왕은 멀기만 하고, 반상의 경계는 지엄하기 짝이 없어 서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들. 뼛골까지 쥐어짜이다 죽을 미천한 것들.

p.244 "조선은 임금이 아니라 삼강에 지배되는 나라야. 그대도 알겠지만 삼강이라 함은 '신하는 군주를 따르고 자식은 아비를 따르며 아내는 남편을 따르는 것'인데,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을 죄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죄라 하여 강상죄로 처벌한단 말이지. 그런데 그 강상죄가 사회 전반을 모두 지배하고 있지 않나. (...) 모두가 틀릴 수 있음을 알고 바닥부터 시작하여 진실을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작점일세."

p.277 "조선인은 근본부터 잘못되었어요.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사람이 약간 이상한 이야기를 들으면 금방 반박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이상한 이야기를 들으면 이게 고도로 돌려 말한 농담인지 아니면 어떤 해학인지 알 수 없어 도리어 머리가 멍해진다는 것을 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온전히 믿을 수도, 그렇다고 등돌릴 수도 없이 불완전한 인물들이 매력적이다. 눈웃음 정도로는 택도 없는 불완전, 부조리. 환경의 한계고 성찰의 한계이며 어쩔 수 없는 오만 같은 것. 어쩌면 작중 신분의 격차는 종의 차이만큼이나 깊고 무서운 것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 다르게 살아왔기에, 빼앗겨본 적 없기에 알지도 이해하지도 그럴 의지조차 가져본 적 없을 무지, 비정함.

그러므로 돌아서는 시선끝이 매섭고 차갑다. 그 점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 데서 깊은 만족을 느낀다. 그래야지. 되도않는 동정을 덧대느니 어쩔 것이냐, 일갈하고 돌아서 잊어버리는 게 낫지.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겠거니, 죽어 썩어질 때까지 저러겠거니, 이해의 너머에 있겠거니… 어떤 수용은 불구대천의 원한과 한끗 차이 아닌지.

p.136 그는 좋은 양반일 뿐, 한 번도 이 땅의 백성이어본 일이 없다. 조선의 10분지 1, 아니 100분지 1에 해당하는 양반인 그는 100분지 99에 속하는 나의 마음은 영원히 제대로 알 수 없으리라. 비록 그에게 측은지심이 있다 하더라도.

p.179 "자넨 행동이 올곧은 사람이지. 말에서는 품위가 느껴져. 봐. 이토록 그대를 조롱했는데도 욕 한마디 할 줄 모르잖는가. 그것만 봐도 자넨 굶어본 적이 없는 게 확실하거든. 사람이 말이야, 배가 고프면 몸에 힘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힘도 떨어진다네. 굶주림을 안다고? 자네는 아무것도 몰라. (...) 나물밥이 별미라고? 한 번도 배고픈 적 없는 놈들 입에서나 나올 만한 말이 아닌가."


작가는 캐릭터의 입을 빌어 원망, 기쁨, 고개를 절로 떨구게 하는 죄책감 앞에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있는 이를 끌어앉히며 말한다. 먹어. 먹고 얘기해. 욕을 하든 펄펄 뛰든 뭘 하든, 일단 먹고나서 해. 밥부터 먹어 일단.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왜 그랬냐고, 아릿하고 참담한 원망 한 자락을 끌어안고도 꾸역꾸역, 눈물에 밥술을 눌러 삼키게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야기에는 슬픔이 묻어있다. 닿을 수 없는 이해의 너머에도 불구하고 함께하겠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이름의 단단한 그것. 마지막 장면처럼 들이닥치는 이야기가 어디로 향하게 될까. 그들의 여정이 이것으로 끝이 아니기를 빈다. 설령 그 끝이, 채 씹어 삼키지 못한 무언가일지라도.

p.17 "난 너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허형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듯했지만 내뱉지는 않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밥그릇에서 밥 한 숟갈을 크게 떠서 내 쪽으로 옮겨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봉밥으로 볼록하게 솟은 내 주발 위에 남산만 한 것이 하나 더 생겼다. "많습니다." "내 잔소리가 듣기 싫거들랑 잠자코 먹어라."

p.308 허형은 마치 울 것처럼 눈동자가 새빨갛게 변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하지만..." 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그다음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어쩌면 그 뒤에 미안하다는 말이 들려올까 해서.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내가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면 자네는 또 나를 싫어하게 될 테지. 난 그런 것은 견딜 수 없어."


*도서제공: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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