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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 - 만성질환 혹은 이해받지 못하는 병과 함께 산다는 것
메건 오로크 지음, 진영인 옮김 / 부키 / 2023년 7월
평점 :
*출판사 부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사는 일은 외롭다. 살아있다는 감각을 비롯해 삶의 본질적 요소 중에는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고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사는 일을 외롭게 한다. 그것은 존재라면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더이상 살아있지 않은 것이 되기까지의 시간 내내 오롯이 홀로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이다. 삶은, 외롭다.
살아있는 것은 쉽게 병들고 자주 다친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의 손상도 겪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그 익숙한 경험, 질병, 통증, 일상의 곤란함, 장애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일까. 충분히 설명하고 고통을 호소한다면, 현대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룩된 진단 체계를 통해 명명의 기회를 얻어낸다면 누구나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생래적으로 공감하는 탓에 타인의 고통, 정확히는 공감과 연민을 요구하는 호소는 쉽사리 구태연하고 지긋지긋한, 다소 피로한 일이 되기 마련이다.
또한 사람과 함께 사는 동물인 탓에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을 보느라 피곤해진 사람‘을 마주하고 또 그들의 감정을 읽어내지 않거나 끝없는 공감과 자리-내어주기를 강요할 방도가 없는 바, 외로움은 또다른 고통으로 이어진다. 안 그래도 외로운 삶, 사회로부터,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종내에는 자기자신으로부터 소외되기 마련이다.
고통은, 더욱이나 오래 이어지고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은 당사자로 하여금 몸과 시간을 이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선명히 지각하게 만든다. 이전의 일상을 제한당하는 불편감, 위축되는 생활의 경계, 반복될수록 예민하게 지각되는 통증은 몸이 하나의 현존하는 물체로서 지각 가능한 시간에 놓여있음을 알게 한다.
혹자는 말한다. 아픔으로 인해 얻은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고, 일상을 되찾은 행복이나 이전에는 몰랐던 것들에 감사하는 태도로 살아갈 수 있다고. 으레 ‘그렇다고 하는데 왜 너는 맨날 아프다고 타령이냐’는 힐난이 따라붙지만 않는다면, 그게 일상과는 동떨어진 말이라는 걸 잠시 잊는다면 제법 멋들어진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말이다.
문제는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분명 삶의 질이 뚜렷하게 저하되고 일상을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기초적인 것들을 수행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내 몸이 아프다는데 도무지 설명할 말이 없다.
들어맞는 진단이 없으니 꾀병, 완곡하게는 ‘심인성 질환’이라고 치부된다. 부러진 뼈를 의지로 붙이라는 사람은 없는데, 피로나 발진, 구역감과 각종 통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쉽게 의지와 극복의 문제가 된다.
p.8 아픈 당사자는 질병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질병이 일으키는 두려움과도 싸워야 한다. 그래서 질병 서사는 늘 ‘극복’을 지향한다.
p.375 병은 분명 우리의 삶을 검증하고 다시 세우도록 떠민다. 병이 불러온 파괴로부터 재창조의 공간이 생겨난다. (...) 병의 아픔을 보상해 줄 만한 유용한 점을 찾는 행위와, 아픔의 본질에 관해 우리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는 행위는 한 끗 차이다.
p.384 발전하길 바랐던 자신의 어떤 측면들을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하면서 생겨나는 지식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파멸과의 조우에서 입은 상처와 이어진 지식이다.
하다하다 도무지 길이 없어 대체의학이나 온갖 민간의학에 눈을 돌리면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는, 배교자와 그 어리석음을 질책하는 비난이 쏟아진다. 그러나, 몰라서 가는 사람은 없다.
생각없이, 처음부터 보다 쉽고 가까운 현대의학을 팽개치는 일은 적어도 현대화된 국가에서는 드물다는 뜻이다. 아프다니까요? 더 이상 답이 없다니까요?
p.125 인간이 자정 작용을 통해 제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나 또한 이런 환상에 전적으로 빠져 있었다. 자기 관리의 행위에는 영적인 데가 있다. 나는 의식을 치르면서, 부서진 삶을 다시 맞추어 연속성을 찾고자 했다.
p.164 이미 문제가 있는데 타인에게 지독히 인정받지 못하면 문제는 더욱 악화 하고, 우리는 윤리적 외로움을 느낀다. 침묵을 강요당한 집단에 속하는 특별한 고통, 단지 정체성 때문에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사라졌을 때 느끼는 고통을 지적하는 개념이다. 그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저자 메건 오로크는 십여년간 시달려온 원인불명의 다발적 통증과 불편감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는 과정과 그 경험에서의 여러 통찰을 조심스러우면서도 뜨겁게 전달한다. 각자의 고통, 말할 길을 찾지 못한 각각의 아픔 무엇도 결코 사소하지 않으며, 통증과 질병이 일상으로 편입되는 삶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진단을 받고,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하고, 수차례 좌절하고 비난받으며서도 살아남기를 포기하지 않는 지난한 과정을 세세하게 풀어놓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만성질환을 대하는 사회의 문제점, 현대서구의료시스템이 고질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내보인다.
p.346 건강이란 "질병을 앓지 않거나 허약하지 않은 상태를 넘어서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온전히 안녕한 상태"다. 의학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이 정의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특히 만성질환의 경우 그러하다. 의사들이 환자의 치유를 돕고 싶다면, 환자가 온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전세계를 휩쓴 COVID-19. 모두가 공포에 떨고 전반적인 일상이 흔들리는 때는 지났다고들 한다. 더러는 한 번 앓고 지나가면 면역이 생긴다든지, 까짓것 감기와 다를 게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회복’이나 ‘지나간 경험‘ 뒤에는 상세불명의 후유증을 겪거나, 지금까지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가 겪은 여러 자가면역질환 또한 이름 탓인지 그 원인이 환자 개인의 탓으로 돌려지는 경향이 있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스스로에게 신경쓴다면 면역 시스템이 정상값을 찾을 것처럼.
심각해보이는 특징적인 급성기 증상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일상적이거나 가벼운 질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그들의 환자-됨, 아픔은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의 호소는 과거의 히스테리나, 더러는 의료진의 권위를 의심하는 주제넘은 환자로 치부되기도 한다.
p.334 잘 알지 못하는 병을 심리적 문제로 해석하는 문화의 비극이다. 그렇게 병을 등한시하면 환자는 홀로 남겨져 안 보이게 되고, 그들의 병은 성격적 결함으로 취급된다.
이들을 대하는 ‘참 쉬운 말들’은 명시적으로든 잠재적으로든, 도덕적 훈계의 양상을 띈다는 특징이 있다. 전문 교육을 받은 학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왜 반복적으로 증상을 호소하는가? 왜 보다 건강해지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왜 연민과 공감, 알아주기를 원하는가? 노력과 마음먹기가 모자란 것이 아닌가?
언제는 병이 똑똑, 들어갑니다. 하고 온다던가. 아픈 몸이 개인의 부주의나 불량한 생활로 인해서만 초래되던가. 남에 비해 덜 아프니 안 아픈 셈 칠 수 있는 고통이 어디 있던가. 당장 죽지 않는다고, 보기에 괜찮다고 아프지 않은 게 되던가.
p.277 확실한 단서와 증거가 없으면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 병은 심각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현실이 모든 차이를 만들어 냈다.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로 나는 거의 죽을 뻔했다.
아프기로 말하자면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 거의 매일 현기증과 소화불량, 전신 통증을 안고 산다. 이것들은 일종의 ‘기본값’이 되었기 때문에 견딜만한 날과 덜 견딜만한 날이 있을 뿐이다. 눈에 보이는 부상이나 증상이 아니기에 이해를 바라기도 어렵다. 통증과 제한이 없는 이들과 동일한 수행을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과 혼자 있는 시간들에 겪어내는 고통이 필요하다.
일상 얘기에서 아픈 이야기를 제하는 기술이 늘었다. 적당히 불편하지 않게,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 내가 나를 연기해내는 시간들. 아픔과 꼬리를 무는 우울, 절망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아픈 사람을 보는 일은 괴롭다. 때문에 소중한 사람이 나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히 아플 수도, 고통 줄이기에 전념하기도 어렵다. 아픈 사람은 자의든 타의든 까다롭고 신경이 쓰이는, 불편한 존재가 된다.
p.353 "네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행위만으로도 내겐 어떤 입장을 요구하는 일이야. (...) 공감해야 하고. 힘든 일이지. (...) 병을 알아달라는 주장은 입장을 정해달라는 뜻이 되거든." (...) 인식의 행위에도 진정으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아픈 사람을 힘들게 한다.
장성한 자녀, 유쾌한 친구, 자기 분야에서 재능을 펼치는 한 사람의 시인, 작가, 저널리스트, 편집자, 강사... 사회에서 ‘1인분 몫’을 다한다고 생각했던 일상은 온몸을 덮치는 병에 시달리는 시간들에 밀려났다.
그것을 어느정도 되찾기까지 너무나도 긴 시간을 자기부정과 가까운 이들의 비난과 피로, 사람이 아닌 그저 하나의 몸으로 여겨지는 치료 경험과 대체의학에 기대고 전방위로 붕괴되는 삶을 수습하려 애써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이 책은 ‘완치’로 나아가는 희망과 극복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넘어지고 무너지고, 구르고 부서지다 끝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보기를, 사랑하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강인하고 눈물겨운 이야기다. 그러나 성공담 내지는 동정심을 짜내려는 글이 아니다.
p.22 이 책은 병을 없애거나 무찌르는대신 병과 함께 사는 이야기다. 병을 극복하는 미국적 정신을 놓아 주고, 상호 의존성을 찾는 이야기다. (...) 신체는 언제나 다른 신체와 소통한다. 면역계는 보건 정책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과 정서에도 반응한다. 그래서 면역 기능에 이상이 생긴 신체란, 우리가 서로 영향을 잘 주고받는 존재임을 구현한 몸이다.
그렇기에 나의 긴 시간, 아프지 않았던 때가 거의 없는 나의 과거, 안팎으로 의심과 훈계, 죄책감에 시달렸던 나와 내 몸의 기억을 떠올리며 내내 울며 읽었다. 울 수밖에 없었다. 모를 수가 없으니 아프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결국 이것은 아픈 사람, 오래, 자주 아프면서도 병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도 아프다는 사실, 나으려고 애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리석거나 부도덕하다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이 책은, 늘어나고 다양해진 삶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사람을 위한 위로이자 그들이 존재함을 직시할 것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그와 동시에 용기와 사랑의 기록이다. 이 책을 읽을 아픈 사람들이 살아보기를 포기하지 말 것을, 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병을 끌어안고 나아가는 삶이 있음을, 당신 자신을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말기를 바란다.
p.136 만성질환에 시달리면 건강을 향한 길로 무작정 밀고 나아갈 수 없다. 오히려 전신에 나타나는 모호한 병을 받아들이려면, 우리가 아픈 존재이고 증상은 나타났다 사라지며 우리의 병은 환자가 정복할 수 있는 그런 질환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p.327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야 했다. 정체성과 건강과 희망이 우연히 만나는 이야기. 어떤 종류의 생존이든 그 안에 힘이 있다고 보는 이야기. 내 경험은 삶 그 자체였다. 불리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몸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