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맛집 산책 - 식민지 시대 소설로 만나는 경성의 줄 서는 식당들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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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빨간머리 앤의 빨갛고 달콤한 산딸기주의 맛을, 유난히도 운수 좋던 날 김첨지와 인력거꾼들이 주워삼키던 노포의 안주 맛을 상상하며 입맛을 다시는 부류. 대개 먹보, 정도로 일축되는 그들의 상상은 미시사, 문화사라는 이름의 창이 되기도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어느 시대건 문학은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더욱이 상대적으로 세부적인 묘사가 가능한 소설의 경우에는 의도와 관계없이 독자를 현장으로 끌어들이고 만다.


이 책은 조선이 대한제국이 되었으되 다시금 제국의 식민지 조선반도가 되어 이름조차 뺴앗겼던 때, 바로 그 때를 주목한다. 특히나 그 시대에 창작된 소설과 각종 광고 기사들을 통해 현재의 지명과 대조함으로서 서구화된 일본과 유럽식 소비 문화가 조선 민중에게 미친 영향, 조선이 확장된 일본 영토로 여겨지던 때의 부유층의 생활, 선망되던 문화를 살펴본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소울 푸드‘로 일컬어지는 설렁탕, 피지배계층의 외식 문화, 냉면과 국밥, 백화점과 조선호텔, 마지막으로 청요리와 일본식 서민 음식인 우동 그리고 덴푸라까지. 가히 번쩍이는 시가지부터 뒷골목 시장통까지 아우른다고 할 수 있겠다.

p.304 순호는 냉면 먹을 생각에 전차에서 서둘러 내리려다 ‘패스’를 ‘냉면’이라고 잘못 말한다. (...) 원래 말하려 했던 ‘패스’는 기자증 정도 되는 것인데, 전차는 무임승차가 가능했고 열차를 탈 때는 상등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순호는 요금을 패스로 대신한다고 말하려다가 그만 ‘냉면’을 외쳐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단순히 미식 명소를 찾아다니는 내용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무거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새하얀 식탁보, 이름도 낯선 음식들, 정원이 딸린 일본식 가옥과 커피향이 짙게 깔린 다방, 호화로운 가격표...

그와 대조되는 식민지 조선 민중의 일상은 한 달 벌이를 몽땅 털어넣어도 식사 한 번 엄두낼 수 없고, 조선 땅에 지었으되 조선 음식은 없는 고급 식당이 늘어선 시가지 뒷골목의 파리 날리고 기름 쩐내가 나는 허름한 전포와 인력거꾼,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나이어린 여공의 빈곤에 가깝다.

p.189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단장한 가네보 서비스스테이션은 (...) 모던보이, 모던걸들을 유혹할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옷과 소품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 전시된 상품들은 열악한 근무 조건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식민지 조선의 여직공들이 힘겹게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아무리 고급스러운 상품이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하루에 30~35전을 받으면서 12시간을 일해야만 했던 직공들의 땀과 눈물이 어려 있었다.


낯선 것의 설레임과 환상 뒤에는 당장 살아내야 할 현실과 식민지배의 설움이 있었다.

인용된 소설 속 인물이 고급 요정에서 밀담을 나눌 때, 말쑥하게 빼입은 남녀가 레스토랑에 마주앉아 볼을 붉힐 때, 능숙한 솜씨로 점원에게 코스메뉴를 주문할 때, 식비를 털어 찻값만 겨우 내고 떠날 때, 독자는 소설 속 세계 한켠에서 조용히 입맛을 다시는 것으로 시작해 당시의 첨단 유행과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표에서 빈부격차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p.70 미쓰코시백화점 식당에서는 각종 요리를 비롯해 과일, 음료도 판매했다. 서양요리나 일본요리뿐만 아니라 커피 맛으로도 경성에서 1, 2위를 다투었다고 한다. (...) 이곳에서 파는 음식 가운데는 서양음식, 일본음식, 심지어 중국음식까지 있었지만 조선음식은 없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백화점에 자리 잡은 식당이었지만, 이곳에서도 식민지라는 멍에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p.367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이 받았던 평균적인 급여를 살펴보면 그 가격을 더 잘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급여가 얼마나 되면 조선호텔 식당의 정식을 사 먹는 데 부담이 없었을까? 조선호텔 식당의 저녁을 기준으로 하면 (...)화장품 외판원이나 가게 점원이 한 달 내내 번 급여는 정식 3~4번을 먹을 수 있는 돈에 불과했다. 급여가 아니라 식비로 한정하면 그 가격을 더욱 분명히 실감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조선호텔 식당의 정식 가격은 서민들의 한 달 식비보다 더 큰 금액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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