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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듀엣
김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평점 :
*출판사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오래된 말이 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독히도 잔인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잔인하지만, 필요한 말이라고. 처음에는 그저 애도는 그쯤 해두고 기억 밖으로 밀어내야 한다는 뜻으로, 지금에 와서는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러니 슬픔에만 빠져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따금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을 소리내어 말해본다. 모두가 죽은 세상에 남겨진 사람은, 설령 그 모두가 전부가 아닐지라도, 수치심을 느낀다는 생각을 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부끄러움. 나의 삶이 아닌 ‘살아남은’ 나의 삶을 살아 버티기.
사는 일은 본질적으로 외롭다. 그러나, 차마 그만두지도 못하게 남겨진, 살아남은 자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외롭다.
p.167 계획을 세우고, 계획한 대로 실행하고, 계획을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계획에 가깝게 계획을 마무리하면서, 그날 이후로 수영은 수영의 삶이 아니라 ‘혼자‘ 살아남은 수영의 삶을 살았다.
다른 작품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책에서 드러나는 작가 김현의 세계는 모호하고 불분명하다. 이야기의 안팎이, 배경이, 시점이, 경계가 확실하지 않다. 발 아래 딛고 선 자리마저 물러지고 부서지고 흔들리는데...
오로지 딱 하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살아있는 사람이, 여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p.67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 왜 하필 그런 문장이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어째서 무너지고 무너졌다는 말을 우리는 붙들고 있었을까. 주미는 왜 그렇게 일찍 인생은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것이라고 깨쳤을까.
p.84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존재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해도, 당신 역시 쉬이 눈 감지 말기를.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니까. 상민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앞서 말했듯 이야기의 안팎이 불분명한 탓에 연작인지 아닌지, 에세이인지 아닌지 자꾸만 헷갈려 연신 목차를 넘겨다보며 읽었다. 그러나 마지막 책장을 넘길 떄쯤 불현듯 깨달았다. 그것에 의미가 있는가?
다른 시간, 다른 장소를 살아가는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일지라도 한 데 엉겨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결국 그들의 삶이, 나아가 우리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사실, “요즘 사람”들의 구질구질한, 땀내 나고 쪼들리는 이야기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나의 현실, 내 또래와 주변인들이 당면한 가난과 차별, 지긋지긋하게 마주하는 어려움을 마주하는 일이 기꺼울 리가 없지 않은가.
p.103 말이 말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도 모르게 그냥 하는 말이란 없다. 그냥 하는 말이 자신의 말일 뿐.
p.114 형석은 사과할 자격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만만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승우는 사과하지 못했음을 평생 기억하는 사람이야말로 누군가를 만만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티끌 모아 티끌 인생이 이야기를 자꾸만 찾게 되는 것은 아 그래, 알지 이거, 하며 덜컥 비틀대는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작은 이야기에도 더 작은 사람이 여전히 살아 발버둥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내모는 세상에 여전히 사람은 사람을 살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작은 믿음을 남겨둔다. 사는 일은 본질적으로 외롭다. 그러나 그 외로움의 존재와 그것이 모두의 삶에 내재해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이 연약한 인간종을 살아남게 한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외로우나, 모든 순간에 죽을 만큼 외롭지는 않다, 고.
p.252 -보고 싶어. 무서워, 미안해, 라는 말보다 한 글자가 더 많은 말. 그러니까 뭐가 더 있어도 있겠지 싶은 말. 철희는 한 글자가 더 많은 말의 힘을 믿었다. 믿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러면 정말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