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의 몸 -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글, 최형락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타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즐겁다. 때로는 몸을, 때로는 말과 행동을 통해 그가 거쳐온 시간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일은 즐겁지 않을 수가 없다. 몸에는 흔적이 남는다. 어떤 동작을, 태도를, 말로 표현되지 않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일들은 강줄기에 물길이 남듯 몸에도 흔적을 남긴다.

그러니 노동이 남긴 삶의 궤적, 태도와 몸가짐이 되는 그것을 가만히 따라가는 일은 늘 생경한 세계를 마주하는 것과 같은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p.304 자기 일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베테랑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건 베테랑에 도달하기 쉽지 않다. 우리가 쓰는 사물(도구)과의 관계 맺음으로 시작해서 타인은 물론, 살아가는 터전까지. 우리는 노동을 매개로 이 모든 것과 관계를 맺고 있기에, 그 관계들 사이에서 자유롭기가 어렵다. 자유롭지 않으니 부끄러움은 늘 공동의 것이다. 자주 부끄럽다. 부끄럽지 않기 위해 쓴다. 그린다. 일한다. 노동한다. 무엇이건 시도한다.


한 분야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이들의 지혜가 있다. 학술적 지식과는 다르다. 몸으로 배워낸, 시간과 노동으로 터득한 단단한 삶의 태도가 있다. 내게는 이 책을 읽는 경험이 12인의 베테랑들이 그들의 삶에서 긴 시간 공들여 빚어낸 지혜를 경청하는 것과도 같았다.

새하얀 셔츠를 빼입고 우러름을 받는 일이 아닐지라도, 번듯한 사무실이 아니라 땀흘리는 현장에서 하루를 보낸다고 할지라도 귀하지 않은 직업이 없다고, 그것을 온몸으로 증명해내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나의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진다.

p.326 좋은 터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도구로 쓰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교정하려 하지 않는다. 터전이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마냥 웃음 가득한 회고나 어떤 성공 신화 비슷한 것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들이 어떤 대의를 위해 굳이 그 일을 선택한 것이 아니지 않던가? 그렇다면 이들을 산업영웅, 고된 일 하는 사람, 자식한테는 안 시킬 일 하는 사람 정도로 치부해 박수 몇 번에 흘려보낼 수 있던가? 그래도 되는 걸까, 정말?

그들이 자신의 시간과 노력에서 보람을 찾았다고 한들, 본인 아닌 그 누구도 삶 혹은 생계라는 거친 문제에서 떼내어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들을 주체에서 객체의 자리로 떠밀어버리는 것과도 같다. 이름과 자리를 빼앗는다. 지독한 모욕이요 경멸이다.

p.212 매일 눈 맞추는 존재가 인간에게 오롯이 수단으로만 여겨질 순 없다. 무엇이든 서로 주고받는다. 노동을 구성하는 이들끼리 맺는 관계가 있다. 그 관계마저 노동을 구성한다. 그 관계의 자리에 비인간 동물도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만나는 12인의 노동자들, 그들의 일은 사회의 정점이나 주인공의 자리에서는 조금쯤 비켜서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사회를 이루는 축이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존재해왔다. 자신의 일터에서, 노동에서, 삶에서 중요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위험하고, 고되고, 존중받지 못하는 줄을 모두가 안다. 노동의 강도에 걸맞은 임금과 환경이 보장되지 않음을 누구나 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일이 우리 사회가 잊어서는 안 될 그 자체로서의 역사이자 없어서는 안 될 일임을 모르지 않는다.

p.179 세상은 성실을 능력으로 치환한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이때의 성실이란 몸에 손상을 입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기준이고, 능력을 둘러싼 서사는 '정상 몸'에서 시작해 '정상화 된 몸'으로 끝난다.

p.364 활판인쇄 기계 수집가인 김진섭은 (…) 팔려 간 활판인쇄기를 멸종동물에 비유했다. 인쇄소 기술공들도 신기술이라는 문명에 밀려 사라졌다. (…) 멸종동물을 유독 더 보호하지 않는 나라가 있다.


그러나 보호하지 않는다. 여전히 목숨값이 소모되는 장비값보다 싸다. 노동자의 안전은 여전히 뒷전이다. 몸을 몸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는다. 일터 안팎에서 가볍게 지워지는 이들이 있다. 살아있는 것에게는 무시될 수 없는 존엄이 있음을 너무도 쉽게 잊는다.

p.101 달까지 우주선을 보내는 시대에 왜 고작 땅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떨어져 죽는 일이 이토록 흔한지. 기술은 왜 특정한 곳에만 쓰이는지. 왜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는 일에 진심인 베테랑이 이를 악물고 지켜야 하는지.

p.260 '농인도 나이가 듭니다. 시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고요.' 화면 구석 작은 동그라미, 이것이 이 사회가 농인들에게 내준 자리일 것이다. 이해도 공존도 없는 자리. 그러는 사이 나이가 들고 시력이 흐려진 농인들은 점차 자신의 언어마저 잃게 된다.


이 책은 베테랑, 온몸으로 겪어낸 노동이 만들어낸 몸, 그에 새겨진 시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이다. 가히 장인이라 부르기에 손색없으나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 이들에게 귀 기울이는 작업의 기록이다. 무시될 수 없는 것이 무시되는 현실의 뼈아픈 고발이다.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 고.

“저 자세를 안다. 오랜 시간 한자리에서 일한 사람만의 태가 있다.”

p.157 참 쉽게 사라진다. 무수한 생이 단숨에 사라지는 일은 가슴을 부여잡고도 삶을 휘청이게 한다. 그리고 야금야금, 일 하다가 너무 많은 이들이 병들고 목숨을 잃는다. 태어나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사라지는 일도, 그리고 애도하는 일도 존중 속에 이뤄지길 바랄 뿐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처음 닿은 손길이 누군가의 진정한 노동이라면, 존중받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