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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 샤우트
P. 젤리 클라크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흔히들 상도를 넘어서다 못해 잔악무도하다고 평가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저 사람같지도 않은 놈”이라고, 사람도 아니라고. 과연 그것은 야만의 시대,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전쟁터에서만 통용되는 말인가. KKK, 정확한 명칭은 몰라도 과거 우스꽝스러운 복장과 더불어 비-백인(개중에는 ‘백인같지 않은 백인’이 포함될)을 향한 집단폭력행위를 일삼았던 유사종교집단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저들은 사람도 아니라며 진저리치던 게 사실이었다면,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 부분이 사실이었다면? 그들이 정말 사람 흉내를 내는 사람-아닌 존재였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악의적 선동에 넘어간 대중의 집단증오였다면? 그들을 처치하는 사냥꾼이 존재했다면? 이야기는 이 서글프고 제법 타당해보이는 상상에서 시작한다.
금주법 시대 미국, 1920년대의 조지아주 메이컨, 평범하고 한적하기 짝이 없는 이 곳에는 사람이 아닌 것들이 배회한다. 흑마술이 깃든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국가의 탄생”과 그에 홀려 증오를 뿜어내는 ‘평범한’ 시민들, 그리고 비밀 의식으로 소환된 쿠 클럭스. 그것들은 총과 폭탄으로도 해치울 수 없는 사악한 존재로, 사람을 사람-아닌 것으로 만드는 힘으로 불러내져 사람을 해친다.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참극에서 살아남은 마리즈, 그는 영혼과 신비한 힘이 깃든 무기, 노래하는 검을 들고 그들을 처단하는 사냥꾼이다. 그와 동료들의 힘을 노리는 이는 악마는 하얀 두건을 쓰고 온다. 악마의 정체는 무엇인가, 무엇을 노리는가.
과연 우리 자신은 악마의 꼭두각시가, 하수인이, 더 나아가 악마 그 자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참극의 생존자, 마리즈는 불태워지고 손발이 잘려나가는 무력함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과연 ‘살아남은 이’는 마리즈 그 하나라고 할 수 있는가.
괴물,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 틈에 숨어있는 괴물이 노리는 것은 증오이다. 생생하고 뜨겁게 끓어넘치는, 영혼을 불태우는 분노와 증오. 그를 위해 영화, ‘깨끗한 고기’, 교묘한 속삭임과 스치는 눈길로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저것 좀 보라고, 저 미움받고 불태워져 마땅한 것이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지 않느냐고, 마땅히 채찍질당하고 얻어맞고 고통받아야 할 혐오스러운 종이 감히 신을 닮은 우리 하얀-인간과 동등한 삶을 살아가려 하지 않느냐고, 저들의 요술이 우리의 신앙과 동급으로 맞먹으려 하지 않느냐고. 없애라고, 짓밟아 부수고 조롱하고 모욕하라고. 먹인다. 모이게 한다. 속살거린다. 저들은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나 강한 혐오는 두려움의 반증이라던가. 누군가를 인간의 범주 밖으로 밀어내는 이들은 그들이 증오하는 이들이 인간임을 잘 알고 있다. 채 인간이 되지 못한 짐승이라고 채찍질하고 걷어차고 눈을 흘기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그들을 두려워한다.
끊임없이 정당화할 이유를 붙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굴복당할 것을 요구받는 존재에게는 짓밟히지 않는 힘이 있다.
p.198 “저들의 공포는 현실이 아니다. 그저 불안과 무능일 뿐이지. 저들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다. 저들의 증오는... 물 탄 위스키 같다. (…) 너희 모두는 증오할 이유가 충분하다. 너와 너희 족속에게 가해진 온갖 악행은? 채찍질당하고 얻어맞고, 사냥당하고 개에게 쫓기고, 저들 손에 그토록 지독하게 고통당한 민족. 너희는 저들을 경멸할 이유가 충분하다. 수백 년간 타락한 저들을 혐오할 이유가. 그 증오는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확실하고 올바르며, 너무나도 강할 것이다!”
앞서 서글프고 제법 타당한 상상, 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혹자는 외계인이니 괴물 또는 악마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어디 있느냐 하겠지만, 글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법과 제도로 꽁꽁 얽매어 사람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일은 얼마나 있을법하냐고 묻고 싶다.
단체로 침대보같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우 몰려다니며 대단한 소명인양 멀쩡히 살아가는 이를 잡아 불태우고 두들겨 패고 목매달아 죽이는 일이, 바로 쳐다보지도 원하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하는, 그런 일은 얼마나 조리있는 일이기에 축제처럼, 유희처럼, 일상처럼 자행되었느냐고 묻고 싶다.
p.39 클랜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퍼뜨린 악령은 살아남아 유색인이 이제 투표를 한다는 이유로 채찍질하고 죽이고, 정부에서 내쫓고, 온갖 학살을 저질러 지금껏 우리 숨통을 죄는 짐 크로법을 시행했다.
p.65 내 생각엔 클랜이 악을 받아들이면, 악이 그들을 먹어 치우는 것이다. 속이 텅 빌 때까지. 그리고 자기가 인간임을 기억 못 하는 허연 악령이 남는다.
존재했던 이들,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은 말한다. 내가 여기 있노라고. 과연 총구를 겨누고 자루를 꼬나쥔 이가 누구일지 생각해보라고. 너의 연약한 살결에, 나와 같은 피가 흐를 몸뚱이와 너는 모욕하고 나는 응답하는 말을 내뱉을 목구멍에서 터져나올 것이 과연 무엇일지 잘, 아주 잘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복수가 두려우면 처음부터 저지르지 않았으면 될 일이 아니었느냐고, 무엇을 위해, 무슨 이유로 우리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없애고자 발버둥을 쳤느냐고. 한 데 모여 눈을 빛내고 입을 벌려 씹어 삼켰느냐고. 보드라운 손과 연약한 발을 대신해 우리를 수족으로 부렸느냐고.
그래서, 이제는, 지금까지, 왜, 무엇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너를 보라고, 누가 ‘우리’의 ‘우리’ 안에서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느냐고, 그것이 누구에게 달렸겠느냐고.
노래와 민담과 전통신앙의 힘, 죽었으되 사라지지 않은 이들의 가호, 진창에 처박혀 빛나는 눈, 뼈의 질감, 짐승의 것들, 사람됨의 증거로 인정받지 못한 것들. 작가는 그를 통해 꺼지지 않은 불씨가 터져오르듯 묻는다. 내가, 우리가, 너와 당신이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흥얼거리듯 묻는다. 조소처럼 건넨다.
p.206 그들이 내게 준다는 것은 권력이다. 지킬 힘. 복수할 힘. 내 동족의 생사를 좌우할 힘. 유색인들이 이런 제안을 받아 본 적 있을까?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언제 있었을까? 우리는 그동안 내내, 인간의 꼴을 한 괴물의 손에 고통당하고 죽어 나가지 않았는가? 우리가 다른 괴물과 계약을 맺는다면 뭐가 다를까? 우리를 그렇게 경멸하고 괴롭힌 이 세상을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을까? 세상이 우리를 구하려고 무엇 하나 해 준 것 없는데, 어째서 손을 들어 그 세상을 구해야 할까?
모든 이유에도 다시금, 나는 여기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당신들과 함께 존재하노라고. 당신이 부수고자 했던 짐승은 신과 같은 존재로 임하노라고.
신의 아들이 이르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누가10:18). 너희는 제 머리의 두건을 보지 못하고 남의 살결을 보는구나. 일상의 악마, 그들이 아이와 여인과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는 꼴을 보아라.
p.225 “쿠 클럭스가 그러니까, 쿠 클럭스 짓거리를 안 하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 있어? (…) 그들은 여전히 출근할까? 아내에게 남편의 의무를 다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