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 샤우트
P. 젤리 클라크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흔히들 상도를 넘어서다 못해 잔악무도하다고 평가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저 사람같지도 않은 놈”이라고, 사람도 아니라고. 과연 그것은 야만의 시대,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전쟁터에서만 통용되는 말인가. KKK, 정확한 명칭은 몰라도 과거 우스꽝스러운 복장과 더불어 비-백인(개중에는 ‘백인같지 않은 백인’이 포함될)을 향한 집단폭력행위를 일삼았던 유사종교집단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저들은 사람도 아니라며 진저리치던 게 사실이었다면,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 부분이 사실이었다면? 그들이 정말 사람 흉내를 내는 사람-아닌 존재였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악의적 선동에 넘어간 대중의 집단증오였다면? 그들을 처치하는 사냥꾼이 존재했다면? 이야기는 이 서글프고 제법 타당해보이는 상상에서 시작한다.


금주법 시대 미국, 1920년대의 조지아주 메이컨, 평범하고 한적하기 짝이 없는 이 곳에는 사람이 아닌 것들이 배회한다. 흑마술이 깃든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국가의 탄생”과 그에 홀려 증오를 뿜어내는 ‘평범한’ 시민들, 그리고 비밀 의식으로 소환된 쿠 클럭스. 그것들은 총과 폭탄으로도 해치울 수 없는 사악한 존재로, 사람을 사람-아닌 것으로 만드는 힘으로 불러내져 사람을 해친다.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참극에서 살아남은 마리즈, 그는 영혼과 신비한 힘이 깃든 무기, 노래하는 검을 들고 그들을 처단하는 사냥꾼이다. 그와 동료들의 힘을 노리는 이는 악마는 하얀 두건을 쓰고 온다. 악마의 정체는 무엇인가, 무엇을 노리는가.

과연 우리 자신은 악마의 꼭두각시가, 하수인이, 더 나아가 악마 그 자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참극의 생존자, 마리즈는 불태워지고 손발이 잘려나가는 무력함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과연 ‘살아남은 이’는 마리즈 그 하나라고 할 수 있는가.


괴물,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 틈에 숨어있는 괴물이 노리는 것은 증오이다. 생생하고 뜨겁게 끓어넘치는, 영혼을 불태우는 분노와 증오. 그를 위해 영화, ‘깨끗한 고기’, 교묘한 속삭임과 스치는 눈길로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저것 좀 보라고, 저 미움받고 불태워져 마땅한 것이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지 않느냐고, 마땅히 채찍질당하고 얻어맞고 고통받아야 할 혐오스러운 종이 감히 신을 닮은 우리 하얀-인간과 동등한 삶을 살아가려 하지 않느냐고, 저들의 요술이 우리의 신앙과 동급으로 맞먹으려 하지 않느냐고. 없애라고, 짓밟아 부수고 조롱하고 모욕하라고. 먹인다. 모이게 한다. 속살거린다. 저들은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나 강한 혐오는 두려움의 반증이라던가. 누군가를 인간의 범주 밖으로 밀어내는 이들은 그들이 증오하는 이들이 인간임을 잘 알고 있다. 채 인간이 되지 못한 짐승이라고 채찍질하고 걷어차고 눈을 흘기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그들을 두려워한다.


끊임없이 정당화할 이유를 붙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굴복당할 것을 요구받는 존재에게는 짓밟히지 않는 힘이 있다.

p.198 “저들의 공포는 현실이 아니다. 그저 불안과 무능일 뿐이지. 저들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다. 저들의 증오는... 물 탄 위스키 같다. (…) 너희 모두는 증오할 이유가 충분하다. 너와 너희 족속에게 가해진 온갖 악행은? 채찍질당하고 얻어맞고, 사냥당하고 개에게 쫓기고, 저들 손에 그토록 지독하게 고통당한 민족. 너희는 저들을 경멸할 이유가 충분하다. 수백 년간 타락한 저들을 혐오할 이유가. 그 증오는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확실하고 올바르며, 너무나도 강할 것이다!”


앞서 서글프고 제법 타당한 상상, 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혹자는 외계인이니 괴물 또는 악마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어디 있느냐 하겠지만, 글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법과 제도로 꽁꽁 얽매어 사람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일은 얼마나 있을법하냐고 묻고 싶다.

단체로 침대보같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우 몰려다니며 대단한 소명인양 멀쩡히 살아가는 이를 잡아 불태우고 두들겨 패고 목매달아 죽이는 일이, 바로 쳐다보지도 원하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하는, 그런 일은 얼마나 조리있는 일이기에 축제처럼, 유희처럼, 일상처럼 자행되었느냐고 묻고 싶다.

p.39 클랜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퍼뜨린 악령은 살아남아 유색인이 이제 투표를 한다는 이유로 채찍질하고 죽이고, 정부에서 내쫓고, 온갖 학살을 저질러 지금껏 우리 숨통을 죄는 짐 크로법을 시행했다.

p.65 내 생각엔 클랜이 악을 받아들이면, 악이 그들을 먹어 치우는 것이다. 속이 텅 빌 때까지. 그리고 자기가 인간임을 기억 못 하는 허연 악령이 남는다.


존재했던 이들,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은 말한다. 내가 여기 있노라고. 과연 총구를 겨누고 자루를 꼬나쥔 이가 누구일지 생각해보라고. 너의 연약한 살결에, 나와 같은 피가 흐를 몸뚱이와 너는 모욕하고 나는 응답하는 말을 내뱉을 목구멍에서 터져나올 것이 과연 무엇일지 잘, 아주 잘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복수가 두려우면 처음부터 저지르지 않았으면 될 일이 아니었느냐고, 무엇을 위해, 무슨 이유로 우리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없애고자 발버둥을 쳤느냐고. 한 데 모여 눈을 빛내고 입을 벌려 씹어 삼켰느냐고. 보드라운 손과 연약한 발을 대신해 우리를 수족으로 부렸느냐고.

그래서, 이제는, 지금까지, 왜, 무엇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너를 보라고, 누가 ‘우리’의 ‘우리’ 안에서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느냐고, 그것이 누구에게 달렸겠느냐고.


노래와 민담과 전통신앙의 힘, 죽었으되 사라지지 않은 이들의 가호, 진창에 처박혀 빛나는 눈, 뼈의 질감, 짐승의 것들, 사람됨의 증거로 인정받지 못한 것들. 작가는 그를 통해 꺼지지 않은 불씨가 터져오르듯 묻는다. 내가, 우리가, 너와 당신이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흥얼거리듯 묻는다. 조소처럼 건넨다.

p.206 그들이 내게 준다는 것은 권력이다. 지킬 힘. 복수할 힘. 내 동족의 생사를 좌우할 힘. 유색인들이 이런 제안을 받아 본 적 있을까?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언제 있었을까? 우리는 그동안 내내, 인간의 꼴을 한 괴물의 손에 고통당하고 죽어 나가지 않았는가? 우리가 다른 괴물과 계약을 맺는다면 뭐가 다를까? 우리를 그렇게 경멸하고 괴롭힌 이 세상을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을까? 세상이 우리를 구하려고 무엇 하나 해 준 것 없는데, 어째서 손을 들어 그 세상을 구해야 할까?


모든 이유에도 다시금, 나는 여기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당신들과 함께 존재하노라고. 당신이 부수고자 했던 짐승은 신과 같은 존재로 임하노라고.

신의 아들이 이르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누가10:18). 너희는 제 머리의 두건을 보지 못하고 남의 살결을 보는구나. 일상의 악마, 그들이 아이와 여인과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는 꼴을 보아라.

p.225 “쿠 클럭스가 그러니까, 쿠 클럭스 짓거리를 안 하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 있어? (…) 그들은 여전히 출근할까? 아내에게 남편의 의무를 다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름이 돋는다 - 사랑스러운 겁쟁이들을 위한 호러 예찬
배예람 지음 / 참새책방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출판 들녘(참새책방)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좋게 말해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높은 사람, 솔직하게 말해 겁이 많은 사람, 시체말로 쫄보인 사람을 하나만 대시오, 하면 모두가 손을 들고 정답! 하며 내 이름을 외칠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만 더 말하자면, 표지만 보고도 조금 오싹한 느낌에 기어이 엎어두고 며칠을 묵혔습니다. 책날개 그림에 간이 좁쌀만해졌습니다. 누군진 몰라도 책임지세요.

와중에 겁은 겁대로 많으면서 사서 고생을 하는 타입입니다. 네, 지난 주말에도 공포영화에 호러 소설로도 모자라 인터넷 괴담까지 줄줄 찾아보고 늦게까지 불을 끄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세간에서는 이런 걸 스불재,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고 한다지요. 아니 뭐, 근데,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요? 만국의 겁쟁이여, 단결하라.

들어보세요. 이런 사람이 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만국의 겁쟁이라고 했잖아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김씨 쫄보 다나카 쫄보 잭슨 쫄보 다 있을거란 말이죠. 공포영화에서 겁 없는 놈과 소리지르는 놈이 제일 먼저 봉변을 당한다 뭐 그런 클리셰가 있을텐데... 거기에 내가 다시는 이 짓을 하나 봐라! 악을 쓰면서도 기어이 실눈 뜨고 기웃거리는 바람에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인물 1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저 겁보들 꼬라지 좀 보라면서 낄낄대는 이들은 영영 이해하지 못하겠죠. 식은땀을 바가지로 흘리면서도, 졸아붙는 심장을 부여잡으면서도 그 짜릿한 즐거움을 잊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을. 그치만 후자야말로 백점짜리 감상자가 아닌가요. 울어! 하면 네! 하고 펑펑 우는 관객이 좋은 관객이듯이.

원시시대에는 생존에 유리했을 (개중 반은 주체못한 호기심에 끝장났을) 것이고, 현재에는 알아서 숨넘어가는 긴장과 쾌감을 오가며 제 명을 재촉하고 있을 겁쟁이들, 호러마니아들.

p.22 창작자가 의도적으로 설치한 함정에 충실히 빠지고, 숨통을 조여오는 긴장감에 실눈만 겨우 뜬 채로 비명을 지르는 겁쟁이들이야말로, 어쩌면 호러라는 장르를 가장 잘 이해하고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게임, 책, 영화, 댓글 형식의 쪽글까지 다양한 분야와, 묘한 불길함부터 대놓고 비명을 쥐어짜내는 좀비나 반쯤 경탄을 자아내는 외계인, 환상의 크리쳐들까지 차원과 경계를 넘나드는 형태의 대상들로


공포 장르를 즐기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그것이 즐거움으로 남을 수 있는 근원적인 이유는 같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냉정히 말하면 ‘내 일이 아님’에서 오는 안도감이겠죠. 남이사 죽든지 말든지, 싶은 태평한 마음은 아닙니다. 쓰러지는 좀비나 크리쳐에, 원한을 품은 존재에도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도 있는걸요(네, 접니다).

다만 전율과 긴장이 즐거운 시간으로 남기 위해서는 화면을 끄고, 허리를 두드리며 의자에서 일어서거나 책장을 덮는 순간 안전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숨막히는 두려움과 경계심을 내려놓고 지루하기까지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지난 시간을 즐거움으로 남길 수 있습니다.

스크린, 화면, 책장 밖의 현실이 그 안과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더이상 상상과 창작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때부터는 현실이 됩니다.

p.165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모든 흥미롭고 자극적이고 복잡환 사건 뒤에는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것, 우리가 어떤 포지션을 취하든 피해자의 존재만큼은 결코 잊어선 안 된다는 것.


제법 흥행했던 몇몇 영화들을 비롯해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호러, 개중에서도 범죄 스릴러 장르를 거북해하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무서운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왜 무서워하는지, 그것을 자의와 타의 중 어떤 이유로 무서워하는가, 입니다.

그저 무섭구나, 하고 넘기기 전에 그것이 왜 공포의 대상으로 남는지, 왜 그 대상과 힘과 상황을 두려워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동북아 3국으로 묶이는 한중일 문화권에는 왜 그렇게 한을 품은 여성 귀신의 일화가 많은가, 그들은 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나, 그들이 누구를 어떻게 해치는가, 그들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살아서는 그렇지 못했던 이들이 왜 죽어서는, 혹은 초인적 존재의 힘을 업고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는가, 그것을 물어야 합니다.


혹은 경계의 저편, 버려진 장소와 사람의 형태이나 사람이 아니게 된 존재, 이를테면 좀비와 같은 존재들이 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들의 기원을 묻고 공포가 재난의 형태를 띌 때는 이미 무수한 피해자가 존재했음을, 상상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이해할 때, 영화와 게임과 소설 속 이야기를 현실로 맞닥뜨리는 이들이 존재함을 잊지 않고 등 돌리지 않을 때, 비로소 즐거움으로 남을 수 있는 공포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기사로 따지자면 문화와 사건사고 면에 실릴 내용을 가려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p.165 괴담을 읽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겁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괴담 속 일들이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채로 덜덜 떨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밤도 꺼림칙한 불길함과 환상적인 괴생물체, 숫제 뛰어다니기까지 하는 좀비를 상상하며 뒤척거릴 이들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겁을 주려는 (내 기준) 고맙고 악마같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존재하는 겁쟁이들에겐 비 내리고 푹푹 찌는 여름이 한 해의 절정이겠지요.

손끝을 저릿저릿하게 하는 긴장감을 잊지 못해 괜히 머리 한 번 들이밀었다가 비명을 꽥 지르고 아 다시는 안 본다, 이걸 다시 하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하며 오늘 밤도 괜히 침대 밑을 살필 동지들에게, 우리는 영영 변하지 못할 팔자니 즐기기나 합시다.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발을 밀어넣고 목덜미를 문지르며 괴담사이트를 찾아들어가는 사서고생의 달인들아.

근데, 뒤에 있는 사람 누구예요? 이상한 소리 안 들려요? 까드득... 하는...

p.202 겁쟁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겁쟁이인 우리가 좋다. 세상의 모든 겁쟁이 공포 애호가들이 오늘 밤도 덜떨 떨며 잠들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씨의 음악 - 날마다 춤추는 한반도 날씨 이야기
이우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이런 말이 있다. 기상청 체육대회 날에는 항상 비가 온다. 다 헛똑똑이라서 그런가? 생각해봐라. 그게 다 사내행사 불참을 위한 치밀한 계산의 결과다! 그런가하면 이런 말도 있다. 또 속았다. 이놈의 기상청, 이참에 구라청으로 이름 바꿔라. 내가 다시는 믿나봐라!

그러나 기상학의 세계는 자잘한 것들에 울고 웃기엔 너무도 거대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날씨는 대기와, 땅, 햇볕이 만들어내는 음악과도 같기 때문이리라.

지구촌, 연결된 세계... 이제는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표현이 아니더라도, 오늘의 빗방울이 어디서 왔는지, 때맞춰 불어오는 달콤한 공기는, 거대한 눈구름과 살을 에는 바람은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도달하는지... 나와 연결된 세계를 곱씹다보면 나비의 날갯짓 한 번이 태풍을 불러오는 것이 비단 비유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술가들은 자연을, 날씨를 그들 세계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애써왔다. 해서 수많은 걸작이 계절과 날씨와 비와 바람 눈과 흙 따위를 움키듯 생생하게 묘사하려는 노력으로 남지 않았는가. 그 말은 곧 날씨를, 자연을 예술의 언어로 그려낸 감상은 여전히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비슷한 듯 다르게, 끊길 듯 이어지며 찾아오는 계절을 따라 순간의 압도, 휘몰아치고 스쳐지나가는 세계, 날씨를 악보로 옮길 수 있다면, 가늘게 들려오는 선율처럼 그 궤적을 따라갈 수 있다면, 사계는 그저 풍경의 변화가 아니라 거대한 협주곡의 한 장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이에게 날씨는 더이상 존재-외-배경 무언가가 아닌, 춤추고 노래하고 손가락을 두드릴 것을 종용하는 음악과도 같을 것이다. 그런 이에게 세계는 그저 장소가 아니라 거대한 콘서트홀과도 같을 것이다. 경이롭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는 불규칙한 리듬으로 귀를 울리는 빗방울, 벗겨진 땅에서 불어오는 황량한 바람, 지축을 뒤흔드는 태풍과 눈송이의 춤을 섬세하게 덧그린다. 퍽 낭만적인 만남이나 그러면서도 고요한 서재에 앉아 나누는 담소처럼 느긋하고 낭만적인 문장으로 우리의 세계에 가득한 날씨, 그 원인과 성질을 풀어내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잊지 않는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이렇게만 살 수 있을까요.


노래하는 세계, 세계의 음악, 그것이 날씨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선율 하나 울림 하나를 귀기울여 느끼고 들여다볼 수 있다면 한 해는 비발디의 그것 못지 않게 아름답고 낭만적인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보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독자는 이내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이게 정말 음악이 맞는가? 끔찍한 고요와 불협화음, 절멸의 전주곡이 아닌가? 잠깐 멈춰보라고, 저 끝에 있는 이를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날씨가 사람이라 이 못돼먹은 놈! 하고 탓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세상에 나쁜 날씨는 없다. 낯설고 인간의 생존을 어렵게 하는 날씨와 기대를 배반하는 글러먹은 일기예보는 있겠지만, 날씨 그 자체에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다. 날씨는 징벌이 아니고 어떤 은유적 표현도 아니다. 되려 그것은 소름끼치게 정확한 결과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인간과 자연의 배은망덕 과실비율은 100:0인 셈이다.

앞서 말했듯 세계의 음악이 날씨라면,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이 화답하는 움직임 또한 그의 일부일진대,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오페라의 이중창처럼 주고받아야 할 대화가 중간에 뜯겨나가 긴 침묵만이 흐르는 것이다. 응답받지 못한 선율은 어그러지기 시작하고, 점점 더 이질적이고 괴로운 소음을 낸다. 현재의 이상기후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언제까지고 바라보기만 할 수 있다면 허리까지 쌓인 설경과 얼음의 땅에서 살고 싶다고 말해왔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꿈이지만, 이제는 다음 세대에게 만년설과 빙하의 아름다움, 때맞춰 내리는 고마운 비와 기름진 흙내, 가을날 산천을 수놓는 단풍을 말할 수 있을까, 범람하는 강으로 비옥해진 땅, 맑게 갠 하늘의 무지개가 주는 벅찬 감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그러니 결국 저 앞에서 던져버린 고리타분한 수사를 다시금 내밀 수밖에 없다(먼지 후후 불었다. 괜찮다). 사랑하라고. 이 계절 이 날씨, 순식간에 밀려와 세상이라는 무대를 뒤덮는 배경을 사랑하라고, 작은 변화에 귀기울이고 손끝으로 따라가며 즐기라고.

그 끝에 찾아오는 깨달음, 이것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으며 동시에 잃지 않을 수 있으니 쉼표 하나, 미끄러지고 떨리는 음표 하나에 기뻐하고 놀라워하는 동시에 소중함을 잊지 말라. 이런 마음이라면 매일의 기상예보를 다르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렇게. 내일의 박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소 빠르고 잦은 박자 변화가 예상되며, 쿵짝짝, 쿵짝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나, 마들렌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좋아하는 노래, 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좋아하는 가사는 있다. 우스꽝스럽고 조금 눅눅한,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힘을 내보게 하는 그런 가사. 노래의 기원은 시라고 하지 않던가. 아니, 반대였던가. 시가 먼저인가 노래가 먼저인가. 어느 쪽이든 간에 가사는 노래되는 시, 시는 침묵을 멜로디로 하는 가사일테다. 그러니 둘 다 사는 이야기가 될 수 밖에.

뱀발이 길었다. 그래서 좋아한다던 가사가 대체 무엇이냐 묻는다면, “이렇게 우린 웃기지 않는가. 울고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세상에 우린 태어났으니까.” 라고 하겠다. 사는 일은 대개 멋지지 않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데. 많은 경우 고아한 미소를 자아낸다기 보다는 짠한데 웃기고, 자존심 상하고 짜증도 나는 와중에 그 꼬라지가 웃긴, 그런 희극이다.

세상의 끝은 훌쩍임과 함께 찾아온다는데, 아무리 울고 싶어져도 세상이 끝날 지경까지는 아니라 쾅 하는 소리가 아닌 컹, 하고 코먹는 소리와 함께 하루의 끝이 오나보다. 못난 것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웃기다는데, 대체로 만나기만 해도, 거울만 봐도 웃긴 건... 못난 동시에 평범하고, 울고만 있었다면 만날 수 없었던 인연과 웃기는 짬뽕(!)들의 연속이 곧 삶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뭐든 간에 웃다보면 눈물이 난다. 울다 웃으면 어디에 뭐가 난다는데, 웃다 울면 어떻게 되는지는 들은 바가 없다. 허탈해서 웃음이 다 나든, 와중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든, 배를 싸쥐고 웃다 쥐가 날 지경이라 눈물이 나든 웃음 뒤엔 눈물이 있다. 울음의 끝은 웃음이고, 웃다보면 눈꼬리에 물이 맺힌다. 그 둘은 이어져 있다. 다르지 않다. 맞닿아 있다.

세상의 끝이 온다면,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 최소한의 사람됨이 의지 밖의 일로 소멸되는 틈을 타 알아서들 벗어던지는 탓에 배는 빠르게 무너져내리는 날이 온다면, 그렇다면 일상은 제법 익숙한 형태의 오래된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만약에“의 탈을 쓰고 그려내던 추잡한 폭력의 표출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 끈질기게 이어지던 한가닥 희망이나 그 둘이 뒤섞인 형태로.

그러니 사람이 사람 아닌 것이 되고 시체가 산처럼 쌓이는 때가 되더라도 누군가는 차마 살려달라는 이를 저버리지 못하고, 어느 순간 사람의 경계를 넘은 이를 차마 해치지 못한다. 물론 후자의 웃기는 꼬라지, 패기와는 다르게 차창 와이퍼에 머리카락이 집혀 아프다고 난리를 하는 꼴이 큰 몫을 했겠지만.


누군가는 이전과 다르지 않게, 그 와중에도 타인을 사람으로 존중하려는 일말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마치 그가 제게 주어진 물건쯤 된다는 듯, 그의 의지는 제 폭력에 설설 기며 아양을 떠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당연한 듯이.

p.36 곧 인간성이 만료된다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끝내 가야 했던 곳은 대체 어디였을까. 대체 뭘 하고 싶었을까. 누구를 만나려는 거였을까.

또 누군가는 달에 두엇이나 오면 웬일인가 싶을 작은 도서관(이라고 하기엔 창고에 가까운)을 지켜내려 발버둥을 치고, 누군가는 그 꼴에 한숨을 쉬고 진절머리를 내다가도 차마 저버리지 못해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난리를 한다.

버려질 줄 알았던 것이 아주 작은 우연으로 살아남기도 하고, 묵혀둔 기억에서는 곰팡내가 나고, 달라진 위상에 주눅이 들기도 한다. 그게 다 사람의 일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은 자의 말은 죽지 않는다. 이따금 죽은 자는 말을 한다. 아직 죽지 않은 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를 잊지 말라고.


그리하여 소멸에의 요구는 소멸의 때를 늦추는 힘이 있다. 내가 지킨 것을 영영 해칠 수 없도록 잿더미로 만들 것을 요구하는, 부재하는 이의 말은, 발화가 종료됨으로서 먼저 부재하게 된 그 말은 생생하게 남아 등을 떠민다. 부재는 빈자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없는 것은 힘이 세다.

필연적으로 도래할 존재의 소멸은 존재하는 시간을 슬프게 한다. 그래서 한 사람 분의 축적된 시간을 잃는 죽음은 도서관이 불타는 것과 같이 커다란 의미를 갖는지도 모른다. 상실은 아프고 부재는 서러우나, 남은 이의 삶은 여전히 얼렁뚱땅 이어진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지. 살아남아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웃기는 꼬라지를 이어갈, 남은 자의 시간을 살아낼 의무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남은 자는 있는 힘껏 부재를 완성해낼 의무가 있다. 애도는, 충분히 기억하고 떠나보내는 일은, 그 시작일 뿐이다.

p.125 만드는 일과 지키는 일 중 전자가 더 중요하고 어렵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건 착시다. 인간을 만드는 것까지야 뭐 대충 아무나 최소한 두 사람만 모이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기껏 만들어놓은 한 인간이 죽지 않게 돌보아 주는 일은 누구한테나 어려운 것처럼...

p.126 “세네갈? 그 아프리카 세네갈?” “그럼 경기도 의왕시 세네갈구 세네갈동이겠냐.”


앞서 말했듯이 사는 일은 웃기다. 정확히는, 살아가는 꼬라지가 웃기다. 사랑한다며? 믿는다며? 근데 왜 너는 과자고 나는 감자냐? 처럼. 평범한 이의 쫌(좀이 아니다) 치사하고 쪼잔하고 어이없는데, 황당하기까지 한 일도 구겨진 잔돈마냥 어찌저찌 쑤셔넣어가며 이어진다. 다시 한 번,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스꽝스럽다.

그와 동시에 살아내는 일, 처참한 수준의 발버둥이 우스운 이유는 그 버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는 일은 무엇 하나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토록 필사적이고, 그를 알고 있기에 웃다 울고, 울다 웃을 수 있다.

지는(!) 과자 나는 감자라고 뻔뻔하게 선언해도, 느닷없는 봉변에 환장의 3인가구가 되어도, 안그래도 맘에 안 들던 그 애가 쉽게 죽지 않겠다고 버텨내고, 주는 것 없이 내놓기만 하라는 작태에 짜증이 치밀어올라도 같은 사람이라 차마 모를 수 없는 타인의 심정이 신경을 거스르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산다.


차마, 차마 외면할 수 없음이, 오직 그 이해의 가능성과 웃기는 꼬라지가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한다. 찌질하고, 연약하고, 웃기기 짝이 없는 인간종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건 바로 그 실낱같은 가능성 덕택이라고 믿고 있다. 다시 한번, 못난 것들은 얼굴만 봐도 즐거우니 오늘도 컹, 소리와 함께 하루가 끝날 것이고 내일도 환장의 호흡일 것이다. 사는 일이 그렇다.

p.201 마들렌은 나의 과자 친구. 나는 마들렌의 감자 친구. 어느 날 마들렌은 이제부터 여자 친구 대신 과자 친구라 불러달라고 말했고, 자기도 나를 여자 친구 대신 감자 친구라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자기는 왜 귀엽게 과자 친구고 나는 왜 텁텁하게 감자 친구인가?

p.262 물론 한동희가 믿는 것처럼 내가 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 듯싶었다. 나를 신이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면, 언젠가 자기에게 죽으라 했던 이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신에게 저항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신은 나한테 죽으라고 했지만 그렇게 순순히 죽지는 않겠다는 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 :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지음, 김정훈 옮김 / 호두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어 번역본을 오래도록 기다려왔어요. 출판사의 첫 책이라니 기쁘고 반갑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