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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 의사 엄마가 기록한 정신질환자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법
김현아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평점 :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많은 경우 가족, 그러니까 생애 초기 혹은 혼인 이후 삶의 대부분을 한 집에서 공유하며 살아가는 원가족의 문제는 자신의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자식 간의 관계는 유난히 그러하다.
상대의 고통이, 생활 전부에 결부되는 그것은 오롯이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기에 공명하듯 고통스럽다. 그러나 동시에 서로가 별개의 사람이기에 각자의 고통이 맞물려 증폭되듯 고통의 범위와 종류가 공유되지 못해 각자의 자리에서 고통스러워한다.
유명인의 사례와 각종 미디어, 통계로 양극성장애는 대중에게 제법 잘 알려진 정신질환에 속한다. 그러나 실상이 어떠한지, 당사자와 그 가족의 삶은 얼마나 위태롭고 고통스러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제각기 살아가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낯설지 않은 이름, 그러나 너무도 낯선 환자 당사자와 그 가족의 삶. 이런 경우에 일반 대중으로서의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의대 교수 부모, 아마도 화목한 가정, 나름의 고민은 있겠으나 비교적 무탈하게 잘 자란 줄만 알았던 딸이 수능을 고작 며칠 앞두고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만하면 다행이려니, 싶었으나 그 날이 곧 첫 번째 자살시도를 한 날이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별 일 아니겠지. 많은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저자 또한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마주한 실상이 그렇지 못했다. 또다시 자살을 시도했고, 처방약은 부작용이 심했고, 파괴적인 행동을 반복하다가도 무기력에 겨우 살아만 있기를 반복했다.
p.127 어떤 난치 질환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이 나오면 사회의 큰 관심사로 떠오른다. 그런데 충분한 데이터가 축적되기 전에 그 효능이 과장되게 알려지면서 많은 문제가 빚어지는 것은 (…) 누구보다 잘 아는 부모이더라도 자식이 이런 상황에 몰리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삶은 현실이다. 이 책의 이름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동화가 아니다. 누군가의 인생은 그린 듯이 감동적인 역경 극복 수기가 아니다.
그렇기에 의학적 지식이 탄탄하고 재정적, 정서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 제공이 가능한, 효과적인 치료를 탐색할 자원이 풍부한 가족-보호자가 있음에도 수차례 넘어지고 좌절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정신질환은 죄가 아니고 마찬가지로 벌도 아니기에. 굳이 따지자면 던진 줄도 몰랐던 돌로 죽이고, 스치는 바람에도 죽어버리는 게 사람이라서. 그뿐이다.
p.222 그러나 원래 인생은 잔혹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기는 패보다는 지는 패를 잡을 일이 훨씬 더 많다. 누군가가 항상 이기는 패만 잡는 것처럼 자랑을 일삼는 것을 보면 인생을 반도 모르는 덜 떨어진 사람이라고 속으로 비웃어도 된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다만 정신질환은 유전이나 외상, 생물학적 기전으로 발병하기도 하지만 다른 질병이 그러하듯 환경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개인의 통제•관리를 넘어서는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직업을 갖는 것은 단순한 생계 유지 외의 의미가 있다. 정해진 시간에 규칙에 따른 활동을 반복 수행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음으로서 자기효능감을 고취시키고 개인을 사회로부터 유리되지 않게끔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적당함’이 없다. 누구도 버티기 힘든 조건이 기본값이다. 사람을 갈아넣어야 유지되는 곳에서는 어떤 건강한 사람도 버터낼 수 없다.
p.266 정신질환 환자에게도 일은 매우 중요하다. 비록 장시간은 어렵더라도 생활의 흐름을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을 하는 것은 정신질환자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노동 시장은 환자가 아닌 사람들도 버텨내기 힘든 '갈아 부수는' 형태의 작업장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사회가 개인의 안녕에 적대적이고 자아의 주체성과 양립 불가능한 조건을 강요할 때, 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할 때, 어떤 제도와 시스템도 나를 부당한 위험에서 보호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 때 결국 개인에게 남는 것은 절망밖에 없다.
상처에서, 물러섬에서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지 않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저항에 의미가 있다는 최소한의 믿음을 저버리는 사회는 결코 안전하지도, 소속감을 주지도 못한다.
결국 사회는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개인과 유대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 더이상 원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효용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사회에서 개인이 ‘제정신’으로 살아남기를 요구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지 않은가.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아니, 살아남는 일부터가 쉽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조건이 가혹하기 때문에,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안의 괴로움이 스스로를 집어삼키기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든, 그 어떤 고통도 무시해도 좋을 만큼 가볍지 않다는 것만은 같다.
오늘도, 아마도 너무도 많은 곳에 힘들고 버거운 세상에 다치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고, 그 곁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 멋지게 날아오르지 못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를, 살아만 주기를. 언젠가 꼭 한 번만이라도 살아있기를 잘 했다고 생각해주기를. 그렇게 바라면서.
수차례 거꾸러지고 부서지더라도, 이 또한 삶임을 잊지 않기를, 살아주기를. 그저 그런 마음으로 읽기를. 이렇게도, 살아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