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페어리 테일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속았다. 또 속았습니다. “스티븐 킹”과 “동화”가 나란히 붙어있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동화는 동화인데, 동화가 맞긴 한데...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계로의 신나는 모험이 아니라 잔혹동화, 전설의 원형에 가까운 공포체험이다.
그럼 그렇지, 분명 시작부터 누차 힌트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혹해 홀랑 넘어간 내 잘못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실수는 다음 내용이 궁금해 밤을 지새울 줄 알면서도 마지막 권까지 쌓아놓지 않고 냅다 시작해버린 것이다. 찰리는? 레이더는? 친절한, 그러나 저주받아 죽어가는 크리쳐들은? 이 세계는? 대체 어떻게 되는거지?
물음표만 가득 띄우다 결국 또 밤을 샜다. 읽고 새나 못 읽고 새나 밤을 새는 건 마찬가지인데, 결국 궁금해하다 날 밝았다. 억울하다.
이세계로 이어지는 우물, 그곳에는 동화 속 세계가 있고, 어딘가에는 황금과 보물이 넘쳐난다, 고 한다. 분명 그랬는데, 어딘가 좀 이상하다. 변형된 생물들, 불길한 그림자, 절망과 비탄에 빠져 어딘가로 쫓기는 듯한 이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조심해”. 이쯤 되면 이게 어딜 봐서 동화냐. 동화의 ‘ㄷ’에도 못 미치지 않느냐 따져물을 수 있겠다. 그러나 전설, 민담, 금기가 당의정처럼 달콤한 변형을 껴입은 것이 동화 아닌가.
동화세계에 떨어진 이들에게 가장 우선되는 규칙이 있다. 현실을 아님을 기억하는 것. 언제나 친절하고 용감해야 해, 그리고 잊지 마. 환상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단다. 닫히기 전에, 시간이 다하기 전에 돌아서야 해.
반드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단다. 영영 먼 곳으로 사라지고 싶지 않다면, 아가리를 쩍 벌린 맹수의 뱃속에 영원히 갇혀 환상세계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다면. 모든 이야기의 독자를 위한 첫번째 규칙이다. 기억해, 네가 엿보는 그곳이 현실이 아님을.
p.392 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쓰는 언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들은 것이 일상적인 미국식 영어는 아니었디만 고어도 아니었다. (...) 살짝 현대화된 동화에서 접할 수 있음 직한 영어였다. 그런가 하면 나도 이상했다. (...) 내가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스티븐 킹에게는 그간 수많은 크리쳐와 그보다 섬뜩한 이야기로 독자를 몰아세운 전적이 무수하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It』 이나 『샤이닝』, 『미저리』 처럼 뼛속 깊이 얼어붙게 만드는 공포가 아니라 『나중에』 처럼 상실과 용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하지 않는가. 누구에게도 잘못을 물을 수 없어 각자 자기를 탓하기에 바쁜, 먼저 떠나간 사랑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이들.
결국 이 작품의 주제도 크게는 위로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살아아야 하고, 회복될 수 있으며, 슬픔과 그리움으로 가득한 삶이더라도 또다시 누군가를 돕기 위해 손을 내밀 수 있다고 말하는 다정한 위로.
다정하고 정의로운 주인공의 이야기는 늘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사랑이 있고 돌아설 수 있어 언제든 용기를 낼 수 있다고.
p.188 내 해묵은 분노가 많이 옅어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공포와 상실은 잔재를 남긴다.
p.197 “그렇다면 넌는 지금 성인으로 추대되려고 기를 쓰고 있는 거냐 아니먄 뭔가에 대해 속죄를 하고 있는 거냐? (...) 시간이 강물이지. 인생은 흐르는 강물 위에 서 있는 다리고.”
p.303 그리고는 잠시 후에 끙끙대며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괜찮아.” 나도 그녀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녀에게서 희미하지만 좋은 냄새가 났다. 생각해보니 양귀비 냄새였다. 내가 꺼이꺼이 흐느끼는 동안 그녀는 나를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나 재차 말했듯 문제는 작가다. 위로를 하기는 하는데 자꾸 겁을 줘요, 이 사람이... 환상의 나라로 보내주기는 하는데 여행이나 탐험이 아니라 ‘스스로 불러온 재앙’,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어쩐지 사기에 가까운’ 따위의 수식어가 붙어야 할 것만 같다고요.
앞서 모든 이야기의 첫 번째 규칙을 말했다. 그렇다면 두번째는, 네가 누구인지를 기억할 것. 1권 말미에 와서는 결국 그 자신의 현실을 잊어버린 듯한 주인공 찰리 리드가 이 규칙들을 지킬 수 있을까? 아니, 기억할 수 있을까?
이 동화가 잔혹 동화, 괴담이 될지 정석 루트를 따라 도로시처럼 랄랄라 노래를 부르게 될지는 다음 권의 본격적인 모험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겁좀 그만 주면 좋겠다... 잠은 재워줘요 제발...
p. 454 나비 뗴가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으며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우리 위를 날아갔고, 나는 그들의 날개가 일으킨 바람을 느끼며 마침내 이 다른 세상의 현실을, 엠피스의 현실을 완전하게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있었던 곳이 가상의 세계였다. 여기가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