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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단어들의 지도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어원의 지적 여정
데버라 워런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평점 :
*출판사 윌북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외국어, 개중에서도 라틴어에 뿌리를 둔 언어를 공부하다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대체 이 근본도 모를 단어는 어디서 왔기에 맥락도 없이 알아서 이해합쇼... 라는 듯이 덜렁 나타난 건지 의아할 때 말이다.
이따금 뜻하지 않게 마주친 지인처럼 어딘지 익숙한 꼴을 보고 반짝 반가워지기도 하나 대체로 들입다 외우자니 억울한 마음이 들 때도 많다.
그래서 대체 어디서 온건데! 하고 고함을 꽥 질러봤자 나도? 몰라?? 배째라 배째 투로 뻔뻔한 철자를 보고 있노라면 한국어로 세계통일이 됐어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원한을 중얼거리고야 마는 것이다... 나만 그래요? 아니잖아.
대중의 발, Bus는 어쩌다 생긴 단어인가? "eat humble pie", “잘못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과 파이를 먹는 것에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대체 빵집에서는 무슨 요술을 부리기에 다른 곳에서는 잘만 ‘열둘’인 'dozen'이 'baker'만 붙으면 ‘열셋’으로 둔갑하는가?
denim은 또 어떤가? 명주실로 짠 serge는 영어도 아니고 독어도 아니고... 대체 어느 맥락에서 튀어나온 단어란 말인가? 미혼 여성을 뜻하는 법률 용어 spinster는 왜 난데없이 남의 직업을 실 잣는 사람으로 만드는가?
p.39 bus는 처음에 ’bus라고 썼습니다. 라틴어 omnibus를 줄여 부른 말이었거든요. 19세기 말, 영국 시골에서 밭일 대신 공장에 다니게 된 사람들이 최초로 자동차 형태의 버스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p.41 eat humble pie(잘못을 달게 인정하다)라는 표현은 언뜻 연상되는 것과는 다른 유래를 지닙니다. 농민들은 예전에 ‘umble’로 만든 파이를 먹었습니다. umble이란 사냥으로 잡은 짐승의 내장으로, 고급 음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 세월이 흐르면서 런던 동부를 제외한 영국 전역에서 h 소리를 내게 됐지만, umble은 영어에서 아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p.45 빵이란 워낙 중요한 생필품이어서 13세기에는 (...) 빵 한 덩이의 가겨고가 무게를 엄격히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빵집 주인들은 빵을 팔 때 혹시라도 양이 모자라 법에 걸릴까 봐 하나씩 더 얹어주곤 했는데, 그래서 'baker's dozen'이라고 하면 ‘열둘’이 아닌 ‘열셋’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p.112 denim은 ‘프랑스 비단’을 뜻하는 ‘serge de Nimes’에서 유래했습니다. Nimes은 프랑스 남부의 도시로, 로마 유적지가 많아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죠. 세르주, 즉 serge는 명주실로 짠 천의 일종으로, 어원은 ‘비단(silk)’을 뜻하는 라틴어 sericus입니다.
p,208 spinster는 ‘실 잣는 여자’라는 뜻으로, 독신 여성이 생계를 꾸리기 위해 흔히 갖는 직업이었죠. 그런데 그것이 나이와 관계 없이 ’미혼 여성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가 되기에 이릅니다.
시작과 맥락을 모르니 이해할 리가 없다. 이 황당함과 막막함의 연쇄를 끊어주는 것, 흩어진 지식을 하나의 큰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이 어원의 역사이다. 말은 사람이 만들고 쓴다. 사람의 역사가 곧 언어의 역사이며, 아무 맥락 없이 갑자기 나타나 이어지는 단어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금 더 알면, 모르던 것을 알게 되면 모르는 새 흘려듣던 말을 이해하고, 자잘한 농담과 문화적 배경이 있는 은유를 이해할 수 있다. 수많은 고전 문학이 어째서 그토록 호소력을 갖는지, 낯설기만 한 문법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된다.
누가 알겠는가. 사인, 코사인, 탄젠트를 중얼거리며 외우느라 바빴던 때에 그 어원을 알았더라면 한 문제라도 더 맞았을지... 멋지지 않은가. 검은 건 글씨요 흰 건 종이인 암기의 나열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역사와 문화, 삶의 줄기를 짚어낸다는 것은.
p.57 탄젠트는 ‘건드리다’를 뜻하는 라틴어 tango에서 왔고, 원래 ‘접선’을 의미하죠. 마지막으로 사인은 ‘곡선, 우묵하게 들어간 곳’을 뜻하는 라틴어 sinus에서 따온 것입니다.
배움은 세계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알거나 모르거나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나의 세계가 달라질 수는 있다. 그뿐인가? 기존의 세계가 아닌 전혀 낯선 세계에서도 덜 당황하고 더 많은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단어는, 말은 단순히 그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 그 단어가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동안 사용해온 이들의 문화, 먹고 자고 입고 웃고 사고파는 모든 시대의 풍경이 담긴다. 어원의 줄기를 따라가는 한, 우리의 여행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 수 있는 셈이다. 즐겁지 아니한가. (듀**고가 아니더라도!)
p.12 ‘어원=진화’입니다. 다시 말해, 언어는 돌연변이의 연속입니다. 진화가 그렇듯이, 이 책도 정해진 목표가 없습니다. 단어가 가는 길을 누가 알겠어요? 그리고 진화가 그렇듯이, 저도 어원 이야기를 할 때 가끔 횡설수설합니다(참고로 ‘횡설수설하다’를 뜻하는 meander는 터키의 구불구불한 강 이름에서 왔어요).
p.321 단어란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무의미한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숨소리 한번 내는 것과 다를 게 없죠. 그러나 단어는 곧 역사입니다. (...)단어는 스냅사진이 아니라 천년짜리 영상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나아가고 있습니다. 언어는 멈추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해도 다 할 수 없는 게 ‘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