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노피에 매달린 말들 - 톨게이트 투쟁 그 후, 불안정노동의 실제
기선 외 지음, 치명타 그림, 전주희 해제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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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혹 시장은 공정하며 인간은 이성적이고, 딱 문제없이 돌아가는 세상이라 믿는가? 비록 “조금 부족한” 점이 있을지언정 노사관계는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기업에게는 무한한 이유를 추구할 자격이 있으며 노동계약은 완전히 자유로운 두 주체의 자발적이고 합리적인 계약이라고 믿는가?

사람의 능력에는 차등이 있으니 마땅히 그 대우에도 차등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가? 이를테면, 당연히 노력하고 고생한, 젊고 힘세고 고학력이며 “정상”인 내가. 저 못 배우고 나이 들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그들은 “떼를 써서” 부당하게 좋은 대우를 요구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세요. 나가. 너같은 물건이랑 같이 쓸 사회 없어. 당신이 당연하게 밀어내고 지워낸 이들에게 떠받들려 유지되는 “정상적인” 세상 같은 건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테니 지구 밖으로 썩 나가.


협잡.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이 없다. 계약해지? 효율적인 인력 관리? 경영의 일환? 다 헛소리다. 사측의 행보에는 협잡, 비리, 공갈협박, 폭력, 무엇 하나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옳네 싫으면 소송을 하네 어쩌네 뻔뻔하게 윽박질렀다.

왜?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법이, 사회가 힘 있고 돈 있는 자의 편이라고 생각하니까. 우대도 필요없고 공정하게 대우하라 온 몸으로 외치는 이들에게 눈쌀이나 찌푸리고 “좋은 말”로 “점잖게”, “고용주 사정도 생각하라”는 이들이 거리에 차고 넘칠 줄 아니까.

여성, 장애인, 탈북민, 대학졸업자가 아닌, 아줌마, 육체노동자니까. 천여 명의 밥줄, 단숨에 틀어막아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테니까. 누구도 그들과 함께하지 않을테니까. 그들쯤이야 대꾸 한 번 못 하고 고분고분 기어들어왔다 쉽사리 사라질테니까.


전부 틀렸다. 단 하나도 맞지 않았다. 권력 앞에, 돈 앞에 정의 따위는 힘이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측에, 가해자에게는 없고 투쟁을 결심한 이들에게는 있었던 것, 그것이 정의고 신념이다.

부당함에 침묵하면 나도, 내 다음도, 내 옆의 이들도 소리없이 무너질 것이라는, 그런 믿음. 이것이 옳기에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p.68 다른 일보다 그 두 경험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내가 뭘 해주지를 못할 때. 갈 수조차 없고 무얼 어떻게 해줄 수가 없을 때. (…) 정말 투쟁이 힘든 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이구나. 내가 하찮은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이 자꾸 들게 하니까.

p.244 사업장에서는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서, 다른 조건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의 부담은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 그리고 이들을 구분 짓고 서로를 배척하도록 만들어서 동료가 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이것이 영웅담에 불과하면, 모든 사람이 ”사이좋게“ 지냈다는 행복한 이야기면 얼마나 좋겠느냐만은... 누차 말해왔듯 이 또한 사람의 일이다.

사람의 현실은 때 되면 배가 고프고 화장실에 가야하며, 다치면 아프고 더운 날엔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쏜살같이 달리는 쇳덩이에 목숨이 위험하고 쉽게 부서지고 죽는다. 그것이 사람이다. 악을 쓰고 드러누우며 구질구질하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의 현실은 경제법칙과 손익계산으로 설명될 수 없다. 사람은 숫자가 아니다. 사람은 숨만 붙여놓는다고, 모멸과 착취를 돈과 함께 쥐어준다고 기쁘게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의 존엄을 저울질하는 권력에 기쁘게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손을 내밀 수 있다. 사람은 함께할 수 있다. 사람은 취약성이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럴 수 있다.

이것을 모른다면 당신의 삶은 당신 스스로가 지워버린 누군가에 의해 영위되고 있다. 알든 모르든, 당신의 삶은 당신 하나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자의 세계는 함께 살아가는 타인의 세계인 까닭이다.

p.93 우리가 그랬어요. 혹시 서로 다르게 가고 그래도 상대방을 비난하지는 말자, 각자 사정이 다 다르지 않냐. 이해해 주자. 비난하지는 말자. 그랬어요.

p.121 노동의 가치는 경제적인 것에만 있지 않다. 이들은 지금 '제대로 된' 일을 원한다. '제대로 된' 일이란 존중받는 노동일 것이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산더미같고 현실은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오히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이나, 이들은 안다. 연대의 경험이, 이들이 쟁취한 것이 또다른 폭력 앞에 맞서는 힘이 된다는 것을. 언제 어디에서든, 누군가는 또다시 함께한다는 것을. 부당하게 대우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믿는 자는 끝까지 지지 않는다는 것을.

p.33 나중에는 내가 그랬어. 소장도 무섭지 않고, 아무도 안 무섭다고. 왜? 그 사람들은 1년 있다가 발령 나서 갈 사람들이야. 나는 여기 20년 다닐 사람이야. 나는 주인 의식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야. 누가 와도 나는 당당하다 그랬어요.

p.373 그럴 때면 이야기해요. 화장실 청소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라 입사할 때부터 해온 우리의 일이 있는데도 괴롭히려고 전혀 다른 일을 시킨다는 것, 우린 또 그걸 하고 있다는 것, 딱 거기까지다. 그리고 우리도 괴롭힘과 부당한 일에는 맞서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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