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도둑 - 예술, 범죄, 사랑 그리고 욕망에 관한 위험하고 매혹적인 이야기
마이클 핀클 지음, 염지선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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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역사상 전무후무한 규모의 도둑이 있다. 본격적인 절도 행위만 해도 최소 유럽 7개국, 약 200회에 걸쳐 300점 이상의 "물건"을 훔쳤고, 공식적인 자백만 해도 100건 이상이다. 도난품들의 가치는 가장 과소평가된 것만으로도 3,000만 달러(약 400억 원). 도저히 개인이 저질렀다고 믿기 어려운 규모다. 이 정도면 전문지식을 가진 범죄집단의 소행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세간을 경악케 한 범죄 행각에 최초로 선고된 형량은 4년. 규모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가벼운 처벌은 그의 죄목이 강도가 아닌 절도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가능한, 적어도 통제불능한 절도광으로 변모하기 전에는, "물건"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려 애썼다. "장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동기는 단 하나,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마음껏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훔친 것은 예술품, 그것도 엄청난 가치를 인정받은 각국 박물관의 소장품이었다. 그는 "지극한 심미안"으로 선정한 목표물들을 "감옥"에서 구해냈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작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는 사람"이라 칭했다. 금전적 이득이 아닌, 오로지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p.36 "박물관은 예술의 감옥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북적이고 시끄러우며 관람 시간도 정해져 있고 자리도 불편하다. 조용히 생각하거나 쉴 만한 장소도 없다"


죄과를 논하기 전에, 예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그림, 조각, 극도로 정교하게 세공된 공예품을 보고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살아있는 동안 딱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그 앞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마음을 빼앗겨 온 세계가 감동으로 차오르는 감각을 알고 있다면, 당신 또한 "도둑"에 공감하고도 남을지 모른다. 나 역시 도난된 예술품를 설명하는 장면마다 마치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그려지는 묘사에 대체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헷갈릴 정도였으니.

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이 사건에 얽힌 이는 최소 셋. 피고 본인과 그의 연인, 그리고 어머니.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가담하고, 묵인했으며, 부추겼다. 피고, 브라이트비저는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살아있는 예술, 그의 연인과 함께하는 낙원인 다락방에 처박힌 자신을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여겼다. 비록 '행복의 완성'은 "아름다운 예술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럽혀진 절도품"이라 회고했지만.

p.152 브라이트비저는 산업혁명 이후 엔진과 전기의 발명, 그리고 대량 생산 시스템 덕분에 사람들의 삶이 수월해졌을지 몰라도 세상은 점차 보기 흉해졌고 (...) 기계가 세상을 점령하기 직전의 시기에 인류 문명이 이미 아름다움과 기술 면에서 최대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기의 물건과 작품을 훔친다.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가지만, 한적한 마을의 작은 다락에서만은 멈추기를 희망한다.


앞서 말한 동조자, 모친은 아들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수집품"을 몽땅 내다버렸다. 그의 행동을 무분별한 예술품 파괴요 그 작품들의 가치도 모르는 무지한 행동이라 비난할 수 있을까? 평생에 걸친 회피의 대가는 차치하더라도, 여기서 다시금 예술의 가치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처분" 전후로 여러 사람에게 단순한 잡동사니로 간주된 것은 의외로 합리적인 행동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235-6의 "활용례"를 보라).

시작이야 유년기의 결핍이었든 잘못 자란 싹이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그는 극도의 이기심과 자아도취로 수많은 이들의 '감동'을 빼앗았으며 주체없는 절도와 수집 강박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작품들 중 일부는 영영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그것은 파손이 아닌 파괴였다. 전자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남기지만, 후자는 영혼이랄지 존중받아 마땅할 정수가 깡그리 무시되었기 때문에.

예술의 가치와 감상의 권리가 이렇게까지 혼돈 속에 뒤엉킨 적이 없었다. 그의 주장처럼 그간의 절도는 범죄가 아니라 구출에 불과했나? 도난과 경매로 이어져온 예술품 거래의 역사적 상례에 한 발 걸쳤을 뿐인가? 예술은 소유될 수 있는가? 온몸으로 감동을 느끼는 것과 "물건" 자체의 가치는 별개의 것으로 논해져야 하는가?

p.198 한때는 아름다움을 숭배하며 작품 하나하나를 귀한 손님처럼 대하던 브라이트비저였지만, 이때부터는 마치 사재기를 하듯 그저 무엇이든 끌어모으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 한때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실 하나를 따온 것 같던 두 사람의 다락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쓰레기장이 되었다. 끝도 없이 물건이 줄지어 들어올 뿐인.


그를 수사한 예술품범죄수사관은 "박물관은 속세의 교회나 마찬가지라서 이런 곳에서 물건을 훔치는 일은 신성 모독이나 다름없다"고, 피해 박물관장은 "금전적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지닌 의미 자체, 그리고 물건과 장소 사이의 맥락"이라고 말했다.

읽기 전, "재미나고 요상하고 황홀한" 이야기라는 평을 들은 바가 있다. 과연 그랬다. 도둑과 수집가, 탐닉과 집착, 낭만과 광기를 오가며 빠져나갈 길 없는 파국으로 달려가는 이야기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부디 박물관에서 황홀하게 반짝이는 얼굴로 만날 수 있기를.

p.86 사실 박물관 보안에는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박물관은 작품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유하기 위해 존재하며 관람객은 거창한 보안 장치의 방해 없이 가능한 한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물관 절도 사건을 거의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있다. 작품을 저장고에 넣고 문을 잠근 뒤 무장 경비를 세우면 된다. 하지만 이러면 당연히 박물관도 사라진다. 박물관이 아니라 은행이 된다.

p.249 오래된 예술 작품은 시간 여행자 같은 존재라서 다락은 그저 정류장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훔친 작품들은 브라이트비저보다 세상에 더 오래 머물 것이다. "저는 잠시 맡아두었을 뿐입니다." 브라이트비저는 훔친 물건을 모두 돌려줄 계획이었다고 덧붙인다. "10년이나 15년, 20년쯤 지나서요." 그렇게 작품들은 여행을 계속할 계획이었다.


*도서제공: 생각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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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을 때까지 기다려
오한기 외 지음 / 비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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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 식간 허기를 달래거나 식후 마무리를 위해 조금씩 먹는 음식. 대체로 단 맛에 치중되어 요즘에 와서는 식사와는 별 관계 없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하는 그것, 에 의미를 두었던 게 언제적인가? 해가 갈수록 이전부터 썩 즐기지 않던 단맛이 숫제 고역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이제는 있어도 그다지, 없어도 그만인 무언가로 여기게 되지 않았나.

이러나 저러나 인간사에 구복이 반이라. 맛의 즐거움, 맛으로 이어지는 기억은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다. 음미하듯 가만히 입안에 굴리다보면 마음이 술렁이고 묻어둔 이야기를 툭, 내뱉게 되지 않는가.

p.125 너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자신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저 보통 수준의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 사실과 매 순간 맞대면서 살아갈 자신은 없다.

p.195 비로소 생각났다. 나는 자주 어머니의 속됨을 비꼬았고, 어머니는 내 다리를 비꼬았던 시절이. 나는 그 긴장감이 싫었다. 무엇보다 불공정하다고 생 각했다. 속됨은 수정이 가능하지만 다리는 내 의사와 관계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후에 알았다. 못된 것도, 이상한 성격도 절뚝거리는 다리처럼 타고난다는 걸.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알아도 바꿀 수 없다.


당황과 황당 그리고 충격, 미묘한 슬픔과 애증 비슷한 것을 지나 도달한 곳에서 독자는 해묵은 상처, 시간에 기대어 익어가는 마음, 미뤄왔던 끝, 어쩌면 뜻밖의 선택지를 마주할지 모른다. 보기 좋은 모양새 아래, 내내 모르는 척 미뤄뒀던 것을, 혀가 아린 단맛 뒤에 슬그머니 치고 올라오는 시큼하고 씁씁한 맛을, 입 안을 날카롭게 긁어내리는 단면을.

결국엔, 이를테면, 디저트는 추가제공 같은 존재다. 무심코 지나쳐버릴지도 모를, 한 번 더 주어진 기회같은 것이다. 어쩌면 즐거움을 위해, 살며시 딛고 건너가는 디딤돌처럼, 가끔은 눈이 번쩍 뜨이는 충격을 위해. 이유야 어쨌건 모양새 자체는 사랑스럽지 않은가.

p.91 먹혀서 죽는 게 두려운 건 아니었어. 젤리가 되기 전엔 미처 몰랐어, 사람이 이렇게 커다란 줄은. (...) 그저 조금만 더 살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작고, 금방 먹힌다 해도 난 지금이 좋아.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 이런 태도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p.116 그런데 젤리는 달콤하고, 사랑스럽잖아. 떠올리면 기분 좋아지고. 게다가 빛을 받으면 투명해져. 나는 그렇게 투명하고 가뿐하게 살아본 적이 잘 없어서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어. 빛 아래에선 투명하게 빛났다가 빛이 사라지면 다시 어두워지고, 빛이 투과하는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투과하진 않고, 그런 점도 매력적이었어. 사람 마음 같기도 하고.


쓴 사람도 주제도 내용도 제각기인 다섯 편의 이야기에서, 어쩌면 모두가 같은 것을 묻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알지 못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잘 아는 삶에 기꺼이 잠겨들 수 있습니까? 어느 노랫말이 그러했듯 "내가 날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모르지 않습니까.

파삭, 하고 부서지는 것 아래를. 무섭지 않으냐고, 들여다보고 싶지 않으냐고, 시고 쓰고 떫지 않냐고, 오래도록 다문 입이 쩍 벌어지고 베어문 맛이 달기만 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고. 감당할 수 있습니까? 통증에 가까운 맛에 속을 게워내고 도망치듯 떠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p.148 단맛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함께 밥을 먹은 후 디저트를 먹기 위해 그런 장소들을 찾아다니던 게 즐거울 때도 있었다. 디저트 배는 따로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히히덕거렸지만, 사실은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그때는 우리가 조금 더 오래, 혹은 자주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그런 날들이 계속될 거라고도 여겼다.

p.151 흔들리지 않고 고요한 눈을 보면서 나는 선영은 정말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믿을까, 하는 의아한 마음이 들면서도 어쩐지 불편해졌다. (...) 우리가 절교했던 이유도 어쩌면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선영과 내가 연주를 잘 몰랐던 것처럼, 선영도 나도 서로를 모른다고, 이제는 정말 다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디저트의 본질은 이전의 것을 지우고 새로이 인상을 남기는 데에 있다. 그것이 들척지근하게 들러붙는 맛이든, 상큼하게 코끝에 맴도는 향이든, 무엇이든 간에. 단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 위해 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섯 명의 작가가 각기 초콜릿, 이스파한, 젤리, 박하사탕, 슈톨렌을 소재로 한 단편 다섯 편을 모았다. 소재로 불려온 음식들에 달콤하니 귀여운 내용을 짐작했다가는 필경 치미는 무언가에 입귀를 비틀고 질끈, 눈을 감아버리리라 장담한다. 어쩌면... 비명과 함께 덮어버릴 수도 있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p.171 괜찮아. 선영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막 녹기 시작했을 뿐이야. 우리는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선 채 가만히 서로의 혀를 바라보았다.

p.208 "간암이 꼭 한약 먹는다고 더 심해지고 그런 건 아니래. 속설이라더구나. 해나가 많이 알아봤어. 그렇다고 그렇게 무정하게 떠날 건 뭐니. 아무도 네게 뭐라고 하지 않아. 이제 돌아오라고 하기엔 그곳의 삶이 있겠지. 잘 지내는 것 같고. 그렇지만, 그건 알고 있으라고."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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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의미 - 삶의 마지막 여정에서 찾은 가슴 벅찬 7가지 깨달음
토마스 힐란드 에릭센 지음, 이영래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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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나이에 벌써부터 이런 걸 읽어도 되나 싶었다. 어리다는 소리를 들을만한 때를 지나 요즘 세상에 대강 젊은이 정도로 퉁쳐지는 나이에 인생을 논할 자격이 있을까? 삶에, 인생에 대해 뭘 얼마나 말할 수 있을까? 아직 남은 날이 구만리에 대체로 평탄하게 살아온 내가 제목처럼 '인생의 의미'를 고민하기에는 경험의 다양성도, 경험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지혜도 영 일천하지 않은가, 고민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던 차에 저자 약력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고민하는 중에도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고 인생은 계속되고 있으니. 삶의 고민은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함께한다. 그러던 차에 저자 약력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고민하는 중에도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고 인생은 계속되고 있으니. 어린이에게도, 청년에게도, 노인에게도 나름의 혼란과 공허함이 있다. 삶의 어느 시점에 있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산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흔들림의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찾아온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전자는 '안다'에, 후자는 '이해한다'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평화로운 나라, 비경쟁적이고 삶에 충실한 사람들로 가득하리라고 기대되는 나라, 노르웨이의 노학자가 죽음의 문턱에서 직접 체득한 삶의 지혜를 각 장에 담았다. 저자는 인생을 의미있게 만드는 수많은 요소들 중 핵심이 되는 일곱 가지를 주제로 순간에서 영원까지, 삶의 순간들과 삶 이후를 잇는 사유를 풀어놓는다.

p.11 삶의 의미라는 주제는 언제나 존재했다. 인간은 언제나 존재의 본질과 방향성을 찾으려 했다. 삶의 의미에 대해 묻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대체로 새겨들을 만한 내용이나, 저자 자신의 배경으로 인한 한계인지 다소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 혹자에게는 경험 바깥의 세계보다는 익숙한 안전함을 선택하려는 태도로 이해될 수 있겠다. 이를테면 성별이나 종차별이라든지, 여성 가족구성원에게 사회적으로 작용해왔을 압력에 대해. 삶이 투쟁의 장일 수밖에 없는 이에게는 저자의 느린 삶, 소박함과 숙고에 대한 태도가 일종의 사회적 권력과 지위에 기반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저자 또한 그를 잊지는 않으나, 결국 나는 너와 다르고 그와 당신은 다르기 때문에.

개개인의 경험은 모두 다르고, 그런만큼 각자의 삶은 제각기 고유하다. 세상에 나와 완전히 같은 생각과 경험을 갖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같은 것을 욕망하고 '이질적인 것'을, 사람이든 종교든 무엇이든 간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해 배척하는 세상에 이는 퍽 난감한 진리가 아닌가. 이에 저자는 말한다.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다름"이라고. 그런 이유로 나는 그의 한계에서 또다른 가능성을 본다.

p.15 초점을 어디에 두든, 눈길은 밖으로도 안으로도 향해야 한다. 작은 것은 큰 것을 비추고 인간은 섬이 아니며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다름'이다. 삶의 비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일 뿐이다.


내게 와닿지 않는 사유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은 지금껏 무심코 나의 세계에서 지워냈던, 혹은, 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이가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비동의'의 지각에서 넓어지는 세계가 있다고. 나는 당신과는 다른 사람이고 당신 또한 그렇다. 나는 당신의 다름을 위해, 우리가 인간이라는 공통 근원 위에 자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꺼이, 포기될 수 없는 것을 위해 함께할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난감함만큼이나 기꺼운 일이다.

p.58 자신의 약점과 취약성을 인식해야만 타인에게 얼마나 빚을 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사람들이 당신을 키우고 지원하고 작은 호의와 오랜 우정을 베풀고 절망이나 죽음으로부터 당신을 구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와 겸손과 같은 단어의 의미를 가르칠 수 있고 깊은 뜻을 배울 수도 있다.

p.249 의미있는 삶이 반드시 행복한 삶일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이 때로는 방향성 없고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공허한 삶일 수도 있으니까.

p.300 나는 인간이 언제든 역사를 다시 바꿀 수 있으며, 생태계가 망가진다고 해서 곧바로 어두운 원초적 본능이 세상을 지배할 뚜렷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벌거벗은 유인원도, 세력을 주장하는 존재도, 연대하는 생물도, 잔인한 포유류도 아니다. 무엇 하나로만 규정지을 수 없다. 인간은 스스로를 정의하는 존재다.



**추천하는 독자**

1. 빠르고 정신없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멈춰설 필요를 느끼는 독자
2. 최선을 다해 미래를 대비하고 있지만 동시에 견딜 수 공허감에 시달리는, 자극적이고 풍족한 일상 가운데 떨칠 수 없는 불만을 안고 있는 독자
3. 하루종일 타인의 말에, 텍스트와 소리에 파묻혀 살지만 정작 자신과의 대화에는 익숙하지 않은 독자
4. 유행어와 숏폼컨텐츠의 홍수 속에서 사람이자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

*도서제공: 더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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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 도시로 숨 쉬던 모던걸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기까지
김명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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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자른 머리에 양장을 하고, 맵시 좋게 화장을 한 채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 최신 유행과 고학력으로 무장한 여자. 직업을 갖고, 이름을 대고, 고립되고 침묵하기를 거부하는 여자. 욕망과 의견이 있는 여자. "현모양처"가 되어 몸이 부서져라 가족을 위해 희생할 의무에 순종하지 않는 여자.

"모던 걸이 아니라 못된 걸". 사치와 허영에 빠져 돈 쓰기를 허투루 하는 여자. 연애며 낭만에 넋을 빼고 달려드는 여자. "소박하고 순진한" 도덕을 버리고 외제 사치품에 남자만큼이나 밝은 여자. 욕심도 많아 더 배우고 더 돌아다니기를 원하는 여자. "감히" 여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일제강점기, 조선 아닌 조선에, 경성 거리 한복판을 누볐던 신세대 여성들, 이른바 '신여성'을 칭했던 말들이다. "여자다운 맛"이 없는, 사회악인 동시에 계몽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새 시대를 열어갈 변혁의 아이콘이었던 여성들. 선망과 폄하를 한몸에 받았던 그들, 그 많던 신여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p.11 1920년대 초반 《신여성》의 첫머리에 실린 논평•논설류 기사들은 여성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인재로 거듭나야 함을 부르짖으면서도, '밖'에 등장한 신여성을 끊임없이 비난했다. (…) 사회의 이중적 잣대, 강력한 여성혐오, 노동 기회의 원천 봉쇄 등으로 신여성은 '밖'에 자리하지 못하고 점차 도시의 거리에서 사라져 갔다. 그 많던 신여성은 다 어디로 갔을까?


1923년 창간되어 1934년 폐간된 《신여성》은 제목처럼 '신여성'을 주독자로 삼은 최신 유행 잡지였다. 여성의 계몽과 사회참여, 변혁을 요구하는 동시에 공고한 차별과 혐오로 점철되었던 잡지, 외모를 가꾸고 유행을 좇는 여성은 천박하지만 탈성화된 노동자로서 공적 영역에 나선 여성은 여자다운 매력이 없다고 반성을 요구하던 잡지.

여성을 순진무구하고 연약한 보호대상으로 그림과 동시에 탐욕스러운 간계로 남성을 유혹하는 사회악으로 치부했던, '신여성'을 꾸짖는 《신여성》의 엘리트 남성집단과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압력, 더 완벽하고 더 무지할 것을 요구받았던 100년 전 '신여성'과 이 시대의 여성들의 모습은 얼마나 다른가.

p.131 식민지 여성교육은 소수의 여성에게 교육자 에이전트의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상상 속의 근대 가정,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주부를 유통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여학교는 이런 과정을 통해 함께 증식되는 욕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핍진한 현실 속에서 매번 미끄러지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결정 불가능한 욕망이기도 했다.

p.248 '아동'만 있고 '여성'이 없었던 《신여성》의 과학적 양육법은 신여성에게 '막힌 출구'와 다름없었다. (...) 스위트 홈은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좋은' 어머니와 그 품속에 안긴 아기의 모습에서 구체화되었으나, 가정이 '스위트'하게 되면 될수록 여성은 어머니로, 아내로, 주부로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스위트 홈이란 고립된 섬에 갇히고 만다.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당대의 여성혐오와 계몽일지 이상향 주입일지 모를 것이 뒤섞여있던 《신여성》의 명확한 한계와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그 막막한 장벽의 균열을 볼 수 있다. 가리려 애쓸수록 드러나는 금처럼. 강력한 부정과 통제의 다른 말은 명징한 증거다. 오래 닫혀 벽으로 착각되더라도, 문은 문이듯이. 벽을 부수고 나가면 그것이 곧 문이 되듯이.

《신여성》의 창간으로부터 근 100여 년이 흘렀다. 《신여성》과 '신여성'의 시대와 지금 우리 시대는 얼마나 다른가? 끝없이 태어나고 자라 등장하는 우리 사회의 '신여성'들은 100년 전의 그들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그때의 희망, 이상, 한계와 비판은 바라던 대로 '구시대의 한계'로 흘러갔는가?

p.98 강력한 남성의 '시선' 체제가 작동하는 담론의 장이 잡지 《신여성》임에는 분명하다. 그와 동시에 그 시선 체제를 탄생시킨 불온한 신여성의 존재감 또한 분명하다. 여우털 목도리 때문에 한껏 조롱당할지언정 비로소 자기 몸을 보살필 수 있는 여성이 등장했고, 교만과 허영으로 가득한 사랑을 꿈꾼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p.180 신여성의 대중문화 소비가 단순히 여성의 지갑을 여는 일에만 관련되어 있었다면, 남성들이 여성의 문화소비와 즐거움 추구를 그렇게 맹렬하게 공격하며 위험과 경계의 담론을 오랫동안 반복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여성들의 문화소비는 분명 남성적 사회 질서에 틈을 만드는 지점으로 작용했고, 그녀들의 욕망이 표출될 수 있는 적극적인 기제였다.


안타깝게도 어느 정도는 그렇고, 어느 정도는 여전히 그러하거나 더 처참해졌다고 할 수 있다. 매일같이, 말그대로 매일 여성혐오로 점철된 사건, 기사, 언동이 사회로 배설된다. 이 시대의 여성들은 더 완벽해지고 더 새로워지는 동시에 더 구시대적이고 더 연약해지기를 요구받는다. 마치 인간 이전에 여성이라는 이름이 있어 인간인 동시에 여자여야 한다는 듯이, 곱절로 촘촘한 틀에 꼭 맞게 생산되어야 한다는 듯이.

그러나 동시에, 세상은 달라졌다. 참지 않는 여자들, 순종하지 않는 여자들, 여성인 동시에, 여성이므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살아남은 마녀의 후손들, "못된 걸". 이 시대의 '신여성'들은 다음 세대의 '신여성'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한 걸음에 희망이 있다. 영원히 부서지지 않을 천장은 없으니.

p.249 우리는 당면 과제 해결을 위한 출구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 출구는 열려 있을까? 설마 막힌 출구를 또 만들어 내는 건 아닐까? 지금 우리가 만든 출구를 100년 후 세대들은 어떻게 평할까? 당시 《신여성》을 읽던 신여성들처럼 막힌 출구를 진정한 출구라고 믿으며 열심히 만들고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솔직히 두렵다. 그러나 출구를 만드는 일을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드는 출구는, 우리가 그러했듯이 뒤 세대들의 교훈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p.291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 일하는 것 자체가 여성해방일 수 없고, 남성이 집 안으로 들어와 일을 해야만 자유든 해방이든 논해볼 수 있다는 인식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현실은 인식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 1920-1930년대 '직업부인'들은, 슈퍼우먼이 되지 못할 바에는 직장 생활을 포기하라는 사회적 압력에 시달리는 현대 직업여성들의 원형이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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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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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상관으로 한국사 교과서 심의 문제로 소란하다. 툭하면 애국과 민족을 부르짖는 나라답게 온 사회가 발칵 뒤집어졌느냐 하면 역시나 그렇지는 않고, 조용히 소란하다. 아는 사람만 알고 이상한 줄 아는 사람만 그냥 두면 안 된다고 성토할 뿐 대체로 유야무야 넘겨질 분위기다.

아무리 나라 꼴이 말이 아니고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는 해도 차츰차츰 붕괴되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진 않았다. 주변에서는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p.31 리샹란, 아니 야마구치 요시코와 그의 동료들은 "아무리 사과해도 아물 수 없는 상처"라며 죄를 고백했다. 그러고서도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지 않는 편법을 추진했다고 비판받았다. 지금은 한국 대통령이 나서서 일본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며 손을 젓고 있다. (역사의) 전진이나 후퇴와 같은 거칠고 자의적인 표현은 가급적 삼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써야만 한다.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p.96 약육강식의 질서를 승인하게 되면 약자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벌이는 투쟁이 무의미해진다. 강자는 지배할만해서 지배하고, 약자는 지배당할만해서 지배당한다.


콰이강의 다리, 자유인의 긍지를 그린 영화로도 남은, 실상은 무자비한 착취의 현장이었던 그곳에서 조선인은 ある(사물이 '있다')였을까, いる(생명, 마음이 있는 것이 '있다')였을까. 새까만 김상사와 "맹호"와 "청룡". 한때는 조선인이었고 언젠가는 한국인이었을 그들은, 그곳에 '가 있었던'걸까, '보내졌던' 걸까.

혹자는 대중을 개돼지라 한다. 혹자는, 심지어 독재정권을 겪은 적 없는 이가, 총칼이 시민을 겨누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또다른 누군가는 '엄격한' 피해자 상에서 벗어나는 '우리'를 부정한다. 반대로 누군가는 가난하고 힘없던 시절을 깡그리 잊는 일에 힘쓴 나머지,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지배자라는 환상에 얼굴을 파묻고 싶어한다.

p.255 "대부분의 독일인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p.224 사할린 한인의 삶을 그저 소수의 예외 사례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작은 일이라고, 국민국가에서 태어나 단일 민족으로 자라는 삶이 당연하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런 단호한 믿음이 만들어지기 위해 저 수많은 유형과 무형의 폭력이 있었다. 기억해야 할 일들이다. 무심히 던지는 상처들도 여전하다. 경계해야 할 우리 모습이다. 작은 것 속에 세계가 들어 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 하겠다고 다짐하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과연 지워진 기억 속에서 순박한 피해자이기만 했나.

스스로가 글을 쓸때만 자유롭다던 저자는 역사와 개인을 분리하는 떠내려가기 식의 책임 회피 대신, 역사와 개인을 끊임없이 '연루'되어온 관계로 재조명한다. 간결명료한 가해와 피해, 선과 악의 이분법 대신 답 없이 고민하고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기를 요구한다.

p.62 구조적 악이 있다면 그에 동조한 개인의 윤리적 책임은 간단히 면제될 수 있을까? 이학래가 수기에서 고백하듯 결코 그렇지 않다. 일본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져야 할 몫의 역사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때에만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

p.162 이광수의 시대가 지나간 지 오래다. 심지어 선진국이 됐다는 21세기 한국인데 집단 열병처럼 과학 천재에 대한 숭배가 폭발하곤 한다. (...). 황우석은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였다. 시기하는 무리에 의해 희생된 우리시대의 이순신이었다. 저 불의의 무리에 비하면 그의 공인된 조작조차 찬란하게 빛난다. 한국인의 가슴 속에 식민의 한이 퍽이나 서럽게 쌓여 있었나 보다. 비극이라고 해야 할지 희극이라고 해야 할지.


사람은 복잡하다. 사람이 모여 만들어낸 사람의 역사 또한 필연히 그렇다. 그는, 그 자신을 포함한 '우리'를, 기어코 사람의 자리, 책무의 자리에 앉힘으로써 다시금 부끄럽게 한다. 표면상으로 이 책은, 문화예술로 보는 격동의 세계사다.

그러나 파고 들어갈수록, 흔들리는 인간, 비열하거나 평범했던 평범한 인간, 번민하는 인간이 드러난다. "역사에 휘말리고 역사를 만들다가 이윽고 역사가 되는" 이름과 땅과 시간의 기억이다. 무겁고 심란하게 읽히길 바란다. 책임을 떠안는, 휘말리고 엮이는 인간으로서의 우리로 거듭날 독자들에게.

p.6 "우리가 사랑하고 실수하는 인간, 꿈과 욕망을 가진 인간"(…) 이 인간의 실존 조건이, 한 인간을 두고도 그 선악을 쉽사리 가늠할 수 없게끔 한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우리는 인간이 져야 할 역사적 책임, 역사가 그들에게 져야 할 책임에 대한 질문을 놓을 수 없다. '연루됨', 그 자체가 인간의 실존 조건이고, '자신을 역사에 연루시키는 일', 그 자체가 인간 고유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p.187 동정과 연민이 절실한 시대였다. 하지만 그게 늘 아름답지는 않았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이 되기 일쑤였고, 세상의 모순과 갈등을 덮는 포장지가 되기도 했다. 성정이 불처럼 뜨거웠던 경성의전 부속의원 의사 유상규가 동정심을 비난한 이유이기도 하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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