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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전쟁 - 제국주의, 노예무역, 디아스포라로 쓰여진 설탕 잔혹사
최광용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평점 :
단 맛은 생존의 감각이다. 잘 익은 과일과 채소의 그 맛은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의심할 바 없는 안전과 기쁨의 맛이었을 것이다. 그 집약체인 설탕이 등장해 사람에서 사람으로, 대륙과 섬을 오가며 전세계로 퍼져나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이국의 쾌락, 누군가에게는 맛의 신지평을 연 설탕. 그 달콤한 환희는 세계사 곳곳에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의 흔적을 남겼다.
설탕의 원재료인 사탕수수는 무더운 땅에 자란다. 향신료가 그러했듯 설탕 또한 기르고 만드는 손과 먹는 입의 '인종'은 태생부터 다르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인간들에 의해 탐닉과 열광의 대상이 되어 인간을 짐승 이하의 '짐승'과 문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폭력으로 양분했다. 설탕의 세계사는 필연적으로 피와 폭력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p.8 설탕 산업에 뒤따른 잔혹했던 노예제와 대규모 인구 이동은 오늘날 세계 인구 구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아프리카 노예의 역사와 설탕 산업이 초래한 인구 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일은 단지 설탕 산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사의 큰 흐름과 그 속에서 형성된 현재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p.86 플랜테이션이 큰 성공을 거두자 더 많은 노동력이 섬으로 유입되었는데, 유럽에서 온 백인이 3만 명을 넘었고 아프리카 노예는 수십만에 이르렀다. 이렇게, 스페인과 달리 프랑스는 생도맹그에 플랜테이션을 경영하며 아프리카 노예를 많이 수입했고, 그 결과 오늘날 아이티와 도미니카의 인구 구성에 뚜렷한 차이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눈과 입을 즐겁게 하는 식탁에 오르기 전까지, 매끈한 찻잔과 '흰 살갗'에 닿기까지의 설탕은 피와 눈물을 먹고 자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많은 생산, 더 큰 부. 그를 위한 노동력, 가축, 입이 있으되 말하지 못하는 기계인 노예가 곧 부의 원천이자 생산의 필수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설탕에의 열망이 커져갈수록, 생산 규모가 불어날수록 땅과 노예에의 수요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기계보다 싼 노예들의 노동, 호소할 곳도 도망칠 길도 없는 사람들의 손에서 자란 사탕수수는 바다와 대륙을 가로질러 낯선 땅에 닿아서야 상품이 되었다.
p.62 땅을 일구고, 수수를 심고, 김을 매고, 수확하고, 불을 지피고, 짜낸 즙을 끓여 설탕을 만들기까지, 끝도 없이 쳇바퀴 같은 노동이 반복되었다. 사탕수수밭 노예의 삶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p.211 루이지애나는 빠르게 설탕 생산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 불과 반 세기 만에 '퀸 슈거'라 불리며 세계 설탕 공급량의 4분의 1을 담당하는 최대 설탕 생산지로 성장했다. 목화 산업도 크게 발달해 '킹 코튼'이라고도 불렸으며, 루이지애나는 미국 내에서 뉴욕에 이어 두 번째로 부유한 주가 되었다. 이렇게 농업 기반 생산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뉴올리언스는 자연스럽게 미국 노예시장의 중심이 되어 갔다.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생산지'의 이동은 곧 노동력의 대규모 이동과도 같다. 나랏님 입에나 들어가던 귀한 것이 망국의 풀뿌리 디아스포라와 닿아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세계사가 한국사와 별개의 흐름이 아닌 이유로, 조선과 한국의 민중사 또한 설탕과 함께 퍼져나가고 삼켜졌다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의 역사가 그러했듯, 재외 한인의 역사 또한 이주노동자의 역사다. '우리의 아픈 역사'에서 현재의 인종차별과 한국 사회의 이주노동자 혐오를 읽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p.232 조선인은 하와이 전역의 약 40개 설탕 농장에 분산 배치되었으며, 인원은 농장마다 적게는 30여 명, 많게는 200~300명에 달했다. 하루 10시간 노동에 점심시간 30분 정도가 휴식으로 주어졌고, 허리를 펴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이 금지되었다. 하와이 원주민 언어로 '루나'라고 불렸던 농장 감독관은 소나 말을 다루듯 채찍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통제했으며,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릴 정도로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p.233 하와이 이주민 중 많은 수는 그대로 하와이에 남아 정착했다. 하지만 일부는 열악했던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며 미국 본토나 멕시코, 쿠바 등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약 260만 명 규모를 이루고 있는 미주 재외 한인의 출발점이다.
결국 설탕의 세계사는 제국주의 시대의 국경, 국제무역의 변천사와 20세기 이후의 독립투쟁은 모두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단순히 설탕의 역사 내지는 흐름 따위가 아니라 '설탕 전쟁'인 것은 그 역사가 단순한 '신세계 발견'이 아닌 개인의 몸, 국경, 인종과 패권이라는 추상적 가치에 대한 말 그대로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오늘날의 많은 이들은 달콤함에 파묻힌 일상을 누리고 있다. 음료부터 간식과 식사, 각종 산업에까지 설탕의 그림자가 닿는 곳이 적지 않다. 마치 가게에서, 기계에서 솟아나는 듯한 '생존의 맛'에 누군가의 생존이, 피 흘리는 인간의 역사가 있음을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 달콤함 아래 숨겨진 기억을 발견하게 될지 모르니.
p.173 정부군과 경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카를로스 세력은 빠르게 확산되어 참여 인원이 단숨에 1만 2000명으로 불어났다. 분위기를 탄 세스페데스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전투 경험이 있던 막시모 고메즈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농민들을 무장시켜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쿠바 독립 전쟁의 시작이었다.
p.247 하와이는 이제 소수 재벌의 손아귀에 놓인 섬도, 설탕 산업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는 곳도 아니다. 매년 약 9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채로운 섬이다. 여전히 섬 곳곳에서 과거 성행했던 설탕 산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 하와이의 진면목은 풍부한 자연과 다채로운 문화, 그리고 따뜻한 환대에서 찾을 수 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