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 아노크라시, 민주주의 국가의 위기
바버라 F. 월터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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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한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이다. 같은 영토, 삶의 기반, 많은 경우에 소속감을 공유하던 집단이 여러 하위 집단으로 분열되어 일어나는 갈등이다. 이는 민주주의 체제의 필수 요소인 다양성-갈등 수준이 아닌, 절멸까지도 요구할 가능성이 있는 전쟁을 의미한다.

내전은 국가-외부와의 대립이라는 익숙한 관념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서로 간의 교집합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대안현실을 발명, 강화한다는 점에서 "외부의 적"에 맞서는 익숙한 전쟁 도식과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이 "내부 총질"은 언제, 왜, 어떻게 일어나는가? 저자는 앞선 연구들을 통해 아노크라시, 독재와 민주정의 중간 구간인 불안정 체제에서 내전이 촉발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p.32 어떤 나라가 내전을 겪게 될지 여부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지표는 그 나라가 민주주의를 향해, 또는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움직이고 있는지 여부다. (...) 시민들이 완전한 민주주의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정부가 언제나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독재자 지망자가 권리와 자유를 조금씩 갉아먹고 권력을 집중하면서 주주의가 쇠퇴할 수 있다. (…) 대개 바로 이런 중간 구간에서 내전이 일어난다.

p.36 전문가들이 내전 발발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요인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충돌이 일어날 위험이 가장 높은 나라는 가장 가난하거나 가장 불평등한, 또는 종족적, 종교적으로 가장 이질적이거나 심지어 가장 억압적인 곳도 아니었다. 시민들이 총을 집어 들고 싸움을 시작하게 만드는 것은 부분적 민주주의였다.


인용된 연구에서 밝히듯 민주정에서 비민주적 체제로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중간 구간에서도 다양성-분열과 갈등이 내전으로 발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 양극화보다는 파벌화가 주요 요인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안정된 민주주의를 유지해온 사회들에서 내전의 위기가 나날이 증가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 파벌이 일종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형성된다면, 한국의 파벌주의는 무엇에서 힘을 얻는가? 이를테면, 어떤 지역 혹은 소득 수준 혹은 공유하는 문화정서에 기초하는가? 한국의 극우세력이 모순되게 주장하는 과거의 영광, 우방은 무엇으로의 노스탤지어인가? 그들은 무엇을 빼았겼는가?

p.95 사람은 원래 잃는 것을 싫어한다. 이득을 얻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손실을 복구하려는 동기가 훨씬 강하다. (...) 원래 자기 것이라고 믿는 장소에서 지위를 상실하는 것은 못 참는다. 21세기에 가장 위험한 파벌은 한때 지배적이었으나 쇠퇴에 직면한 집단이다.

p.265 파벌주의를 움직이는 중심적 힘은 언제나 음모론이었다. 사람들이 행동하도록 선동하기를 바란다면, 〈타자〉를 표적으로 던져 주면 된다. 그들의 집단을 해치기 위해 고안된 배후의 음모를 강조하라. 적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나라를 조종하고 있다고 설득하라.


과거에 비해 현대사회의 파벌화에서 두드러지는 측면은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네트워크에 대한 강한 의존이라 할 수 있겠다. 혹자는 이를 개인의 문해력과 사고방식의 차이라 치부하나, 공격적 집단정서에 기반한 언동이 곧 수익으로 직결되는 사회에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대안현실이 진실로 탈바꿈되는 데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맞춤형 알고리즘'의 부상 이래 소셜 미디어는 가짜뉴스와 허위 정보, 대안현실의 배양실로 기능하고 있다. 공정과 사실에 기반한 발언을 요구받는 정치인과 정당 또한 예외가 아니며, 심지어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형국이다. 시공간의 제약이 덜한 온라인 공간에서의 공명은 자국 정부와 시민사회에 대한 테러의 시발점, 대표 없는 구심점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p.151 민주주의에서 후보자들에 관해 좋은 결정을 내리려면 유권자가 좋은 정보를 입수해야 하는데, 소셜 미디어는 유권자들에게 나쁜 정보를 쏟아붓고 있다. 사람들이 민주적 절차에 대한 신뢰를 상실함에 따라 대안적 체제를 지지하는 성향이 강해진다. 그리고 보호와 어느 정도의 미래를 약속하는 카리스마적 개인의 수중에 기꺼이 권력을 쥐어 준다.

p.264 정치적 양극화 때문에 내전 발발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내전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파벌화다. 시민들이 종족이나 종교, 지리적 구분을 바탕으로 집단을 형성하고, 정당들이 약탈적으로 바뀌어 경쟁자를 배제하고 주로 자신과 지지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실행할 때 파벌화가 완성된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만큼 파벌화를 부추기고 가속화하는 것은 없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사회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지금, 전쟁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사이에, 너무도 가까이 있다. 꺼지지 않고 다만 숨어있을 뿐인 이 불씨를 잠재울 길은 오직 공정하게 기능하며 성원의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정부와 그를 위한 시민사회의 감시와 소통을 활발히 유지하는 것뿐이다. 익숙한 일상은 언제나 무너지기 쉽다. 끝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우리-아님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공생하는 사회, 누구도 생계를 위협받지 않는 사회 복지, 음모론과 공격적 언사에 의존하는 대신 스스로 사유하고 자유롭게 발언하는 시민사회.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것들이 모여 그토록 연약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고 지탱한다. 지금, 여기, 포화의 문턱에 선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길은 무엇인가. 피할 수 없는 기로에 선 지금, 무거운 마음으로 묻는다.

p.247 아노크라시를 특히 취약하게 만드는 문제는 무엇일까? 달리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어떤 특징이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할까? (…) 법치, 발언권과 책임성, 유능한 정부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은 정부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도와 정치 제도가 탄탄하고 정당성과 책임성이 있는 정도를 반영한다. 거버넌스가 개선되면 이후에 전쟁이 벌어질 위험성이 줄어든다.

p.253 21세기의 시민 교육 교과 과정은 엘리트들의 권력을 상쇄하는 탄탄한 유권자층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체제에 대한 신뢰와 믿음도 확대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리우에 따르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우리 대다수가 민주주의가 작동한다는 것을 믿을 때에만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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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 어느새 인간관계가 고장난 사람들에 관하여
맥스 디킨스 지음, 이경태 옮김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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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어져온 물음이 있다. 필경, 개중 하나는 "저 인간은 뭐가 문제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왜 이 모양인가"일 것이다. 일생일대의 중대사를 앞두고 저자는 이 오래된 의문에 맞닥뜨린다. "나 왜 친구 없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쟤들"도 없다. 많은 '남자'들이 졸업 또는 은퇴와 동시에 사회적으로 고립되어버린다.

깊은 이야기,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관계는 한정되어 있고, 그마저도 "남자에게 허락된" 감정은 지극히 적다. 어째서일까? 전형적 형태의 가부장제는 옛말이 되었고, '유해한 남성성'을 비판하는 시각이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도 낯설지 않게된 지 오래인데도.

p.55 많은 연구결과가 남성은 '독립적'인 자기 개념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할 가능성이 여성보다 훨씬 높다는 점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남성은 자신과 타인을 구분해 자신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묘사한다. 그리고 남성은 성취지향적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인간관계를 부수적 단역으로 언급한다. 반대로 여성은 '상호의존적' 자기 개념을 가질 가능성이 훨씬 높다. 여성은 파트너, 어머니, 자녀, 친구 등 타인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묘사한다.

p.125 남성성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은 '감정표현 규칙'이라는 개념을 자주 언급한다. 남성은 감정을 표현하도록 허가를 받기는 하지만, 일부 특정한 감정만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표현하도록 제약받는다는 뜻이다.


남자들은 다 그래, 남자는 그런 거 싫어해, 따위의 말들로 남성을 정말 '외롭게' 만드는 것은 그들을 배척하는 비-남성 집단도, 마초이즘의 공고함을 부정하는 사회 흐름도, '엄마만 따르는 자식들'도 아닌, 오직 남성성 규범이다. 남성성으로 무장한, '남장된 남성'이 남성을 외톨이로 만든다. 남성다움이 남성을 고립시킨다. 맨박스는 "남자는 이래야 해"와 "남자는 이러면 안 돼"라는 이중 명령으로 남성들을 불쌍하고 외로운 약자와 감정배제적인 지배계급 사이를 마구잡이로 오가게 한다.

본질은, 남성성 중심 사회는 남성으로 묶이는 이들에게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는, 소통하지도 공감하지도 않는 일방적 관계맺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남성은 소통과 공감, 유대라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차단당하는 줄도 모르는 채 고립되기 마련이다.

p.126 남자들이 관계에서 권력을 쥐는 방법 중 하나는 침묵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무관심으로 가장하여 애정쟁취 과정에서 상대방이 주도권을 가진 것처럼 느끼게 만듦으로써, 상대방이 자발적으로 나에 대한 요구사항을 만들고 활동을 계획하고 사람을 초대하고 일을 진행하도록 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한다. (...) "우리는 내가 혼자서도 충분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유지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한다. 어떤 이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존재라고 해도, 우리는 이 점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행동한다."

p.154 남자들의 충성심, 관대함, 배려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은 위기만 대비하려 사는 게 아니다. 남성우정은 단순히 위기상황을 대처하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인생 어딘가에서 상처를 입었을 때를 대비해 우정이 대기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우정은 그 이전에 즐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쯤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왜 남성들은 고립되는가. 왜 심지어 어떤 남성은, 가족에서도 고립되는가, 왜 어느 모임에서든 배우자 옆에 찰싹 붙어 의지하지 않고는 소셜 커뮤니티든, 친구든, 심지어 가족 간에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가. 왜 커뮤니티를 형성하거나 개인적으로 유의미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고립된 존재가 되어버리는가.

"남녀사이에 친구는 없다"는 유성애 이성애자 중심적인 연애정상성 또한 다양한 우정과 관계 형성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데 한몫을 차지한다. 서열싸움과 각종 규범, 우월성이라는 허울로 감춰진 배척과 단절로 우정과 유대관계를 거부하는 이 외로움의 도돌이표에 탈출구는 없는 걸까?

p.154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정신적 부담'을 꺼리는 남성들의 태도가 남성 외로움 통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데 이견이 없다. 다른 측면에서의 분석도 있다. 남성의 고립이 여성에게 더 많은 감정노동을 야기한다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여성들이 남친이나 남편과 동거하며 그들을 돌보는 심리치료사 같은 역할을 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자들에게는 함께 사는 여자 외에는 자신의 감정욕구를 충족시켜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p.306 여러 관계에서 느끼는 욕망들의 파장이 다양하지만, 우리 문화에는 이를 분리할 수 있는 언어적 자원이 없다. 그래서 관계 안에 수반되는 모든 복잡한 가능성, 즉 '매력'이 가진 광범위한 느낌을 단 한가지 차원, 곧 성적인 차원으로 좁혀버린다.


기실 "고립된 남성" 문제는 단순히 그들의 감정뿐 아니라, 극단화되는 마초이즘과 폭력적 집단행동의 결부로 돌진해가는 남성들에게, 또, 그와 함께 살아가야 할 사회 성원 모두가 연결되어 있기에 시급성을 갖는다. 좋든 싫든 같은 사회, 시간, 환경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 책은 일생일대의 존재론적 난관에 봉착한 저자의 "웃픈" 자아성찰기이다. 동시에, 개인의 일화에 그칠 수 없는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과시와 경쟁, 조롱과 모멸로 시작해 압도적 자살과 고독사로 마무리되는" 남성들, 그와 함께 살아가야 할 남성-아님들의 미래는 과연, 어디로 향해야 할까. 한숨어린 물음에 더해 쓴웃음이 남는다.

p.331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동시에 그들로부터 숨기 위해서 소셜미디어를 이용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현실세계의 관계로 되돌아온다. 코로나 봉쇄는 사람들이 실재하는 세계의 대면사교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는 것이 가능은 하지만, 대부분은 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기술의 도움으로 대면사교를 배제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이 남성이다.

p.418 "내가 했던 것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였어. 외롭다고 고백하는 거. 나는 친구들과의 우정에 대해 내가 실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이에 대해 슬퍼하도록 스스로에게 허락했어." (...) 남성들 간의 대화에서 마지막까지 금기로 남은 주제는 사교생활에 있어서의 건강함이 아닐까?


*도서제공: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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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디킨스 지음, 이경태 옮김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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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어져온 물음이 있다. 필경, 개중 하나는 "저 인간은 뭐가 문제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왜 이 모양인가"일 것이다. 일생일대의 중대사를 앞두고 저자는 이 오래된 의문에 맞닥뜨린다. "나 왜 친구 없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쟤들"도 없다. 많은 '남자'들이 졸업 또는 은퇴와 동시에 사회적으로 고립되어버린다.

깊은 이야기,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관계는 한정되어 있고, 그마저도 "남자에게 허락된" 감정은 지극히 적다. 어째서일까? 전형적 형태의 가부장제는 옛말이 되었고, '유해한 남성성'을 비판하는 시각이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도 낯설지 않게된 지 오래인데도.

p.55 많은 연구결과가 남성은 '독립적'인 자기 개념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할 가능성이 여성보다 훨씬 높다는 점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남성은 자신과 타인을 구분해 자신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묘사한다. 그리고 남성은 성취지향적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인간관계를 부수적 단역으로 언급한다. 반대로 여성은 '상호의존적' 자기 개념을 가질 가능성이 훨씬 높다. 여성은 파트너, 어머니, 자녀, 친구 등 타인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묘사한다.

p.125 남성성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은 '감정표현 규칙'이라는 개념을 자주 언급한다. 남성은 감정을 표현하도록 허가를 받기는 하지만, 일부 특정한 감정만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표현하도록 제약받는다는 뜻이다.


남자들은 다 그래, 남자는 그런 거 싫어해, 따위의 말들로 남성을 정말 '외롭게' 만드는 것은 그들을 배척하는 비-남성 집단도, 마초이즘의 공고함을 부정하는 사회 흐름도, '엄마만 따르는 자식들'도 아닌, 오직 남성성 규범이다. 남성성으로 무장한, '남장된 남성'이 남성을 외톨이로 만든다. 남성다움이 남성을 고립시킨다. 맨박스는 "남자는 이래야 해"와 "남자는 이러면 안 돼"라는 이중 명령으로 남성들을 불쌍하고 외로운 약자와 감정배제적인 지배계급 사이를 마구잡이로 오가게 한다.

본질은, 남성성 중심 사회는 남성으로 묶이는 이들에게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는, 소통하지도 공감하지도 않는 일방적 관계맺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남성은 소통과 공감, 유대라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차단당하는 줄도 모르는 채 고립되기 마련이다.

p.126 남자들이 관계에서 권력을 쥐는 방법 중 하나는 침묵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무관심으로 가장하여 애정쟁취 과정에서 상대방이 주도권을 가진 것처럼 느끼게 만듦으로써, 상대방이 자발적으로 나에 대한 요구사항을 만들고 활동을 계획하고 사람을 초대하고 일을 진행하도록 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한다. (...) "우리는 내가 혼자서도 충분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유지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한다. 어떤 이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존재라고 해도, 우리는 이 점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행동한다."

p.154 남자들의 충성심, 관대함, 배려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은 위기만 대비하려 사는 게 아니다. 남성우정은 단순히 위기상황을 대처하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인생 어딘가에서 상처를 입었을 때를 대비해 우정이 대기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우정은 그 이전에 즐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쯤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왜 남성들은 고립되는가. 왜 심지어 어떤 남성은, 가족에서도 고립되는가, 왜 어느 모임에서든 배우자 옆에 찰싹 붙어 의지하지 않고는 소셜 커뮤니티든, 친구든, 심지어 가족 간에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가. 왜 커뮤니티를 형성하거나 개인적으로 유의미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고립된 존재가 되어버리는가.

"남녀사이에 친구는 없다"는 유성애 이성애자 중심적인 연애정상성 또한 다양한 우정과 관계 형성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데 한몫을 차지한다. 서열싸움과 각종 규범, 우월성이라는 허울로 감춰진 배척과 단절로 우정과 유대관계를 거부하는 이 외로움의 도돌이표에 탈출구는 없는 걸까?

p.154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정신적 부담'을 꺼리는 남성들의 태도가 남성 외로움 통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데 이견이 없다. 다른 측면에서의 분석도 있다. 남성의 고립이 여성에게 더 많은 감정노동을 야기한다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여성들이 남친이나 남편과 동거하며 그들을 돌보는 심리치료사 같은 역할을 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자들에게는 함께 사는 여자 외에는 자신의 감정욕구를 충족시켜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p.306 여러 관계에서 느끼는 욕망들의 파장이 다양하지만, 우리 문화에는 이를 분리할 수 있는 언어적 자원이 없다. 그래서 관계 안에 수반되는 모든 복잡한 가능성, 즉 '매력'이 가진 광범위한 느낌을 단 한가지 차원, 곧 성적인 차원으로 좁혀버린다.


기실 "고립된 남성" 문제는 단순히 그들의 감정뿐 아니라, 극단화되는 마초이즘과 폭력적 집단행동의 결부로 돌진해가는 남성들에게, 또, 그와 함께 살아가야 할 사회 성원 모두가 연결되어 있기에 시급성을 갖는다. 좋든 싫든 같은 사회, 시간, 환경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 책은 일생일대의 존재론적 난관에 봉착한 저자의 "웃픈" 자아성찰기이다. 동시에, 개인의 일화에 그칠 수 없는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과시와 경쟁, 조롱과 모멸로 시작해 압도적 자살과 고독사로 마무리되는" 남성들, 그와 함께 살아가야 할 남성-아님들의 미래는 과연, 어디로 향해야 할까. 한숨어린 물음에 더해 쓴웃음이 남는다.

p.331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동시에 그들로부터 숨기 위해서 소셜미디어를 이용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현실세계의 관계로 되돌아온다. 코로나 봉쇄는 사람들이 실재하는 세계의 대면사교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는 것이 가능은 하지만, 대부분은 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기술의 도움으로 대면사교를 배제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이 남성이다.

p.418 "내가 했던 것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였어. 외롭다고 고백하는 거. 나는 친구들과의 우정에 대해 내가 실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이에 대해 슬퍼하도록 스스로에게 허락했어." (...) 남성들 간의 대화에서 마지막까지 금기로 남은 주제는 사교생활에 있어서의 건강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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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 - 중세부터 현재까지 혼자의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들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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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여성에게 필요하다고 말해졌던, 남성에게는 무슨 생필품이나 되듯 여겨지지만 여성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자기만의 방" 이전에 그것이 대두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있었다. '자기'라는 개인, '방'이라는 분리된 공간, 무엇보다도, '자기만의'라는 사적 영역의 개념이다.

오늘날 너무도 자연스러운"사생활"의 역사는 제법 오래되었다. 중세 런던의 "방해죄 재판소"에 줄소송이 끊이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한뎃잠을 자던 집, 길거리에 면한 창문, 온동네 사정이 훤히 까발려지던 공동체 중심의 시대에도 사생활의 자유는 적극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p.16 자기만의 공간을 주장하는 데는 세 가지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둘의 대화가 보호되는 영역이 필요했다. 둘째, 개인이 혼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성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외부 권력의 침해로부터 생각과 행동을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p.58 개인사를 절대적인 비밀로 하는 것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았고 용납되지도 않았다. 상속이라는 중요한 영역에서 유언 처리는 관습에 따라 이뤄졌으며 17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사적인 이유로 누군가를 유언장에서 뺄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가 없는 개인은 즉시 의심을 받았다.


근대까지도 런던에서는 타인과의 경계에 있어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방식의 규범을 요구했다. 이는 사용인과 피고용인, 주인과 하인, 창문 안팎과 마당, 심지어 시선처리의 영역까지 촘촘하게 짜여있었는데, 추측컨대 상대와 나의 '품위'를 보호하는 일종의 완충재, 문화적 울타리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때로는 사색과 은밀한 대화를, 때로는 신분과 성별의 장벽을 보호하기 위해.

신분제가 무너지고 도시생활이 보편화됨에 따라 '사생활'은 위기에 직면했다. 거대한 외부의 적에 맞서 일체화된 국민국가를 구축하고 '내부의 적'을 색출하기 위해 안보의 이름으로 단속되었던 것이다. 그에 맞서 각종 선언과 협약의 이름으로 개인과 국가-체제는 대립과 충돌을 반복해왔다.

p.109 정부는 점점 힘을 키워가는 시민의 공적 영역에 위협을 느끼고 국가 원수의 재량권에 집착했다. (...) 모든 동네와 모임의 장소에 첩자가 파견되고 반체제적인 문학 작품의 생산과 소비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인신보호가 중단되고 우편 검열이 실행되었다. 프랑스에서 새로 생겨난 공공 영역은 모두 국가 개입에 노출되었다.

p.165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 프라이버시는 비공식적인 열망에서 기본적인 기대로 바뀌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은 누구도 프라이버시를 무단으로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으며 1950년에는 유럽인권협약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사생활과 가정생활, 가정과 서신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근현대의 격동,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과 세계대전 이후 냉전 사회에서의 국가감시체제 등에서 알 수 있듯 개인에게 있어 프라이버시, 사생활이 당연하게 보장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웃과 국가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자기만의 영역'을 쟁취하려는 분투는 언제나 자본과 계급, 사회환경에 밀접하게 결부된 것이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소셜미디어 속 자아와 공간-여유-자본으로 나타난다.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을 중시하고 자발적 고립을 추구하며, 소셜미디어가 이전의 사회활동을 대체해가는 추세이다. 침해받지 않는 절대 영역으로서의 개인이 너무도 당연한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앞선 사례에서 드러나듯 '어디든 제집처럼 드나들던' 추억도 어느정도는 환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 사생활 만연의 사회는 정말 '사적'이라 말할 수 있는가?

p.114 신흥 부르주아 계층이 자기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중심에는 폐쇄된 가정이 있었다. 이제 가족 구성원들은 가족이라는 단위를 통해 신과 일체가 되도 록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자신들의 영역을 만들었다.

p.225 프라이버시의 종말 선언은 과거와 급격한 단절을 암시했다. 과거에는 자신의 사생활 정보에 대한 통제가 절대적 특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었는지 아닌지의 결과는 물리적 환경, 통신 시스템, 법적 구조, 친밀한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그 공통분모는 프라이버시에 수반된 엄청난 노동이었다.


저자는 추억과 추측 사이에서 역동하는 '사생활'의 개념이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공간과 소통, 뉴미디어의 등장과 국가 대 개인의 영역을 넘나들며 새로운 갈등의 중심에서 체제적 통제 대상 또는 가상 자아의 영역으로 변화하고 확장되어온 역사를 추적한다.

낯설고 먼 타자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며 '알지도 알려지지도 않을 자유'를 외치는 현대 독자들에게, 이 '프라이버시'의 변천사를 톺아보고 미래를 가늠해보는 경험은 틀림없이 낯설고 즐거우리라 믿는다. 바라건대, "자기만의 방" 또는 낯선 타인에 둘러싸여 꽁꽁 가려 읽기를, 또, 적당히 먼 서로에게 이 즐거움을 나누기를!

p.174 프라이버시의 핵심은 사람들 간의 실질적인 상호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정보를 통제하는 힘에 있다. 현재 전통적 노동계급 공동체가 지닌 매력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친숙함이다.

p.240 사생활의 보호가 전 세계적으로 인식이 퍼진 동인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프라이버시가 일종의 인권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프라이버시가 언론의 자유와 같은 다른 소중한 가치와 충돌할 때 프라이버시의 힘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두 번째 동인은 디지털 혁명이었다. 디지털 혁명의 영향은 처음부터 막연하면서도 광범위하게 인식되었다.


*도서제공: 더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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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코리아
정주식 외 지음 / 사계절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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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과 매체를 막론하고, 시사 뉴스를 꼬박꼬박 챙겨 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것도 젊은 세대라면 더더욱. 반쯤은 농담으로 자고 일어나면 뒤집어지는 시국이라고, 하루라도 드잡이 하지 않는 날이 없다고 말하지만, 따지고보면 반도 후한 셈이다. 정신없이 들썩거리고 고성과 협잡이 오가지 않는 사회라고 하면 너무한 감상일까.

이 징글징글하게 사분오열 갈등이 만연한 한국사회를 설명할 단어를 딱 하나 꼽으라면, 무엇보다도 "다이내믹"일 것이다.. 뭐라고 콕 집어 정의할 수 없는, 정말이지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사회인 탓이다. 어째서일까? 케케묵은 순혈민족주의와 무한경쟁이 안팎으로 성원을 들볶는 이 사회는, 왜 이 지경에서 벗어나질 못할까?

p.5 사람들은 불안을 밀어내기 위해 격앙되고, 불확실성을 견딜 수 없어 섣부른 신념에 빠진다. 혼란기에 필요한 것은 매끈한 이상이 아니라, 혼란을 마주하고 견디는 능력이다. 그러려면 무질서한 세계 속에서 요동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줄 나만의 관점이 필요하다.

p.28 (박권일) 뉴스의 가치를 못 느끼고 뉴스 소비를 왜 해야 되는지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난 이유는 이런 공중이 사라졌거나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에요. 공적인 담론을 얘기하는 것에서 가치를 더 이상 찾지 못 하는 거예요.


현재 K-컨텐츠의 흐름은 온갖 관찰예능과 컨텐츠로 가득하나 역설적으로 타인에게 극도로 무심하다. 그들을 타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나의 연장이자 소비대상이다. 화면 바깥의 숙고와 성찰이 결여되어있다. 너, 우리, 소비자와 상품 외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한다. 이를 온전히 구조 탓으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쩌면 현재 우리 사회에 '신뢰할 수 있는 공론장'의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세대와는 별개로 천차만별인 미디어 리터러시도, 소수자와 약자가 겪는 장벽을 낮추는 것이 곧 '역차별'로 이어지는 무한경쟁사회도 사회를 구성하는 근원적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할 기회가 박탈되고 무산되기를 연거푸 이어져온 데에 어느정도 원인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p.88 (정주식) 한국에 나타났던 중도정치의 영향이라고 하는 건 선거 때 잠깐 양당을 긴장시키는 정도의 역할이죠. 그건 결국 양당을 더 공고하게 하는 기능인 거예요. 선거 때마다 돌아오는 중도에 대한 관심은 양당제를 더 공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지 양당제를 흔든다거나 이걸 개선시키는 데는 전혀 효과가 없었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힘들다는 회의론을 갖고 있습니다.

p.182 (박권일) 아무리 동일시를 해도 마지막엔 까만 공백으로 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바로 타자라는 거거든요. 그런 타자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파시즘이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이게 자본주의 논리고 소비자 논리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해버리면 안 됩니다. (...) 돈을 얼마만큼 썼든 간에 그 아이돌 역시도 나랑 똑같은 동등한 시민인 거예요. 민주사회에서 타자를, 시민성을 인정하지 않고 아이돌들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형처럼 생각하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에요.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가능성의 상상만으로도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함부로 절망을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그러니 질문해야 한다. 묻고, 흔들어야 한다. 가능성을 모색하고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왜 전력투구해야만 하는가? 무슨 근거로 그것을 요구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개인은 진정한 정치주체로 기능하는가? 이 극도로 폭력적이고 소모적인 사회의 뜨거운 논쟁들, 정치와 문화, 개인과 사회, 생명의 위계까지, '한국 사회'의 문제를 타개할 길을 찾아낼 수 있을까?

p.101 (이재훈) 저는 결국은 보이지 않는 제3지대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한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열망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정치적인 견해를 표방할 수 있거나 대리할 수 있는 매개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분명히 한국 사회에 있고, 이 사람들이 더 드러날 수 있는 정치세력화,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 생각이 듭니다. 그러지 않은 이상은 (...)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비슷한 세력끼리 권력만 교체되는 상황이 이어지지 않나,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더라고요.

p.233 (정주식) 좋은 삶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없는 현실이 제일 큰 원인인 것 같아요. 젊음이라는 건 어쩔 수 없이 육체적인 것이죠. 육체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가치일 텐데, 그거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인생의 의미를 못 찾은 거예요. 그래서 오로지 쫓아갈 수 있는 게 젊음밖에 없다는 거죠. 정신적 삶이 없는 거예요. 젊음의 의미 과잉은 곧 늙음은 무의미가 되는 거죠.


왜 끊임없이 묻고 생각해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존중할 때, 불편하고 혼란한 이슈에 대해 뜨겁게 토론할 때, '공론장'의 가능성을 꾸준히 상상하고 구현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야 비로소 생존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어질 날들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익숙한 집단주의적이고 이분법적인 생존 논리를 벗어나 고민해야 한다.

이 책 또한 그 시도의 일환이라 믿는다. 왜 '우리'에게 '나'는 없고 '우리'만 있는지, 왜 우리 사회에 '너'는 없고 '나'만이 가득한지. 민주주의의 경종이 울리는 "헬조선", "불반도"에서 살아나갈 길을 모색하기 위한, "다이내믹 코리아"가 진정한 '다이내믹'이기 위해 생각하고 토론하며 지지고 볶기를 멈추지 않기 위한.

p.292 (은유) 여기서 제가 의문을 갖는 거는 한국에서는 왜 이렇게 뭐든지 내던지고 거기에 올인해야 되냐는 거예요. 내 일상은 없고 운동만 남는 거지. (...) 소위 말하는 평범한 생활을 다 저버리고 그 한 가지만 해 가지고 오로지 성공만 해야 돼, 이런 게 체육적인 경쟁 시스템에도 많이 퍼져 있고 내면화돼 있다고 생각해요. 거기서 이탈되는 사람들의 일상은 조명되지 않고요.

p.360 (김민주) 그때는 내가 말을 했을 때 혹은 문학으로 말을 했을 때 소양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니가 틀렸다" 라고 할지언정 "못 알아듣겠다" "듣고 싶지 않다"라고는 하지 않는 시대였잖아요. 근데 지금은 그게 아니잖아요. 폭력에 대한 묘사가 나왔을 뿐인데 폭력적이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도서제공: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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