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몸으로
김초엽 외 지음, 김이삭 옮김 / 래빗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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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강물에는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인간 신체의 세포는 주기적으로 교체된다. 길어야 10여 년 정도면 이전의 것이 전부 대체된다. 존재하는 것은 흘러가고 변한다. 지금 이 순간에조차. 그렇다면, 끊임없이 변하는 이 우주, 이 세계에서 무엇이 이 강이 어제와 같은 것임을, 맞잡은 손이 여전한 그 사람임을 증명하는가?

기이하리만치 과거에 매이지 않는, 아니, 과거와의 연결이 희미하다못해 부유하는 나의 연인, 어느날 전세계에 그와 같은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말과 기억이 와해된다. 어제와 오늘, 지금과 미래는 조금도 연결점을 갖지 못한다. 보지 않는 것, 닿지 않은 것은 말끔히 지워져버린다. 사람과 사람, 존재의 연속을 증명하는 모든 것이 힘을 잃었다.

p.87 나는 언어가 한 사람의 가장 짙고도 깊은 바탕색이라고 믿었다. 과거의 모든 흔적을 대뇌에서 지워낼 방법이 없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모어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샤오광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부드러운 시폰 같았다. (...) 반면 관광객이라는 걸 모두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나는 항상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그녀가 현지 말투로 내게 말을 걸 때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낯섦과 불쾌함을 느꼈다.


사람 뿐만 아니다. 언어가, 그로 매개된 사회가, 우주 전체가 변하고 있다. 빨리감기처럼, 마치, 우주라는 거대한 뇌가 시냅스를 재구축하는 것처럼. 제멋대로 분해되고 재연결되는 시공간에서 기존의 관념은은 더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어떻게든 해야, 아니, 너를,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네가 없는 세계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나의 우주는 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지. 어떻게 해야 내가 너의 세계에 여전히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오래된 의문이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음을, 너의 존재는 유일무이하며 영원하다고 믿고 싶은 인간의 마음만큼이나. 어떻게 우리가 여전히 우리일 수 있을까. 오늘의 사랑은 어떻게 어제의 기억을 담아낼 수 있는가. 흔들리지 않는 토대, 교집합, 연속선, 이를테면, 진리에 가까운 무언가가 없다면. 공통분모가 깨끗이 지워진, 재편성된 세계에서 여전히 너의 안에 내가 있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p.90 모어는 인간 개개인에게 흔들리지 않는 존재였다. 어린 시절에 습득한 언어적 습관이 종종 평생을 가기도 했으니까, 물론 삶에서 마주하는 것들이 미묘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 그런데 언어의 진화 속도가 달라진다면? 1,000배나 빨라 진다면? 외국에 간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자기 모어를 잃게 된다면?

p.112 "별의 위치가 바뀌었어." 그녀가 잇새로 말을 짜내듯 뱉었다. (...) "넌 언어가 변화하면 그걸 알아채지 못해?"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두 눈이 붉어져 있었다. 별이 바뀌었어, 혼란스러워졌다고. 언어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처럼 말이야!"


유한한 존재는 영원을 갈구한다. 흔들리고 위태로운 것은 불변하는 진리에 매달리고자 한다. 인간, 말로 매개되는 동물, 걷기도 전에 언어를 흡수하는, 연약하고 무력한 짐승이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은 뇌리 깊은 곳에 심어지는 뿌리와도 같다. 그것을 잊는다면, 너무도 쉽게 새로운 뿌리가 심겨지고 또 사라진다면, 우리는 그 자신의 존재를, '그 언어'로 매개된 관계를 어떻게 증명해낼 수 있을까.

또다시 오래된 물음. 아무도 없는 숲의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누구도 듣지 못했다면, 그 숲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은 것과 같을까? 누구에게도 인식되지 않는,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은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을까? 경험한 적 없는 속도로 재편성되는 우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기억. 네가 없어도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의 우주는 네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어.

p.118 모어를 잃는 건 괜찮았다. 모든 걸 잊어도 괜찮았다. 심지어 나 자신을 잊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그녀만큼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샤오광을 잊는다면 내 마음의 구멍은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언니, 언니는 충분히 강한 사람이에요."


쓰러지는 나무를 막을 수는 없다. 흩어진 소리를 주워담을 방법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서로가 서로를 증명하는 일, 손을 내밀고, 기꺼이 품으로 뛰어드는 일. 이 세상은 여전히 예측할 수 없고 끊임없이 변화하겠지만 너의 존재는, 너로 인한 나의 세계는 그렇지 않음을 믿는 일. 서로가 서로의 곁이 되는 것. 네가 나를 증명해. 내가 너의 존재를 증명해.

'그 일'이 있든 없든, 세계는 여전할 것이다. 상관 없다. 두렵고, 이해 가능한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말 그대로 천지가 뒤바뀌는 우주라고 해도. 네가 나의 세계이듯, 나또한 너라는 작은 우주의 일부일테니. 내 곁에 네가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이 믿음에 붙일 이름을 아직 찾지 못했다. 상관없다. 텅 빈 숲, 쓰러진 나무에게 또다른 나무가 그러했듯이.

p.119 그 건물이 어쩌다가 창문 밖에 나타나게 된 건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기이한 일이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다. (...) 내가 두 팔을 뻗기도 전에 그녀가 폴짝 뛰었다. 샤오광은 내게 날아들었고, 우리 둘은 카펫 위로 넘어졌다.

p.120 샤오광이 내게 말했다. 나를 잊을 수가 없었다고. 이건 내 환각일까? 아니면 우주가 과거의 기억을 포기한 샤오광처럼 신경세포를 재조직하고 있는 걸까? 만물을 깨뜨렸다가 다시 연결하는? 뭐든 상관없었다. 샤오광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우주에 적응할 것이다. 우주 자신도 앞을 향해 나아갈 거고.


*도서제공: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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