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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새 언덕의 마법사
오키타 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평점 :
주술도 마법도 평범한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한 어느 세상,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 빼고는 뭐든지 가능한 마녀와 마법사. 그들은 평범한 이들과 섞이는 듯, 그러나 한 곳에 머무는 법이 없이 떠돌며 살아간다. 어느 날인가부터 소문이 들려온다. 종달새 마을에는 마녀가 살고 있다. 마음 속 가장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마녀가.
언덕 중턱에 위치한 작은 마법상점에 가면, 찾아온 이가 누구든, 얼마나 큰 대가를 내밀든, 그것이 마녀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무엇이든 이루어준다고 한다. 무엇이든. 누구든. 그곳을 찾는 이들은 제각기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기적같은 힘을,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그 소원을, 마법으로 해결해주기를.
p.155 마법은 어떤 기적이든 행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마법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한 번 더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 마법으로 그 구멍을 메울 수만 있다면, 하루코는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다. 앞으로도 소설가로 살아갈 수 있다.
p.216 유카를 잃고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도키오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 년 사이에 요시히코의 상처가 아문 것 같지 않았다. 형이 슬퍼하지 않는 이유는 그 감정을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요시히코는 마음에 새겨진 깊은 상처가 필사적으로 호소하는 아픔을 무시할 뿐이다.
전능한 힘에 비해 그들은 좀처럼 마법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종달새 언덕의 마녀'만 해도 어느 나라의 대통령인지도 그렇게 애원했다는데 눈도 깜빡하지 않고 단칼에 거절했단다. 또 누군가는 그저 재밌겠다는 이유만으로 흔쾌히 마법을 부렸다는데...
이야기는 그 작은 마을에 마녀가 찾아오고도 한참이 지난 어느 날로 시작된다. 간절한 소원을 들어준대. 그렇다면, 나도, 어쩌면... 저마다 미련과 슬픔, 외로움, 자괴감과 상실을 끌어안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과연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
p.116 "언젠가 쿠로와 만나면 부디 친구가 되어주렴. 왠지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어쩌면 이미 친구일지도 모르겠구나." (...) 친구가 되어달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그 아이와 실컷 놀아달라고. 뛰어다니기를 좋아하는 활발 한 아이니까 공원에서 뛰놀고, 나비를 쫓아다니고, 놀다 지치면 햇살 드는 곳에서 같이 낮잠을 자달라고.
p.169 무얼 쓴다고 한들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다. 가치 없는 소설을 만들어내는 자신도 아무 가치 없다. 언제나 머릿속에 있던 이야기들이 무너져내리고 사라져갔다. 공백이 되어버린 자리에 새로운 이야기는 태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설가이길 원했다. 하루코에게는 소설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발버둥질하다가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지만, 자신이 더는 소설가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인정할 수 없었다.
마녀가 감각하는 시간에 비하면 평범한 인간의 그것은 찰나와도 같다. 그들의 힘에 비하면 인간은 그저 무력하고 아둔한, 하루하루와 눈앞의 일에 벅차 허덕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런 인간을, 마녀는 지켜본다. 그리고 말한다. 정말 그렇게 되길 원하느냐고. 네 진정한 소원은 그게 아닐 거라고. 마치, 인간이 인간인 채로, 유한하고 무력한 그 자체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것처럼.
작가가 굳이 사람 바깥의 세계를 끌어온 이유는, 오랜 시간 수많은 이들이 이처럼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존재를 그려온 이유는 어쩌면 바로 이것일지 모른다. 나약하고 무력한, 찰나의 존재인 탓에, 수많은 그리움과 좌절과, 목숨만큼 소중한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그 마음을 잊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왔기 때문에.
p.67 메이, 사실 넌 지금도 흉터 따위 전혀 상관없지 않아?" 메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이가 고개를 끄덕이듯 눈을 깜빡였다. "네가 정말로 없애고 싶은 건 흉터가 아니라 유토 마음속에 있는 짐일 거야."
p.121 쿠로는 미노루와의 나날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어째서 옆에 있어주는 것일까. "언어는 확실히 중요하지. 하지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인 건 아니야."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스이가 말했다. 미노루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러니 마법은 그저 찰나의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 등 뒤에, 긴 시간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홀로 남겨진 사람이 때때로 눈물짓고 어떤 날엔 무너지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짧은 생의 유한한 기회 속에서도 내일이, 누군가가 있음을 잊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은 결국 현실이다. 마음이다. 긴 이야기의 끝에 남겨진 이에게, '그' 또한 그러했듯이.
오늘도, 작은 마을의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상점, 그곳의 문을 열면 긴 머리를 한 아름다운 '마녀'가 언제와도 같은 목소리로 맞이한다. 안녕, 나는 스이. 무슨 일로 왔어? 그러면 당신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겠지. 당신이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바로 '그 마녀'인가요. 나는, 내 소원은...
p.78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많은 걸 잃어. 그중에는 더없이 소중한 것도 있지. 막을 수 없는 이별도 있어. 그러니 부디 소중히 대해줘. 잃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해."
p.255 떠나버린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옆에 있어줄 수도 없다. 그런데도 이제는 없는 사람에게 집착하니 마음에 계속 생채기가 나는 것이다. 그러니 산 사람이 어떻게든 해줘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다.
*도서제공: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