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의 역사 - 중세부터 현재까지 혼자의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들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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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여성에게 필요하다고 말해졌던, 남성에게는 무슨 생필품이나 되듯 여겨지지만 여성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자기만의 방" 이전에 그것이 대두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있었다. '자기'라는 개인, '방'이라는 분리된 공간, 무엇보다도, '자기만의'라는 사적 영역의 개념이다.

오늘날 너무도 자연스러운"사생활"의 역사는 제법 오래되었다. 중세 런던의 "방해죄 재판소"에 줄소송이 끊이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한뎃잠을 자던 집, 길거리에 면한 창문, 온동네 사정이 훤히 까발려지던 공동체 중심의 시대에도 사생활의 자유는 적극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p.16 자기만의 공간을 주장하는 데는 세 가지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둘의 대화가 보호되는 영역이 필요했다. 둘째, 개인이 혼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성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외부 권력의 침해로부터 생각과 행동을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p.58 개인사를 절대적인 비밀로 하는 것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았고 용납되지도 않았다. 상속이라는 중요한 영역에서 유언 처리는 관습에 따라 이뤄졌으며 17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사적인 이유로 누군가를 유언장에서 뺄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가 없는 개인은 즉시 의심을 받았다.


근대까지도 런던에서는 타인과의 경계에 있어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방식의 규범을 요구했다. 이는 사용인과 피고용인, 주인과 하인, 창문 안팎과 마당, 심지어 시선처리의 영역까지 촘촘하게 짜여있었는데, 추측컨대 상대와 나의 '품위'를 보호하는 일종의 완충재, 문화적 울타리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때로는 사색과 은밀한 대화를, 때로는 신분과 성별의 장벽을 보호하기 위해.

신분제가 무너지고 도시생활이 보편화됨에 따라 '사생활'은 위기에 직면했다. 거대한 외부의 적에 맞서 일체화된 국민국가를 구축하고 '내부의 적'을 색출하기 위해 안보의 이름으로 단속되었던 것이다. 그에 맞서 각종 선언과 협약의 이름으로 개인과 국가-체제는 대립과 충돌을 반복해왔다.

p.109 정부는 점점 힘을 키워가는 시민의 공적 영역에 위협을 느끼고 국가 원수의 재량권에 집착했다. (...) 모든 동네와 모임의 장소에 첩자가 파견되고 반체제적인 문학 작품의 생산과 소비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인신보호가 중단되고 우편 검열이 실행되었다. 프랑스에서 새로 생겨난 공공 영역은 모두 국가 개입에 노출되었다.

p.165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 프라이버시는 비공식적인 열망에서 기본적인 기대로 바뀌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은 누구도 프라이버시를 무단으로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으며 1950년에는 유럽인권협약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사생활과 가정생활, 가정과 서신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근현대의 격동,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과 세계대전 이후 냉전 사회에서의 국가감시체제 등에서 알 수 있듯 개인에게 있어 프라이버시, 사생활이 당연하게 보장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웃과 국가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자기만의 영역'을 쟁취하려는 분투는 언제나 자본과 계급, 사회환경에 밀접하게 결부된 것이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소셜미디어 속 자아와 공간-여유-자본으로 나타난다.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을 중시하고 자발적 고립을 추구하며, 소셜미디어가 이전의 사회활동을 대체해가는 추세이다. 침해받지 않는 절대 영역으로서의 개인이 너무도 당연한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앞선 사례에서 드러나듯 '어디든 제집처럼 드나들던' 추억도 어느정도는 환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 사생활 만연의 사회는 정말 '사적'이라 말할 수 있는가?

p.114 신흥 부르주아 계층이 자기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중심에는 폐쇄된 가정이 있었다. 이제 가족 구성원들은 가족이라는 단위를 통해 신과 일체가 되도 록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자신들의 영역을 만들었다.

p.225 프라이버시의 종말 선언은 과거와 급격한 단절을 암시했다. 과거에는 자신의 사생활 정보에 대한 통제가 절대적 특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었는지 아닌지의 결과는 물리적 환경, 통신 시스템, 법적 구조, 친밀한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그 공통분모는 프라이버시에 수반된 엄청난 노동이었다.


저자는 추억과 추측 사이에서 역동하는 '사생활'의 개념이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공간과 소통, 뉴미디어의 등장과 국가 대 개인의 영역을 넘나들며 새로운 갈등의 중심에서 체제적 통제 대상 또는 가상 자아의 영역으로 변화하고 확장되어온 역사를 추적한다.

낯설고 먼 타자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며 '알지도 알려지지도 않을 자유'를 외치는 현대 독자들에게, 이 '프라이버시'의 변천사를 톺아보고 미래를 가늠해보는 경험은 틀림없이 낯설고 즐거우리라 믿는다. 바라건대, "자기만의 방" 또는 낯선 타인에 둘러싸여 꽁꽁 가려 읽기를, 또, 적당히 먼 서로에게 이 즐거움을 나누기를!

p.174 프라이버시의 핵심은 사람들 간의 실질적인 상호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정보를 통제하는 힘에 있다. 현재 전통적 노동계급 공동체가 지닌 매력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친숙함이다.

p.240 사생활의 보호가 전 세계적으로 인식이 퍼진 동인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프라이버시가 일종의 인권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프라이버시가 언론의 자유와 같은 다른 소중한 가치와 충돌할 때 프라이버시의 힘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두 번째 동인은 디지털 혁명이었다. 디지털 혁명의 영향은 처음부터 막연하면서도 광범위하게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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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코리아
정주식 외 지음 / 사계절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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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과 매체를 막론하고, 시사 뉴스를 꼬박꼬박 챙겨 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것도 젊은 세대라면 더더욱. 반쯤은 농담으로 자고 일어나면 뒤집어지는 시국이라고, 하루라도 드잡이 하지 않는 날이 없다고 말하지만, 따지고보면 반도 후한 셈이다. 정신없이 들썩거리고 고성과 협잡이 오가지 않는 사회라고 하면 너무한 감상일까.

이 징글징글하게 사분오열 갈등이 만연한 한국사회를 설명할 단어를 딱 하나 꼽으라면, 무엇보다도 "다이내믹"일 것이다.. 뭐라고 콕 집어 정의할 수 없는, 정말이지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사회인 탓이다. 어째서일까? 케케묵은 순혈민족주의와 무한경쟁이 안팎으로 성원을 들볶는 이 사회는, 왜 이 지경에서 벗어나질 못할까?

p.5 사람들은 불안을 밀어내기 위해 격앙되고, 불확실성을 견딜 수 없어 섣부른 신념에 빠진다. 혼란기에 필요한 것은 매끈한 이상이 아니라, 혼란을 마주하고 견디는 능력이다. 그러려면 무질서한 세계 속에서 요동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줄 나만의 관점이 필요하다.

p.28 (박권일) 뉴스의 가치를 못 느끼고 뉴스 소비를 왜 해야 되는지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난 이유는 이런 공중이 사라졌거나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에요. 공적인 담론을 얘기하는 것에서 가치를 더 이상 찾지 못 하는 거예요.


현재 K-컨텐츠의 흐름은 온갖 관찰예능과 컨텐츠로 가득하나 역설적으로 타인에게 극도로 무심하다. 그들을 타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나의 연장이자 소비대상이다. 화면 바깥의 숙고와 성찰이 결여되어있다. 너, 우리, 소비자와 상품 외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한다. 이를 온전히 구조 탓으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쩌면 현재 우리 사회에 '신뢰할 수 있는 공론장'의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세대와는 별개로 천차만별인 미디어 리터러시도, 소수자와 약자가 겪는 장벽을 낮추는 것이 곧 '역차별'로 이어지는 무한경쟁사회도 사회를 구성하는 근원적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할 기회가 박탈되고 무산되기를 연거푸 이어져온 데에 어느정도 원인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p.88 (정주식) 한국에 나타났던 중도정치의 영향이라고 하는 건 선거 때 잠깐 양당을 긴장시키는 정도의 역할이죠. 그건 결국 양당을 더 공고하게 하는 기능인 거예요. 선거 때마다 돌아오는 중도에 대한 관심은 양당제를 더 공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지 양당제를 흔든다거나 이걸 개선시키는 데는 전혀 효과가 없었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힘들다는 회의론을 갖고 있습니다.

p.182 (박권일) 아무리 동일시를 해도 마지막엔 까만 공백으로 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바로 타자라는 거거든요. 그런 타자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파시즘이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이게 자본주의 논리고 소비자 논리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해버리면 안 됩니다. (...) 돈을 얼마만큼 썼든 간에 그 아이돌 역시도 나랑 똑같은 동등한 시민인 거예요. 민주사회에서 타자를, 시민성을 인정하지 않고 아이돌들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형처럼 생각하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에요.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가능성의 상상만으로도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함부로 절망을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그러니 질문해야 한다. 묻고, 흔들어야 한다. 가능성을 모색하고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왜 전력투구해야만 하는가? 무슨 근거로 그것을 요구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개인은 진정한 정치주체로 기능하는가? 이 극도로 폭력적이고 소모적인 사회의 뜨거운 논쟁들, 정치와 문화, 개인과 사회, 생명의 위계까지, '한국 사회'의 문제를 타개할 길을 찾아낼 수 있을까?

p.101 (이재훈) 저는 결국은 보이지 않는 제3지대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한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열망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정치적인 견해를 표방할 수 있거나 대리할 수 있는 매개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분명히 한국 사회에 있고, 이 사람들이 더 드러날 수 있는 정치세력화,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 생각이 듭니다. 그러지 않은 이상은 (...)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비슷한 세력끼리 권력만 교체되는 상황이 이어지지 않나,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더라고요.

p.233 (정주식) 좋은 삶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없는 현실이 제일 큰 원인인 것 같아요. 젊음이라는 건 어쩔 수 없이 육체적인 것이죠. 육체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가치일 텐데, 그거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인생의 의미를 못 찾은 거예요. 그래서 오로지 쫓아갈 수 있는 게 젊음밖에 없다는 거죠. 정신적 삶이 없는 거예요. 젊음의 의미 과잉은 곧 늙음은 무의미가 되는 거죠.


왜 끊임없이 묻고 생각해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존중할 때, 불편하고 혼란한 이슈에 대해 뜨겁게 토론할 때, '공론장'의 가능성을 꾸준히 상상하고 구현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야 비로소 생존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어질 날들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익숙한 집단주의적이고 이분법적인 생존 논리를 벗어나 고민해야 한다.

이 책 또한 그 시도의 일환이라 믿는다. 왜 '우리'에게 '나'는 없고 '우리'만 있는지, 왜 우리 사회에 '너'는 없고 '나'만이 가득한지. 민주주의의 경종이 울리는 "헬조선", "불반도"에서 살아나갈 길을 모색하기 위한, "다이내믹 코리아"가 진정한 '다이내믹'이기 위해 생각하고 토론하며 지지고 볶기를 멈추지 않기 위한.

p.292 (은유) 여기서 제가 의문을 갖는 거는 한국에서는 왜 이렇게 뭐든지 내던지고 거기에 올인해야 되냐는 거예요. 내 일상은 없고 운동만 남는 거지. (...) 소위 말하는 평범한 생활을 다 저버리고 그 한 가지만 해 가지고 오로지 성공만 해야 돼, 이런 게 체육적인 경쟁 시스템에도 많이 퍼져 있고 내면화돼 있다고 생각해요. 거기서 이탈되는 사람들의 일상은 조명되지 않고요.

p.360 (김민주) 그때는 내가 말을 했을 때 혹은 문학으로 말을 했을 때 소양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니가 틀렸다" 라고 할지언정 "못 알아듣겠다" "듣고 싶지 않다"라고는 하지 않는 시대였잖아요. 근데 지금은 그게 아니잖아요. 폭력에 대한 묘사가 나왔을 뿐인데 폭력적이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도서제공: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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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대루
천쉐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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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하게 솟아오른 고층 빌딩, 쉼없이 사람이 오고가는 곳, 길 하나 건너 맞닿을 듯한 온갖 군상들... 이 모든 것들은 일견 희망을 닮았다.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일상, 기회가 있다는 믿음, 삶은 어떻게든 계속되리라는 확신을. 과연 그러한가? 쇠락한 도시의 죽어가는 건물에도 사람이 산다. 그들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사람의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느끼는 사람들, "진짜같은 모조품" 같은 사람들, 어느 때보다 사람이 만들어낸 곳에서, 수많은 인파 속에서 살아가지만 도리어 사람됨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에게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단지 하루의 연속이 아닌, '이어지는 여정으로서의 삶'의 가치를 그들에게 묻는다면.

p.37 여자친구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지금으로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자신과 무관하게 느껴졌다. 인생이라는 파도가 그를 기슭으로 밀어주었고 모래사장도 다 헤치고 지나왔지만, 이제 물으로 올라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 순간, 그는 자신의 두 발이 지느러미로 변해버렸음을 알았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잃고 말았다.

p.128 "이것 봐요. 똑같죠? 이것도 똑같죠? 제일 싼 게 2,980 위안이잖아요. 우리 신발은 마크만 없어요. 공장에서 뒤로 빼돌린 거니까. 이런 물건은 전문가가 더 잘 알아. 재질이고 디자인이고 아주 똑같거든." 예메이리는 자신도 카피 인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디자인도 재질도 똑같지만 상표가 없어서 한밤중에 창고에서 몰래 빠져나와 거리의 싸구려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


공중다리처럼 이야기 곳곳을 잇는 것은 어쩌면, 삶보다는 죽음이다. 낡고 부서진 건물 안에서, 몸 하나 간신히 돌릴, 집보다는 방에, 그보다는 차라리 공간에 가까울 곳에 살아가는 이들, 마음이 부서지고 희망이 부서진, 빛 꺼진 사람들. 몸과 마음이 죽어버린 존재들. 죽어가는 건물. 시간이 죽어버리는 곳에도 사람이 있다.경제활동의 주축, 끊임없이 소비하고 또 갈아치우는 이들, 어쩌면 그들 자신마저 소모되고 폐기되는 사람들이 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느 때보다 가까이 살지만 또 어느 때보다 고립되어, 서로를 모르고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표상과도 같은 마천대루, 한때는 희망이었고 이제는 계급사회의 총집합이 된 곳.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보루, 또다른 이에겐 그저 공간일 뿐인 그곳에 사람이 있어 맥이 뛰고 길이 흐르는 곳곳에 가득한 무형의 것을 무엇이라 말하면 좋을까. 이를테면, 정념이랄지. 체념과 증오, 불신과 위선, 휘발되고 응어리지는 것들 또한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p.284 편의점만 있어도 거의 모든 생활이 가능해요. 전자기파와 인스턴트가 모든 것을 값싸고 얄팍하게 만들었어요. 우리 같은 점원들처럼요. 난 편의점에서는 뭐든 다 할 수 있지만 다른 곳에 가면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우리가 배운 이런 기술은 전문적인 곳에 가선 전혀 쓸모가 없어요.

p.288 난 스물일곱 살이에요.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다면 여기서 점장까지 해도 평생 집 한 채 살 수 없어요. 이 빌딩에 있는 작은 원룸조차 살 수 없을 거예요. 사실 집을 사는 건 꿈도 안 꿔요. (...) 요즘 세상은 돈과 소비가 전부잖아요. 너도나도 편하고 풍족하게 사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어요. 아이스크림 하나 입에 물면 팍팍한 삶도 전부 잊을 수 있고요.


제각기의 입장에서 보는, 단편적인 진실은 배경이 된 마천대루를 닮았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는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조각나고 가려진 이야기, 훔쳐보고 엿듯는 관음의 사회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때문일까. 아찔하게 솟아오른 현대화의 정점같은 그곳에서, 각각의 공간에 갇혀 서로를 알지 못하는 동시에 판에 박은 듯 비슷하고 이중적인 복제들의 삶을 그려내는 이야기가.

모두가 극히 좁은 시야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포착하는 도중, 이해와 이해와 어긋나는 순간이 드러난다. 일순 겹쳐 드러난 진실은 정답도 통쾌함도 아닌 그저 외로움과 비극의 또다른 면일 뿐이리라. 그곳에서 어떤 죽음은, 아니, 어떤 죽음도, 비극이 되지 못한다. 영원한 미완으로, 슬픔으로 남지도 못한 채 그저 흩어져버린다.

p.289 내가 원하는 게 뭘까요? 어떤 삶을 살아야 희망이 있다고 느낄까요? 더 고민해봐야죠. 전 인류의 운명이 내 인생과 단단히 연결돼 있으니까. 그래서 중메이바오의 죽음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계속 여기서 일하다 보면 사건이 해결되는 날이 있겠죠. 어쨌든 난 그녀를 기억하고, 그녀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어요. 이 냉랭하고 비정한 도시에선 시간이 모든 걸 집어삼키고 누가 죽든, 누가 사라지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지만, 난 달라요.

p.311 열심히 사회운동을 하며 시위와 집회마다 참여하고, 약자의 권익 쟁취에 내 미약한 힘을 보태려고 해요. 남을 위해 뭐라도 한다면 내 인생이 헛되이 흘러 가는 느낌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헛수고예요.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계속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요. 신념이랄까? 난 그런 게 없어요. 내겐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절박한 일이 없어요. 그래서 현장을 떠나면 또다시 공허함이 밀려와요.


독자는, 이미 마천대루의 어느 방 한 칸에서 잠들고 먹고 살아가는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할지 모른다. 수많은 중메이바오의 삶을 모독하지 않으면서 그를 애도할 수 있는가. 작중에서 말하듯 세상은 오래지 않아 그의 죽음을 잊을 것이다. 빈 자리는 금세 팔려나가고, 채워질 것이다. 도시가, 건물이 그를 집어삼킨 것처럼.

작가는 "죄와 벌, 사랑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자 했다"고 말한다. 닫힌 문 너머의 고독을, 비밀을, 삶을 좀먹고 어떤 가능성을 뿌리채 닫아버리는 그것을 타살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가. 모르는 이의 얼굴을 마주하기를 바란다. 소모품 같은 삶, 불가해한 기호처럼 스쳐지나가는 존재를. "그녀의 죽음이 우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누구도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므로.

p.63 중메이바오는 양쪽 사이를 지나가며 이것이 자기 인생의 은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쓰레기를 주우러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고급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아닌, 절대로 연결이 불가능한 두 세계를 잇는 중간 매개체 같았다. 이것이 그녀 자신을 마모시켜 영혼의 어떤 곳이 망가진 듯 고장 나버렸고, 이런 고장 난 느낌이 그녀로 하여금 오랫동안 자기 개성도 없이 부유하게 했다.

p.351 "내가 살아 있길 바라는 것과 살아 있다는 희열을 느끼는 건 별개예요. 난 살아 있는 희열을 조금도 느낄 수가 없어요. 생명은 가장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거예요. 날 움직일 수 없고, 고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내 마음을 흔들 수도 없어요. 내 몸속에 그런 게 있다면, 아직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도서제공: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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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불평등 - 시간의 자유는 어떻게 특권이 되었나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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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시간, 부자의 시간 관리 비법, 근로 외 소득으로 부를 쌓는 법, 부수익 파이프라인, 경제적 자유, 시간 투자로 바뀌는 인생... 너무도 익숙한 수사가 아닌가. 퍽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돈이 시간, 시간이 돈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련하게' 일만 하는 대신 '효율적인' 시간관리로 부를 축적하고 '여유를 되찾으라'는 말은 일종의 이상향이다.

여기서 물어야 한다. 어째서 노력에 부가 따르고 환경마저 개인의 근면성실과 자본에 좌우된다는 매끄러운 명제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가? 대부분이 평생을 뼈빠지게 일을 한다. 쉴 틈도 없이 노동하고 저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혀지지 않는 간극, 삶의 필수적인 요소들을 갈아넣어야만 겨우 확보되는 생존이 있다.

p.5 한국 노동자들은 연간 OECD 평균보다 39일 더 노동한다. 대부분의 나라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프레카리아트 대열에 있다는 것, 즉 불안정하고 불안전한 일자리에서 벌어들이는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소득을 통해 근근이 살아가며, 종종 감당할 수 없는 부채가 있고, 무엇보다 청원자 같은 느낌에 시달린다는 점도 아주 분명하다. 프레카리아트는 자국에서조차 시민권에 따른 권리들을 상실하고 있다.

p.5 역사상 대부분의 지배자들은 대중이 생존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과 노동의 양에 무관심했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국민경제와 경제성장에 공헌하는 존재로 여겨져왔다. 시간에 관한 진정으로 진보적인 정치가 더욱 필요해졌는데, 그것은 만성적인 초과 노동과 과도한 노동을 해결하는 것, 그리고 모든 불평등 가운데 가장 최악인 시간 불평등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그런 사회에서 노동으로 시간을 구매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 시간의 주체인 사람은 무엇으로 소모되고 '투자'되는가? '가난한 자'의 시간은 누구에게 '구매'되고, 소모되는가? 익히 알려진 금언처럼,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한가?

'현대화된' 대부분의 사회들은 오롯이 자본주의 체제로만 운영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경제체제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사람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회 운영은 '대상'과 '주체'가 되는 사람을 요한다. 앞서 말했듯 부가 시간, 시간이 부인 사회에서 부가 편중되어 있다는 것은, 시간 또한 불평등한 재화로 취급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p.110 산업적 노동시간의 강화에는 두가지 함의가 있었다. 첫째, 규율 통제 체제가 노동자 행위성-즉 스스로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시간과 범위-을 더 많이 제한했다. 행위성이 탈 상품화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한다면 생산과정은 더 심하게 상품화되고 있었다. 이는 공장에서 관료제적 사무실로 확산되었다. 포드주의•테일러주의 토요타주의 모델은 시간 블록에 맞는 '노동력'을 획득했고, 정해진 노동일 동안, 정해진 근무 연수 동안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을 구매했다.

p.152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기 기업가로 간주한다면 그들은 일, 돌봄, 공유화, 스콜레로서의 여가 등의 가치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이런 활동들에 쓰는 시간은 '비생산적' 혹은 심지어 '구걸한' 것으로 비난받으며 낭비된 시간으로 간주된다.


혹자는 말한다. 모두에게 안전감을 제공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따라서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열등감, 모욕감, 굴욕감이 '적정선'에서 주어질 때 사람들은 그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과연 그러한가? 게으른 자가 가난하며, 가난의 이유는 요구되는 행정 절차에 부응할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믿음은 틀렸다.

사회가 변한 것이 아니다. 국가가, 행정 체계가 발달하고 세분화됨에 따라 다른 방법을 시도할 틈조차 사라졌기 때문이다. 왜 '가난한 자'들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가? 어째서 당장의 이익을 미래의 더 큰 손실과 낙인과 바꾸는가? 사실상 그들에게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p.202 노동이 아닌 모든 형태의 일은 금전적으로 보수를 받지 못함에도 대부분 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비용을 물리며 이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소득 상실의 위험마저 있다. 비용은 결과의 불확실함 때문에 커진다. 어떤 시간 사용이 더 높은 보상을 가져오는가? 할 수 있는 다른 활동과 비교할 때 이 노동을 위한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가? 그런 질문에 대해 답하기는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어렵다.

p.211 국가가 프레카리아트에게 부과하는 일의 '거래 비용'은 일에 관한 분석에서 간과된다. 그들의 시간은 존중받지 못한다. 모든 공리주의적 정부는 소소한 것들을 개혁하고자 한다. 오늘날의 정부는 행위 조건을 사용하여 급여 청구인이 대부분 쓸모없고 시간을 소모하며 보수 없는 일을 하도록 강요한다. 이것은 잔인한 형태의 불평등이다.


이전의 저서들에서 기본소득을 토대로 삶의 안전망을 제공하는 사회와 지속 가능한 경제 체제를 제시한 바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보다 근원적인 차원, '시간' 그 자체에 주목한다.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 단지 살아있을 뿐 아니라, 행위하고 영위한다. 그것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본주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은, 이미 그렇게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제전복의 위협으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자본주의 하의 예속에 있지 않은가... 모두의 시간을 존중하는 진보적 정치는 결국 사람으로 살고자 함이다. 지금 시작하자. 불안정노동에 내몰린 시간-무산자들이 주체로 돌아오는 사회를.

p.448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어야 했다. 왜 우리는 진정한 여가가 사라지게 놔두었는가? 왜 우리는 자본주의를 변호하는 자들이 공유화를 게으르고 기생적인 일이라며 묵살할 때 공유화를 구출하지 못했는가? 왜 페미니스트들은 돌봄을 일로서 정당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p.449 이유가 무엇이든 미래가 돌아오고 있으며, 시간은 분명 해방되고 있고, 더욱이 더 평등하게 공유되고 있다. 사회개혁가들의 마음에서는 아직 현실이 아니지만 말이다. 시간의 정치는 오로지 거기서부터 개선될 수 있다. 한번 해보자.


*도서제공: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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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 빌런
존 스칼지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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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삼촌. 돌아가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생전에 돈이 많으셨다고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금 자금이 좀 급해서 그러는데, 사랑하는? 아마도 사랑했을? 조카가 내일모레쯤 굶어죽게 생겼으니 430만 달러만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슈퍼빌런이요? 우리 고양이가 말을 한다고요?

와중에 내 집 그거 꼴랑 하나 남은 재산이, 엄연히 말하자면 하나까지도 안 되는... 아무튼 그게 잿더미가 됐다고요? 근데 내가 용의자라고요? 얼굴도 까먹은 삼촌의 단독상속인으로 와서 장례식을 주관하라고요? 화환에 꼴 좋다고 써있다고요? 오신 분들은 이 인간 진짜 죽었나 시신에 칼도 좀 찔러보고 유전자 증거도 좀 가져가겠다고요? 뭐라는거야 대체?

그러니까, 연락두절 인성파탄자 삼촌이 생전에 어마어마한 부호였단다. 그것도 전세계를 손아귀에 넣은 사업가이자 슈퍼빌런. 죽기 전에 나를 상속인으로 지정했으니 소식 들고 찾아간 직원을 따라가 냉큼 사업 물려받아 호시탐탐 털어먹으려는 동종업계 사업가들도 어떻게 좀 해보란다. 안 그러면 너도 죽을 꼴이니 아무튼 이해를 좀 해보라고? 지금요? 갑자기요?

p.116 악당은 전문적인 방해자였다. 시스템과 과정을 조사해 각각의 약점, 빠져나갈 구멍, 의도치 않은 결과를 찾아낸 다음, 그들 자신이나 고객의 이익을 위해 그것들을 이용한다. 이러한 활동은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선함'이나 '악함'은 관찰자의 시각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양은 설명했다.


황당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유일한 가족 고양이가 사실은 회사 직원이었으며, 나름 부동산도 가지고 있단다. 또다른 직원 돌고래는 노조 조직권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삼촌이 악당재벌일 뿐만 아니라 악덕사장이기도 했다고요? 환장하겠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세금 낼 돈도 없어 나앉게 생긴 임시 교사였다고요!

그치만 '회사와 함께 사라지다'가 되게 생겼는데 그게 중요한가요. 까짓거 한 번 해보죠. 일단 협상부터 해봅시다. 누구와? 돌고래, 그리고 예의 '동종업계 종사자들'과. 그것도 '네가 뭘 몰라서 그러니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분들과. 가봅시다, 조만장자 라이프, 초재벌 거물인지 뭔지 얼마나 대단한가 어디 한 번 해보자고요.

p.139 "돈은 현실이 아니에요, 찰리. 인쇄소에서 찍어내는 종이일 뿐이죠. 미국 정부나 중국 정부, 또는 브라질 정부가 우리에게 내는 돈은 전부 비자금이에요. 그 정부의 예산에 기록되지 않아요. 그저 자신들이 그 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송금할 뿐이죠. 우리가 쓰려고 하기 전까지는 그 돈은 존재하지 않아요."

p.143 "우리는 그 돈을 이용할 수 없어요. 쓸 수도 없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왜 그러는 거죠?" "경쟁자들이 그 돈을 가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모리슨이 말했다. "어떤 정부가 우리의 구독자라면, 그 정부는 다른 경쟁자의 서비스를 구독하지 못해요. 왜 그러겠어요? 우리가 전부 제공할 수 있는데."


작중의 악당, 빌런, 정재계를 좌우하는 거물들의 모임 등은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것들이다. 상상 이상의 부, 전지구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은 더이상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누군가는 잔고인지 잔돈인지 헷갈릴 금액이 전재산인데 같은 세상을 사는 누군가는 섬을 소유하고, 가늠조차 어려운 거액이 숨만 쉬어도 불어나는 걸까?

현실 속의 악당은 화려한 코스튬에 기괴한 분장을 하지 않는다. 초능력을 가진 인외의 존재도 아니다. "진짜" 악당은 폐쇄적인 집단에 스스로 고립되어 있다. 정당한 주인에게서 훔쳐낸 것을 아무도 몰래 야금야금 팔아치울 기회를 노린다. 교묘한 말재주와 우격다짐으로 배를 채운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이너 서클"은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p.266 "당신은 전 세계의 비극을 이용했고, 그 비극이 당신 생각만큼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몇 가지를 직접 일으키기도 했을 겁니다. 그리고 똑똑하고 젊은 예스맨들을 심고 또 심어 일구었겠죠. 그 예스맨들의 에고를 부풀렸을 겁니다. 그래야 당신이 그들의 재능을 얼마나 많이 훔쳐 가는지 모를 테니까요."

p.267 "당신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다고 확신했겠죠. 그러다 탐욕스러워지거나, 게을러지거나, 당신 자신의 홍보자료를 믿게 된 겁니다. 아니면 이 전부가 동시에 일어났을 수도 있겠죠."


작품 전체가 이렇게 묻는 듯하다. 이것이 부의 권력인가. 이것이 가진 자들의 힘인가. 대체 무엇이 마땅히 추구당해야 하며, 누군가는 정당하게 노동하고 대우받을 권리를 투쟁으로 쟁취해야만 하는가. 누가 협잡꾼이자 약탈자인가. 그들이 가지고 누리는 것들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누가, 대체 누가 "진짜 악당"인가?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웃고, 화내고, 머쓱해지기를 바란다. 한순간에 비일상에 휘말리는 주인공의 황당한 심정에 공감하고, 끔찍하게 치우친 부와 권력이 얼마나 허상같은 것인지 깨닫기를 바란다. 그에 더해 동정도 '애완'도 거절당하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 그렇게 우리 사회를 한 겹 젖혀보기를, 동료시민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심란한 마음으로 고민하기를 바란다. 왜 안되겠는가. 그들도 생각을 하는데!

p.151 "잠깐만." 내가 말했다. 돌고래가 멈춰 섰다. "너를 뭐라고 부르면 되지?"
"무엇으로도 부르지 마." 돌고래가 말했다. "우리의 요구에 귀 기울여 줘. 이제 네가 여기 주인이라고 말했지. 좋아. 우리의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우리와 공정하게 협상해. 그러면 나를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알려 줄게. 그래야 공평한 거래지."

p.279 "돌고래와 실제로 대화하는 건 아직 좀 느낌이 이상해." 대화를 시작하면서 나는 73에게 털어놓았다. "당연하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73이 대답했다. "지능을 가지고 있는데도 발언권이 인정되지 않는 생물체가 되는 것도 난 이상해. 그러니 피장파장이야."


*도서제공: 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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