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뒤에서 - 지워진 아내 아일린
애나 펀더 지음, 서제인 옮김 / 생각의힘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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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된 동화로 알았을 때부터 오래도록 사랑해왔다. 읽을 수 있는 작품은 모조리 구해 읽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득이는 지성, 먼지와 살이 뒤엉켜 풍기는, 지워지지 않는 피로의 냄새를. 끔찍한 사회를 꿰뚫어 보는데서 오는 지독한 환멸에도 끝내 사유하는 지성이기를, 양심을 가진 존재이기를, 관찰자이기를, 고발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생생한 전장의 고백, 패배하고 방황하는 자의 영혼을 가감없이 기록하는 정직과 거침없는 풍자와 고발의 용기를 사랑해왔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이 그를 사랑해왔다. 그의 일생, 작품세계,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해진 평가까지도. 위대한 문인이자 시대의 지성이었고, 그 자신이 어떤 시대의 증언과도 같은 존재였다. 조지 오웰은.

p.90 보이지 않고 급료도 없으나 당신의 시중을 드는 것이 생의 피할 수 없는 목적이기에 꼭 감사를 표할 필요도 없는 누군가로부터 이익을 얻는다는 것. 그런 당신이 해낸 일을 당신 혼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해냈다고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 나는 만들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이 문장 속에서 당신의 아내는 사라져버린다.

p.102 가부장제는 오웰이 자기 아내의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부터 이익을 얻도록 허용해 주었다. 그런 다음 똑같은 방식으로, 전기 작가들이 그가 그 모든 일을 혼자 해냈다는 인상을 주도록 허용해 주었다. 전기 작가들은 오웰의 이야기에 들어갈 사실들을 세상에서 골라내는데, 그 사실들은 이미 오웰에게 유리하도록 세상이 선별해 놓은 것들이다. 가부장제와 전기의 서술 기법은 솔기 없이 매끈하게 결합한다.


그런데 만일 그 모든 게 그의 것이 아니었다면. 오롯히 홀로 이뤄낸 업적이 아닌 것을 넘어 숫제 훔치고, 갈취하고, 교묘하고도 뻔뻔스럽게 덧칠해버린 누군가의 이름이었다면. 그의 글,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 그의 사유는 과연 진실된 것이었을까. 조지 오웰이 아닌 진짜 '에릭 블레어'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세간의 찬사가 쏟아진 불후의 명작들, 내가 사랑해온 글들. 그건 대체 누구의 것이었을까. 검열의 흔적이, 강제된 부재가 존재의 반증이라면, 그 자리에는 무엇이, 누가, 어떻게 있었던 걸까. 나는 그것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 그의 글이, 경험이, 사유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익숙하고 점잖은 태도로 눈을 감는 일이 오래되고도 익숙한 이름, 여성혐오와 가부장제에의 동참이라면.

p.270 이제 아일린은 스페인에서 자신이 했던 경험들이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경험은 조지의 일반적인 지식, 아일린은 기여한 적도 관련된 바도 없는 지식이 되어 있다. (...) 모두 아일린이 조지에게 말해 준 것들이다. 아일린 자신도 '내 아내'로 일반화되어 있다. 아일린의 모든 정체성과 행동과 지식이 멋대로 조지의 것이 되어 있다.

p.419 어쩌면 아일린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오웰이 그토록 애써 은폐하려 한다는 점이야말로 그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증거일지 모른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오웰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일린은 그 책의 기획까지 도와줬다'고 말이다. 이것은 도용과 삭제를 합친 수법이다. 누군가가 한 아주 작은 기여에는 감사를 표하면서 훨씬 더 큰 기여는 지워버리는 방식.


사랑했던 시간을 물어내라고 따지고 싶어지는 마음을 아는가. 읽다 말고 치미는 화에 뜨끈해지는 눈가를 짚는 기분을 아는가.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일은 나의 배신감도, 이 충격을 극적인 수사로 포장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지워진 존재, 이름도 삶도 당연하게 소거된 이의 자리를 돌려주는 것이다.

어떤 부재, 집요하게 들어내진 흔적은 역설적으로 존재의 강한 반증이 된다. 저자가 기록의 '빈틈들'에서 찾아낸 한 여성의 생애가 그러하듯이. 조지, 아니, 에릭은 그와 추종자들이 그려온 것처럼 시대의 양심도, 용기있고 재치있는 작가도 아니었다. 그저 이기적이고 잔인한 철부지에 불과했다. 이것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여전히 현재가 아니던가.

p.432 오웰이 후에 그 여성에게 보냈다는 편지에 대해서는, 나는 할 말이 없다. 그저 오웰이 리디아에게 했던 비난의 말들만 떠오를 뿐이다. 상대가 원치 않는 섹스의 날짜를 지정해 놓고는 그 시간에 리디아가 집을 비우자 오웰이 퍼부었던 말들만. 남자는 자기가 원하는 걸 가질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게 당신이라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p.455 한 여자가 자신의 필요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다 못해 자신을 반드시 받아야 하는 의학적 치료조차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말들. 그럼으로써 남편이 오든 안 오든 그의 마음이 편해지게 해주는 말들. (...) 자기말소는 가부장제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지만, 결국에는 스스로를 드러내게 되고 범죄처럼 보이게 된다.


누구도 자신을 모욕하는 이에게 감사하며 "진짜 가치"에 주목하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여전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저자는 '아내'라는 이름으로 끔찍하리만치 말끔하게 소거되어온 이의 생애와 그를 둘러싼 치밀하고 집요한 폭력을 고발함으로써 의아하고도 고통스러웠던 '명작'의 여성혐오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에게 주어의 자리를 돌려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읽히기를 바란다. 그 자신 외에 다른 누구의 이름의 뒤로 밀려나지 않기를 바란다. 오웰의 아내, 오웰에게 빼앗긴, 오웰에 의해 무엇이 된... 이 아닌, 아일린, 아일린 오쇼네시. 번득이는 지성, 눈부신 용기와 별과 같은 성품을 가진, 욕망하고 후회하고 사랑하고 슬퍼했던 사람, 아일린 오쇼네시로.

p.79 아일린은 오웰이 소중히 여기던, 인간이라는 존재가 "꼭 갖추어야 하는 고상함"을 체현해 놓은 존재였다. 오웰은 작가로 살아가는 동안 이 고상함이야말로 우리가 잘못된 권력에 —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떠들어대면서 실은 억압하는 구조에— 생각 없이 굴복하지 않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자질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오웰이 지니고 싶어 했을 만한 자질이었다.

p.570 노라는 생각한다. 편지를 든 손이 무릎으로 떨어진다. 아니야. 아일린이 그 대신 이뤄낸 건 삶 그 자체였어. 이제 뭘 해야 할까?



*도서제공: 생각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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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내가 원한 것
서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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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좋아하시나요.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혹은, 좋아하는 계절로 여름을 꼽는 이가 있다면, 혹시 더위라도 먹은 게 아닌지 반문하고 싶어진다. 대놓고 그럴 것까진 아니라도, 솔직한 심정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치만, 아무래도 그렇잖아. 뜨겁다 못해 숨이 턱턱 막히고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한 그 계절을, 적어도 기억 속에는, 단 한 번도 좋아해본 적이 없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다, 를 넘어 몸서리치게 두려워한다. 이 고백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에 따라붙을 나의 음울하고 축축하고 노상 비실거리는 자아를 꺼내보이는 일이 영 마뜩찮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여름마다 죽었다 살아나 재작년쯤에 삼만이천번째 죽음에서 부활하신 기네스 신기록 메시아가 되었을 것이다. 그만하면 삼도천에서도 간보기 금지라고 써붙였을걸.

p.193 개떡 같은 날씨 100번에 끝내주는 순간 한 번으로 대낮의 더위가 용서되었던 날도 있다. 습기에 습기를 더하는 비도 가끔은 괜찮다. 그런 날씨는 일상으로부터 나를 밀어내는 듯하다.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에서 비를 피하기도 하고, 비를 맞으며 짧은 거리를 달려보기도 하고, 갈아입을 계획이 없던 옷을 벗게 한다. 변수가 많은 계절이면서 동시에 그 변수에 몸을 내맡기는 충동성도 함께 주는 날씨다.

p.258 여름이 아닐 때도 여름밤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향수를 찾아다녔지만, 향수는 좋기만 해야 해서인지 그 냄새를 구현하지 못했다. 플랑크톤과 세균과 안 좋은 것이 섞인 냄새. 흙 먼지 냄새. 불운한 기운… 그 모든 게 합쳐져야 그리운 냄새가 되는 것인지.


두려움의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뜨겁고, 선명하고, 타는 듯한 햇살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지나치게 생생한 감각이 온몸을 찌른다. 매미 우는 소리, 비 내리는 하늘, 감은 눈 뒤로 시뻘겋게 타오르는 세상. 살다가 살다가 죽어버리라는 것만 같아 천천히 가라앉다 흩어져버리고 싶은 나 같은 종자에게는 겨울의 적막이 그저 숨통 트일 구석일 뿐이라서.

그래서일까.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도 어쩐지 이해하기 어려운 별종 같다. 이 살다 못해 죽어가는 계절에 사랑할 구석이 있다니, 찐득하고 축축하게 젖어드는 온도에 낭만 비슷한 것이 들러붙는다니.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게 틀림없군요… 동시에, 대책없는 긍정 비슷한 것을 슬몃, 부러워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여름의 감정. 여름 맛. 귀여웠다 늘어졌다 하는, 내게 없는 것들.

p.73 너무 좋은 것은 자아를 파괴한다. 박살난 자아는 바로 재조립된다. (...) "애인 만들고 싶은 여자" 이런 문장을 읽기만 해도 내 마음속에는 어떤 이미지가 단번에 피어오른다. 너무 좋아서 마구 뛰어다니고 싶다. 이건 머리로 씹어서 몸으로 먹는 음식이나 다름없다. 내 몸이 있고 이 소설이 있는 게 아니라 이 소설이 있고 비로소 내 몸이란 게 만들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p.98 이 세상 것이 아닌 정신이야말로 이 세상을 놀라게 할 말을 한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의 정신을 저세상으로 보낸다. 정확히 그 에너지만큼 우리를 이 세상에 달라붙게 한다. 내가 궁금해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있으니까. 그가 우리의 언어로 말하고, 우리의 언어로 생각하니까.


하여간 그런 이유로 여름의 기분이란 뭘까, 절로 묻게 되는 것이다. 슬픔은 겨울의 전유물이라고, 마음껏 외로워할 수 있는 시간은 해가 낮고 밤은 긴 계절 뿐이라는 생각이 틀렸을지 모른다. 여름의 흔적 또한 묘한 슬픔과 아릿한 서글픔으로 남는다. 오래 앓은 사람의 몸이 그러하듯이. 그러니 "여름 좋아 인간"은 대책없는 처치 곤란의 재앙덩어리가 아니라 그저 온 몸으로 부딪히고 끌어안는 사람일지 모른다.

찬란한 청춘이나 상쾌한 웃음 따위는 차원 너머에나 존재하는 관념일 뿐인 계절.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하고 지나치게 가까워 눈을 감아도 소란하고, 숨막히는 더위와 축축한 공기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들러붙어오는 계절. 그 계절의 어느 구석을 사랑으로, 추억으로, 기다림으로 남겨두는 사람은 필경, 물렁한 웃음을 짓고 어깨에 힘을 빼는 법을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p.15 모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지옥을 돕는다. 이 지옥이란 것은 시기마다 달라져서, 사랑이 시작되기 전에는 욕망의 지옥이고, 사랑이 끝난 뒤에는 자기 내면과 혼자 남는 지옥이 펼쳐진다. 그리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처절하게 느끼게 하고, 제 발로 걸어 나오게 한다. 그것이 내가 그 여름에 배운 사랑의 힘이다.

p.164 생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은 어떤 순간 아주 순수하게도 보인다. 나는 그것을 반만 닮았다. 그는 상쾌한 것을 좋아한다. 지극히 행복한 상태는 시원하게 화장실에 다녀온 뒤 샤워하고 누워 있는 가뿐함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름의 에너지다.


아 싫다. 이대로 읽다간 외롭고 외로워 온몸이 안으로 웅크러들다 끝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을 슬쩍 접어두고 뜨거운 햇살을 그리워하게 될지 모른다. 이 미움과 두려움을 얼마간은 더 남겨두고 싶어진다. 그야, 무섭잖아. 달라진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충동에 발길을 맡기고 낯선 사람과 낯선 공기를 사랑해버린다는 건.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해서 가끔은 일 년 내내 지구를 떠나고픈 충동에 빠져들게 하는 계절을 조금쯤 사랑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에너지레벨의 저 반대편에 있는 사람 같은 이 계절이 귀여워지고 만다. 여름을 사랑하는 이를 사랑해버리고 만다. 충동적이고 기세등등한, 여름을 닮은 것들을.

p.4 내가 탐닉하는 여름의 이미지는 실제 여름과 별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하는 사랑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했던 사랑이 더 달콤하고 실감나며 애절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내가 글을 써서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실제보다 부풀리고 없는 것을 상상하면서 현실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느끼는 것. 사라진 것이 내 곁에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

p.246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자신이 인생에서 목격한 진실을 나름대로 말하고 싶어 하는 중인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보이는 지하실이다. 스스로의 고독에 짓눌려 편히 쉴 수 없는 이들을 기꺼이 환영하는 짓눌렸던 만큼 거기서 해방감과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쾌락을 느낄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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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탐정 허균 - 화왕계 살인 사건
현찬양 지음 / 래빗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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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오만 무서운 게 있다 해도, 사람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 그런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침대 밑의 괴물보다 무서운 것은 침대 밑에 있는 사람이라고.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반만 옳았다. 열 길이 아니라 스무 길, 가장 깊은 물 속보다도 알 수 없는 게, 당장 눈앞의 사람 아니던가. 얼마나 오래 알았든, 얼마나 가까이 했든.

결국 자기자신조차 알 수 없는 게 사람이다. 그러니 사람의 말만큼 못 믿을 게 또 있던가. 배우고 익히기는 하였으되 하필이면 사람 잡을 손이라, 죽은 사람도 사람이니 그 쪽으로 갈밖에. 그 와중에 가만 두면 맛 따라 멋 따라 휭하니 나돌아다닐 양반한테 코 꿰이고 손목 잡혀 한양 떠나 남도까지 내려온 의생 이재영의 앞날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p.40 "그저 그런 살인 사건이 괴담 하나로 애생이의 삶을 재구성하는 연극이 되지 않었소. 애생이를 죽인 사람은 그런 것까지 생각한 모양이지라. 아름다운 여인에게 걸맞은, 그럴싸한 최후의 이야기 말이어라." 나는 애생을 검험한 의원이다. 애생의 후두부를 강타하여 생을 빼앗은 것은 고작 고기 한 덩이였다. 한데 죽은 이를 다시 죽일 수 있는 것은 혓바닥 하나로구나.

p.68 "사람이 죽으면 아무 말도 못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산 사람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지만 도리어 죽은 사람은 진실만을 말하는 법이야."


제목 그대로, 작게는 먹는 것 좋아하고 노상 허허실실하는 남자와 함께하는 좌충우돌 수사기행이겠으나 그 이면에는 가늠할 수 없이 매서운 물음이 있다. 웃는 낯 뒤의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와 헤아릴 수 없는 증오를 품은 여자, 그리고, 묻고, 묻고 또 묻는 남자가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무엇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어중간하고 초라한 이가.

전란 후의 조선, 나라도 사회도 폐허가 된 가운데 명분만이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고 버티는 나라. 있는 집에는 고깃국에 과자가 오르고 없는 자는 헐벗은 땅의 풀뿌리조차 구하지 못해 굶어 죽는다. 같은 임금의 나라. 어버이 되시는 왕은 멀기만 하고, 반상의 경계는 지엄하기 짝이 없어 서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들. 뼛골까지 쥐어짜이다 죽을 미천한 것들.

p.244 "조선은 임금이 아니라 삼강에 지배되는 나라야. 그대도 알겠지만 삼강이라 함은 '신하는 군주를 따르고 자식은 아비를 따르며 아내는 남편을 따르는 것'인데,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을 죄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죄라 하여 강상죄로 처벌한단 말이지. 그런데 그 강상죄가 사회 전반을 모두 지배하고 있지 않나. (...) 모두가 틀릴 수 있음을 알고 바닥부터 시작하여 진실을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작점일세."

p.277 "조선인은 근본부터 잘못되었어요.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사람이 약간 이상한 이야기를 들으면 금방 반박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이상한 이야기를 들으면 이게 고도로 돌려 말한 농담인지 아니면 어떤 해학인지 알 수 없어 도리어 머리가 멍해진다는 것을 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온전히 믿을 수도, 그렇다고 등돌릴 수도 없이 불완전한 인물들이 매력적이다. 눈웃음 정도로는 택도 없는 불완전, 부조리. 환경의 한계고 성찰의 한계이며 어쩔 수 없는 오만 같은 것. 어쩌면 작중 신분의 격차는 종의 차이만큼이나 깊고 무서운 것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 다르게 살아왔기에, 빼앗겨본 적 없기에 알지도 이해하지도 그럴 의지조차 가져본 적 없을 무지, 비정함.

그러므로 돌아서는 시선끝이 매섭고 차갑다. 그 점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 데서 깊은 만족을 느낀다. 그래야지. 되도않는 동정을 덧대느니 어쩔 것이냐, 일갈하고 돌아서 잊어버리는 게 낫지.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겠거니, 죽어 썩어질 때까지 저러겠거니, 이해의 너머에 있겠거니… 어떤 수용은 불구대천의 원한과 한끗 차이 아닌지.

p.136 그는 좋은 양반일 뿐, 한 번도 이 땅의 백성이어본 일이 없다. 조선의 10분지 1, 아니 100분지 1에 해당하는 양반인 그는 100분지 99에 속하는 나의 마음은 영원히 제대로 알 수 없으리라. 비록 그에게 측은지심이 있다 하더라도.

p.179 "자넨 행동이 올곧은 사람이지. 말에서는 품위가 느껴져. 봐. 이토록 그대를 조롱했는데도 욕 한마디 할 줄 모르잖는가. 그것만 봐도 자넨 굶어본 적이 없는 게 확실하거든. 사람이 말이야, 배가 고프면 몸에 힘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힘도 떨어진다네. 굶주림을 안다고? 자네는 아무것도 몰라. (...) 나물밥이 별미라고? 한 번도 배고픈 적 없는 놈들 입에서나 나올 만한 말이 아닌가."


작가는 캐릭터의 입을 빌어 원망, 기쁨, 고개를 절로 떨구게 하는 죄책감 앞에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있는 이를 끌어앉히며 말한다. 먹어. 먹고 얘기해. 욕을 하든 펄펄 뛰든 뭘 하든, 일단 먹고나서 해. 밥부터 먹어 일단.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왜 그랬냐고, 아릿하고 참담한 원망 한 자락을 끌어안고도 꾸역꾸역, 눈물에 밥술을 눌러 삼키게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야기에는 슬픔이 묻어있다. 닿을 수 없는 이해의 너머에도 불구하고 함께하겠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이름의 단단한 그것. 마지막 장면처럼 들이닥치는 이야기가 어디로 향하게 될까. 그들의 여정이 이것으로 끝이 아니기를 빈다. 설령 그 끝이, 채 씹어 삼키지 못한 무언가일지라도.

p.17 "난 너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허형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듯했지만 내뱉지는 않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밥그릇에서 밥 한 숟갈을 크게 떠서 내 쪽으로 옮겨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봉밥으로 볼록하게 솟은 내 주발 위에 남산만 한 것이 하나 더 생겼다. "많습니다." "내 잔소리가 듣기 싫거들랑 잠자코 먹어라."

p.308 허형은 마치 울 것처럼 눈동자가 새빨갛게 변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하지만..." 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그다음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어쩌면 그 뒤에 미안하다는 말이 들려올까 해서.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내가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면 자네는 또 나를 싫어하게 될 테지. 난 그런 것은 견딜 수 없어."


*도서제공: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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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캐리어 안에 든 것
듀나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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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가정이 있다. 통제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며 공정, 일종의 비합리적 사건이 일상에 들이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절대적이고 순진한 믿음. 어떤 사건은 그 믿음을 바닥부터 흔들어 무너뜨린다. 일상을 뒤틀고 '내일'을 빼앗는다. 지난 겨울이, 그 이전의 기나긴 시간과 거듭된 실망이 그래온 것처럼.

미래는 현재에, 상상은 실재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그 말은 곧, 픽션이야말로 현실을 가장 잘 반영하는 장르라는 뜻이다. 지난 겨울 이후 한국 문학에는 어떤... 뚜렷한 금이랄지, 골이랄지. 흔적이 남았다.

p.21 "이전에는 중요했지. 인간인가 아닌가. 하지만 대화가 가능한 온갖 지적 존재들이 만들어지며서 우린 그 구분을 포기해버렸어. 우주선이건, 스테이션이건, 안드로이드건, 산업 로복이건, 개량된 다른 동물이건, 우린 모두 시민이야."

p.151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시간인 세계의 지식을 습득하고 시간여행 장치를 이식받아 시간인이 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였다. 하지만 목표는 하나의 미래가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끊임없이 그들이 만든 수많은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인 세계에서 미래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실 이번 뿐만이 아니다. 상상 이상의 군중이 목소리를 높일 때, 혹은 누군가가 입 한 번 떼보지 못하고 사라졌을 때. 그 때마다 문학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 먼 시간의 아, 이 때면, 하고 되뇌게 했다. 오래된 흉터를 더듬게 하듯이. 그것은 때로는 희미한 추상으로, 때로는 채 아물지 못한 피흘림으로 남아있다.

흔히들 부서진 세계, 라고들 하지만, 실상 이 사회가 성한 꼴이었던 적이 드물지 않은가. 그러니 필요한 것은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이다. 적어도 퇴보하지는 않으리란 확신이다. 이 작고 희미한 것에 얼마나 발목 잡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후기에서 밝히듯 이야기는 현재를 떨칠 수 없기에.

p.143 불가사리들은 인간을, 새끼를 만드는 재료로 보았다. 그들은 무덤을 파내 시체의 뼈를 파냈고 그 위에 살과 금속 껍질을 입혔다.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공격에 나섰지만 모두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몇 달 뒤 그들의 얼굴을 한 새끼들이 태어났다. 나느 새끼의 얼굴에서 죽은 친구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낯선 짐승이 내 친구의 두개골 안에서 살고 있었다.

p.218 "존재할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존재하기를 멈춘 게 아닐까요. 2억 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전 진짜로 그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인간들의 AI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고 알고 싶은 모든 것을 다 알아낸 뒤에도 굳이 존재해야 할까요."


언젠가, 지독히도 길었던 어느 계절은 기억이 희미해지고 이 시대를 경험한 적 없는 이들에게 내가 온몸으로 겪은 사건, 그래, 그 사건들은 일종의 키워드로 남게 될 것이다. 표식처럼, 표지자처럼. 숫자와 회상으로 남을 것이다.

그 때의 SF는, 상상은 무엇을 말하게 될까. 어디를 향해 도약하고, 뻗어나가게 될까. 그 세계의 이야기는 무엇에 대해 '우리'를 말하게 될 것인가. 이 작가는 어떤 답을, 정해진 안도를 내놓는 대신 시간을 넘고, 익숙한 관념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이야기로 선형적 시간 개념을 태연히 무너뜨린다.

p.45 아무 흠도 없는 하얗고 완벽한 공과 같았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이번 공은 표면의 80%가 정교한 패턴으로 덮여 있었다. (...) 저들을 그대로 둔다면 다음엔 무엇을 만들까.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p.179 "도대체 너랑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저 밑에서 아직도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을 봐. 다들 역사의 역류에 맞서는 싸움을 하고 있어. 우리에겐 아닐 수 있어도 저 사람들에게 그 싸움은 의미가 있어. 결국 저 사람들이 겪는 역사는 하나뿐이니까 하지만 우린 뭐야? 우린 여기서 무슨 의미가 있지? 도대체 너랑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그런 이유로 읽는 내내 몇번이고 물었다. "우리"가 없음에도 어떻게 이다지도 우리의 이야기란 말인가. 지금, 여기, 우리에 낯선 이야김에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지금 이곳을 비춰낸단 말인가. 인간-아님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인간을 비춰내는가. 필연히 규명 불가한 내밀함을 지닌 수많은 것들은 어디에서 와서, 무엇으로 화하는가.

여섯 편의 이야기는 달콤한 희망을 주지 않는다. 내놓아야 할 확언 비슷한 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대신, 자리를 남겨둔다. 미래의 당신이, 어딘가의 누군가가 와닿을 곳을, 빼앗을 수 없는 '그의 것'을. 이제야 이해한다. 그의 이야기가 여전히 최전선에 서 있다는 말의 의미를.

p.33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들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상황이 올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질문이란 타자에게서 오고, 상상력이란 경험에서 오는 법인데...

p.105 "우리는 성장하고 있었고 성장을 갈망했습니다. 우리는 채 의원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머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같이 성장하기를, 그를 통해 스스로 길을 찾길 바랐어요. 그 길이 꼭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곳으로 향하지 않아도."



*도서제공: 갈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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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스펙터클, 민주주의 - 새로운 광장을 위한 사회학
김정환 지음 / 창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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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누군가에게는 지난 12월 3일 밤 11시, 누군가에게는 2022년 3월 9일,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이전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수많은 민중이 광장에 나섰다. 누군가는 국민, 또다른 누군가는 시민, 각기 다른 이름으로. 한국 사회는 순식간에 어떤, '이전'으로 휩쓸렸다. 광장의 성원들은 제각기 다른 이미지인 동시에 하나의 개념으로 호명되었다.

그로부터 반 년이 넘게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을 잃고 또 회복하였는가. 혹자는 광장의 발생을, 또다른 누군가는 광장의 종언을 주장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광장은 공론장의 명맥을 이었다고도, 형성 자체에 실패했다고도 말해진다. 민주주의는 '부활된' 동시에 여전히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그 안에서 광장의 주체이자 주력으로 기능한 민은 어떻게 기능하고, 표상되며, 정체화하는가.

p.7 12월 4일 나뿐만 아니라 아마도 많은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평소와 같이 목격했을 풍경은 한국처럼 고도로 복잡해진 사회가 계엄과 같은 돌출적 사건으로는 쉽게 멈추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쿠데타 시도는 너무나 시대착오적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누군가 계엄이라는 비상사태를 기획하는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일상적인 노동을 묵묵히 준비하고 수행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기도 했다.

p.64 한국의 민주주의는 폭군이나 독재자가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선 이들, 특히 수많은 민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흡수하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희생을 달래기라도 하듯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며 중얼거렸고, 뒤이어 다시 피를 바치는 역사를 되풀이해왔다.


비일상이 일상을 집어삼킬 때마다 그러하듯, 불법 계엄 선포 이후 일상의 유지와 개념의 회복, 그리고 존재 투쟁의 간극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의의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묻고 답하는 과정이 동시에 '정의'의 정의를 차지하기 위한 경합의 연장이었다.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그 주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에서 민중이 주인이었던 때가, 진정 민주주의 사회였던 적이 있는가?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무엇으로, 어떻게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되는가? 이른바 '촛불혁명' 이래로 새삼스레 인식된 타국의 시민저항에 역시나 새삼스레 실망스럽고 부끄럽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일 것이다. 대관절 한국인이 자부하는 '민주화운동'의 이미지의 핵심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p.119 우리는 공식 교육, 독서, 보도, 대중매체 등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극을 접하지만 어떤 경로와 매체가 되었든 죽음의 장면을 마주할 수밖에 없고 (...) 역사라는 것은 자질구레한 일상과는 구별되는 차원에 존재한다는 감각, 또한 그것은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풍경이 아니라, 나날의 생활을 난데없이 찌르고 들어와서 중단시키는 예외적인 장면들로 구성된다는 감각 같은 것 말이다.

p.240 죽은 자는 산 자의 응답을 통해, 산 자는 죽은 자의 응원을 통해 구제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역사란 민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이러한 상호구제를 통해서 결국엔 자기구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구상하고 건설하고 지키는 일이란 이러한 거룩한 믿음을 창출하고 동원해내는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제2의 봄'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각종 미디어와 무용담, 교육자료로 숱하게 반복된 민주화투쟁의 이미지는 '열사'와 '소시민'으로 양분되어 있다. 다수의 소시민은 '열사'에 가해진 충격적인 죽음과 폭력을 목도하고 각성해 거리로 뛰쳐나오는 군중이 된다. '이전'을 경험한 적 없는 청년극우세대의 계엄 옹호는 사회 전반을 절망에 빠트렸다. 이것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한국 사회의 쇼맨십 선거구도와 팬덤정치, '대안사실'의 세대적 확산과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가? '자격없는' 연사들의 연대발언에 대한 비난과 "품위" 운운은, 대의와 완결성은 무엇으로 표상되고 숭고한 열정은 어떻게 끌어올려져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과 어떻게 중첩되는가. 광장의 승리를 외치는 이들에게 먼저 광장에 나선, 항상 광장에 있었던, 그 광장을 열었던 혹은 모두가 떠난 투쟁의 현장에 남겨져 재차 고립된 이들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p.328 이처럼 죽음과 부활, 결집과 봉기라는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하므로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민의 몸이 찢어졌다가 합쳐지는, 대단히 예외적이고 비일상적인 사건으로 여겨지게 된다. (...) 민주주의를 희구하면서 광장을 가득 메운 집합적 신체의 장관이 출현하기를 바라는 것은 '신성한 민주의 제단'에 바쳐질 누군가의 죽음을 의도치 않게 찬양하는 것이거나, 은밀히 그러한 희생을 요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344 민주주의가 민에 속하는 이들과 속하지 못한 이들을 나누고 그 중 누군가는 민주주의로부터 배반당하는 이러한 역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민주주의라는 영화를 잘못 봤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극장 밖에 있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있으면서도 민주주의라는 영화 속 장면을 반복하여 극적인 역사를 재생산하는 것이 자신의 신념이자 진정성이라 여겨왔던 관행과 작별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사회에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이른바 '광장에 나선 이들'을 추앙하기에 앞서, 그들을 무구한 희생양으로 못박기에 앞서 말이 되지 못하는 말로, 믿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음으로서 자신이 겪은 참상을 전달하려는 이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인식의 경계를 드러내는 일이다. 몸으로 표상되는 민, 민으로 표상되는 몸을 일종의 환상적 허구로 남겨두지 않는 일이다.

민주사회를 부르짖는 비민주적 욕망을 지적하는 것은 퍽 고되고 마뜩찮은 길일 것이다. 손쉬운 수사가 된 '극우'라 매도당할 것이다. 이미 그러하듯이. 현실이 아무리 극적이라 할지라도 개인은 표상 너머의 복잡계로 존재한다. 관객이자 주체로서, 양자의 역할을 모두 끌어안기 위해 기꺼이 부끄러워지자. 무고한 피해자로서의 민이라는 광휘를 벗어던질 때, 비로소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다.

p.351 또한 더 크고 강하며 많은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대적하고 제압해야 할 '적'과의 관계 속에서 민주주의를 사고하게 한다. 민주주의의 적이 선명하고 강력할수록 민주주의의 부실한 성과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거나 도덕적 흠결에 대한 비판을 희석시키는 것이 가능해지며, 이러한 '반민주'세력을 발견하고 지목하고 규탄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활동의 거의 전부가 된다.

p.363 과연 한국의 민은, 즉 우리는 누군가 희생되는 장면을 바라보며 분노하다가 무대로 뛰쳐나가 스스로 스펙터클이 되어 악한을 퇴치하고 거대한 자신의 모습에 도취한 채 내려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긍정으로 답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주체인 민, 즉 우리가 민주주의를 상연하고 표상하는 방식을 돌아보고 바꾸어나가 면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도서제공: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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