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캐리어 안에 든 것
듀나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에게는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가정이 있다. 통제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며 공정, 일종의 비합리적 사건이 일상에 들이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절대적이고 순진한 믿음. 어떤 사건은 그 믿음을 바닥부터 흔들어 무너뜨린다. 일상을 뒤틀고 '내일'을 빼앗는다. 지난 겨울이, 그 이전의 기나긴 시간과 거듭된 실망이 그래온 것처럼.

미래는 현재에, 상상은 실재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그 말은 곧, 픽션이야말로 현실을 가장 잘 반영하는 장르라는 뜻이다. 지난 겨울 이후 한국 문학에는 어떤... 뚜렷한 금이랄지, 골이랄지. 흔적이 남았다.

p.21 "이전에는 중요했지. 인간인가 아닌가. 하지만 대화가 가능한 온갖 지적 존재들이 만들어지며서 우린 그 구분을 포기해버렸어. 우주선이건, 스테이션이건, 안드로이드건, 산업 로복이건, 개량된 다른 동물이건, 우린 모두 시민이야."

p.151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시간인 세계의 지식을 습득하고 시간여행 장치를 이식받아 시간인이 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였다. 하지만 목표는 하나의 미래가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끊임없이 그들이 만든 수많은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인 세계에서 미래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실 이번 뿐만이 아니다. 상상 이상의 군중이 목소리를 높일 때, 혹은 누군가가 입 한 번 떼보지 못하고 사라졌을 때. 그 때마다 문학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 먼 시간의 아, 이 때면, 하고 되뇌게 했다. 오래된 흉터를 더듬게 하듯이. 그것은 때로는 희미한 추상으로, 때로는 채 아물지 못한 피흘림으로 남아있다.

흔히들 부서진 세계, 라고들 하지만, 실상 이 사회가 성한 꼴이었던 적이 드물지 않은가. 그러니 필요한 것은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이다. 적어도 퇴보하지는 않으리란 확신이다. 이 작고 희미한 것에 얼마나 발목 잡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후기에서 밝히듯 이야기는 현재를 떨칠 수 없기에.

p.143 불가사리들은 인간을, 새끼를 만드는 재료로 보았다. 그들은 무덤을 파내 시체의 뼈를 파냈고 그 위에 살과 금속 껍질을 입혔다.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공격에 나섰지만 모두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몇 달 뒤 그들의 얼굴을 한 새끼들이 태어났다. 나느 새끼의 얼굴에서 죽은 친구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낯선 짐승이 내 친구의 두개골 안에서 살고 있었다.

p.218 "존재할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존재하기를 멈춘 게 아닐까요. 2억 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전 진짜로 그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인간들의 AI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고 알고 싶은 모든 것을 다 알아낸 뒤에도 굳이 존재해야 할까요."


언젠가, 지독히도 길었던 어느 계절은 기억이 희미해지고 이 시대를 경험한 적 없는 이들에게 내가 온몸으로 겪은 사건, 그래, 그 사건들은 일종의 키워드로 남게 될 것이다. 표식처럼, 표지자처럼. 숫자와 회상으로 남을 것이다.

그 때의 SF는, 상상은 무엇을 말하게 될까. 어디를 향해 도약하고, 뻗어나가게 될까. 그 세계의 이야기는 무엇에 대해 '우리'를 말하게 될 것인가. 이 작가는 어떤 답을, 정해진 안도를 내놓는 대신 시간을 넘고, 익숙한 관념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이야기로 선형적 시간 개념을 태연히 무너뜨린다.

p.45 아무 흠도 없는 하얗고 완벽한 공과 같았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이번 공은 표면의 80%가 정교한 패턴으로 덮여 있었다. (...) 저들을 그대로 둔다면 다음엔 무엇을 만들까.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p.179 "도대체 너랑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저 밑에서 아직도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을 봐. 다들 역사의 역류에 맞서는 싸움을 하고 있어. 우리에겐 아닐 수 있어도 저 사람들에게 그 싸움은 의미가 있어. 결국 저 사람들이 겪는 역사는 하나뿐이니까 하지만 우린 뭐야? 우린 여기서 무슨 의미가 있지? 도대체 너랑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그런 이유로 읽는 내내 몇번이고 물었다. "우리"가 없음에도 어떻게 이다지도 우리의 이야기란 말인가. 지금, 여기, 우리에 낯선 이야김에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지금 이곳을 비춰낸단 말인가. 인간-아님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인간을 비춰내는가. 필연히 규명 불가한 내밀함을 지닌 수많은 것들은 어디에서 와서, 무엇으로 화하는가.

여섯 편의 이야기는 달콤한 희망을 주지 않는다. 내놓아야 할 확언 비슷한 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대신, 자리를 남겨둔다. 미래의 당신이, 어딘가의 누군가가 와닿을 곳을, 빼앗을 수 없는 '그의 것'을. 이제야 이해한다. 그의 이야기가 여전히 최전선에 서 있다는 말의 의미를.

p.33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들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상황이 올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질문이란 타자에게서 오고, 상상력이란 경험에서 오는 법인데...

p.105 "우리는 성장하고 있었고 성장을 갈망했습니다. 우리는 채 의원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머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같이 성장하기를, 그를 통해 스스로 길을 찾길 바랐어요. 그 길이 꼭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곳으로 향하지 않아도."



*도서제공: 갈매나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