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스펙터클, 민주주의 - 새로운 광장을 위한 사회학
김정환 지음 / 창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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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누군가에게는 지난 12월 3일 밤 11시, 누군가에게는 2022년 3월 9일,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이전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수많은 민중이 광장에 나섰다. 누군가는 국민, 또다른 누군가는 시민, 각기 다른 이름으로. 한국 사회는 순식간에 어떤, '이전'으로 휩쓸렸다. 광장의 성원들은 제각기 다른 이미지인 동시에 하나의 개념으로 호명되었다.

그로부터 반 년이 넘게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을 잃고 또 회복하였는가. 혹자는 광장의 발생을, 또다른 누군가는 광장의 종언을 주장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광장은 공론장의 명맥을 이었다고도, 형성 자체에 실패했다고도 말해진다. 민주주의는 '부활된' 동시에 여전히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그 안에서 광장의 주체이자 주력으로 기능한 민은 어떻게 기능하고, 표상되며, 정체화하는가.

p.7 12월 4일 나뿐만 아니라 아마도 많은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평소와 같이 목격했을 풍경은 한국처럼 고도로 복잡해진 사회가 계엄과 같은 돌출적 사건으로는 쉽게 멈추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쿠데타 시도는 너무나 시대착오적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누군가 계엄이라는 비상사태를 기획하는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일상적인 노동을 묵묵히 준비하고 수행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기도 했다.

p.64 한국의 민주주의는 폭군이나 독재자가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선 이들, 특히 수많은 민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흡수하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희생을 달래기라도 하듯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며 중얼거렸고, 뒤이어 다시 피를 바치는 역사를 되풀이해왔다.


비일상이 일상을 집어삼킬 때마다 그러하듯, 불법 계엄 선포 이후 일상의 유지와 개념의 회복, 그리고 존재 투쟁의 간극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의의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묻고 답하는 과정이 동시에 '정의'의 정의를 차지하기 위한 경합의 연장이었다.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그 주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에서 민중이 주인이었던 때가, 진정 민주주의 사회였던 적이 있는가?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무엇으로, 어떻게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되는가? 이른바 '촛불혁명' 이래로 새삼스레 인식된 타국의 시민저항에 역시나 새삼스레 실망스럽고 부끄럽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일 것이다. 대관절 한국인이 자부하는 '민주화운동'의 이미지의 핵심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p.119 우리는 공식 교육, 독서, 보도, 대중매체 등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극을 접하지만 어떤 경로와 매체가 되었든 죽음의 장면을 마주할 수밖에 없고 (...) 역사라는 것은 자질구레한 일상과는 구별되는 차원에 존재한다는 감각, 또한 그것은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풍경이 아니라, 나날의 생활을 난데없이 찌르고 들어와서 중단시키는 예외적인 장면들로 구성된다는 감각 같은 것 말이다.

p.240 죽은 자는 산 자의 응답을 통해, 산 자는 죽은 자의 응원을 통해 구제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역사란 민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이러한 상호구제를 통해서 결국엔 자기구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구상하고 건설하고 지키는 일이란 이러한 거룩한 믿음을 창출하고 동원해내는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제2의 봄'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각종 미디어와 무용담, 교육자료로 숱하게 반복된 민주화투쟁의 이미지는 '열사'와 '소시민'으로 양분되어 있다. 다수의 소시민은 '열사'에 가해진 충격적인 죽음과 폭력을 목도하고 각성해 거리로 뛰쳐나오는 군중이 된다. '이전'을 경험한 적 없는 청년극우세대의 계엄 옹호는 사회 전반을 절망에 빠트렸다. 이것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한국 사회의 쇼맨십 선거구도와 팬덤정치, '대안사실'의 세대적 확산과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가? '자격없는' 연사들의 연대발언에 대한 비난과 "품위" 운운은, 대의와 완결성은 무엇으로 표상되고 숭고한 열정은 어떻게 끌어올려져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과 어떻게 중첩되는가. 광장의 승리를 외치는 이들에게 먼저 광장에 나선, 항상 광장에 있었던, 그 광장을 열었던 혹은 모두가 떠난 투쟁의 현장에 남겨져 재차 고립된 이들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p.328 이처럼 죽음과 부활, 결집과 봉기라는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하므로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민의 몸이 찢어졌다가 합쳐지는, 대단히 예외적이고 비일상적인 사건으로 여겨지게 된다. (...) 민주주의를 희구하면서 광장을 가득 메운 집합적 신체의 장관이 출현하기를 바라는 것은 '신성한 민주의 제단'에 바쳐질 누군가의 죽음을 의도치 않게 찬양하는 것이거나, 은밀히 그러한 희생을 요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344 민주주의가 민에 속하는 이들과 속하지 못한 이들을 나누고 그 중 누군가는 민주주의로부터 배반당하는 이러한 역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민주주의라는 영화를 잘못 봤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극장 밖에 있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있으면서도 민주주의라는 영화 속 장면을 반복하여 극적인 역사를 재생산하는 것이 자신의 신념이자 진정성이라 여겨왔던 관행과 작별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사회에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이른바 '광장에 나선 이들'을 추앙하기에 앞서, 그들을 무구한 희생양으로 못박기에 앞서 말이 되지 못하는 말로, 믿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음으로서 자신이 겪은 참상을 전달하려는 이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인식의 경계를 드러내는 일이다. 몸으로 표상되는 민, 민으로 표상되는 몸을 일종의 환상적 허구로 남겨두지 않는 일이다.

민주사회를 부르짖는 비민주적 욕망을 지적하는 것은 퍽 고되고 마뜩찮은 길일 것이다. 손쉬운 수사가 된 '극우'라 매도당할 것이다. 이미 그러하듯이. 현실이 아무리 극적이라 할지라도 개인은 표상 너머의 복잡계로 존재한다. 관객이자 주체로서, 양자의 역할을 모두 끌어안기 위해 기꺼이 부끄러워지자. 무고한 피해자로서의 민이라는 광휘를 벗어던질 때, 비로소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다.

p.351 또한 더 크고 강하며 많은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대적하고 제압해야 할 '적'과의 관계 속에서 민주주의를 사고하게 한다. 민주주의의 적이 선명하고 강력할수록 민주주의의 부실한 성과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거나 도덕적 흠결에 대한 비판을 희석시키는 것이 가능해지며, 이러한 '반민주'세력을 발견하고 지목하고 규탄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활동의 거의 전부가 된다.

p.363 과연 한국의 민은, 즉 우리는 누군가 희생되는 장면을 바라보며 분노하다가 무대로 뛰쳐나가 스스로 스펙터클이 되어 악한을 퇴치하고 거대한 자신의 모습에 도취한 채 내려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긍정으로 답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주체인 민, 즉 우리가 민주주의를 상연하고 표상하는 방식을 돌아보고 바꾸어나가 면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도서제공: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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