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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시대 - 독립을 넘어 쇄신을 꿈꾼 식민지 조선 사회주의 유토피아
박노자 지음, 원영수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평점 :
한반도 분단 이후 남한 정치사회계의 무조건 반사, 가히 만능 트리거라고 불러도 좋을 게 있다면 두말 할 것 없이 공산주의,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일 것이다. 기실 들여다보면 그 내용은 전혀 낯설지 않으나 무슨 불에 덴 것처럼 입에 담기조차 조심스러워하는 그 이름 공산주의, 붉은 깃발은 흔한 수사처럼 정말 중국과 함께 한반도로 흘러들어온 것일까?
한국은 올해로 광복 80주년, 조선공산당 창당으로는 100주년을 맞이했다. 일제강점기와 전간기 모두에 한반도에는 공산주의 운동이 자리잡았고, 그 사이 여러 단체가 생겨났다 사라지며 충돌하기를 반복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분명 하루아침에 생겨난 사조와 충돌이 아닐텐데도, 그 이름과 단체들은 근현대사 교육에서도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마치 지워진 것처럼.
p.39 조선과 일본 또는 다른 곳에서 전간기 급진파들의 한계가 무엇이었든, 그들은 많은 측면에서 농업의 재구조화, 탈식민화, 성평등과 복지국가가 구현될 1945년 이후 세계의 선구자였다.
p.93 근대성은 사회적 이동의 새로운 패턴과 범게급적 사회적 집합체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이동을 가능케 했는데, 공산주의자는 누구보다 여행을 더 많이 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는 (...) 많은 노동자는 시골에서 올라온 이주민, 일자리를 찾아 서울이나 다른 고성장 산업도시로 온 농촌 일꾼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이어진 1922년 소련 건국은 자연히 식민지 조선과 각국의 망명운동가, 때로는 유학파 지식인에게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분제 철페, 노동자의 조직, 노동환경 개선과 부의 재분배 등 국경을 넘어 구질서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필연히 민족주의와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유학파와 대중, 토착노동자와 이민자 사회까지 '븕은 물결'에 온 성원이 참여한 것에 의심할 바가 없다.
저자는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코민테른의 유산 등 식민지배기의 '조선인'의 발길이 닿은 곳곳에서 수집한 문헌과 증언을 토대로 평등사회와 독립에의 이상과 피가 넘쳐흘렀던 혁명과 투쟁의 시기 조선과 식민지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운동과 연구 양면에서의 궤적을 '붉은 시대'의 이름으로 재조명한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좌파 운동'은 어디를 떠돌고 있는가.
p.158 공산주의 강령은 사회적 급진주의, 정치적으로 포용적 태도, 경제적 실용주의, 그리고 민주적이고 해방적인 모더니즘의 유기적 결합을 의미했고, 이는 최대한의 대중적 지지를 받아낼 수 있도록 계산된 것이었다. (...) 러시아의 혁명적 볼셰비키 강령과 유사하게, 조선 공산주의 강령은 1945년 전후로 좌파의 대의에 대한 상대적으로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저 입말로나 이용되는 혁명과 붉은 깃발은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떤 세상을 위해 투쟁하는가. 백 명이 모이면 백 한 개의 노선으로 갈라지는 분열과 대립의 연속은 더이상 낯설지 않은 실망을 안겨주며 고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힘입은 극도의 폭력이 망령처럼 득세하는 요즘에조차 저항과 혁명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현학적인 밥그릇 투정의 이미지에 잡아먹히고 있다.
시공을 톺아보는 이 여정에서 독자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전쟁과 독재를 거치며 거듭된 이념 탄압에 휩쓸린 지적, 사회적 탐구와 현장의 목소리를 다시 듣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과거를 실패가 아닌 의도된 망각으로 이해할 때, 끊임없는 다툼과 분열을 단결된 투쟁으로 선회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위기에서의 돌파구를, 너무 오래 닫혀있어 벽이라 여겨지는 잊혀진 문을 열어젖힐 수 있을 것이다.
p.308 1930년대 후반까지 풀뿌리 조선의 대부분에 침투했던 좌파 지하활동가들의 네트워크는 대개 한국전쟁 전후로 절멸했다. 그러나 1980년대 노학연대운동은 그 자체로 남한에서 전후 사회주의적 전통의장기적 발전의 결과로, 노동 활동가 한 세대 전체를 사회주의사상으로 교육시켰다.
p.309 남북한의 사회주의는 실패라기보다는 고점과 저점, 강화와 침체, 패배와 승리를 반복하는 투쟁의 연속이다. 사회주의는 20세기 한반도에서 승리하지 못했고, 다른 곳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투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런 투쟁은 조선(한국)의 근대사와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