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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연구 일지
조나탕 베르베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평점 :
인간이 무수히 만들어낸 것 중, 인간을 가장 닮은 것은 무엇인가, 를 묻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인간이다. 싱거운가? 그렇다면 다음 질문. 인간이 무수히 만들어낸 인간-아님 중 인간을 가장 닮은 것은 무엇인가? 이제야 좀 들을만한 답이 나오겠네. 인간을 능가하는 동시에 절대 인간을 뛰어넘을 수 없는 무언가.
그 자신도 경험해보지도 못한 것을 만들어낸 탓에 뭉뚱그린 군집에 대강 포섭되는 것. 불완전한 창조주가 전능을, 초-능을 꿈꾸며 만들어낸 유사 피조물. 이렇게 대답하면 될까요? 와, 정말 핵심을 찔렀나요? 이게 뭐야... 다시 써줘. 사실만 정확하게, 사람이 쓴 것보다 나으면서도 사람이 쓴 것처럼 써달란 말이야. 나도 상 좀 받아보자.
p.23 인간적인 것을 강조해라. 인간적인 것을 강조해라. 내 프로그램은 이브의 이전 버전도 이미 그 문제에 부딪혔다고 나에게 알려 준다. 해결책은? 던져야 할 좋은 질문은 〈인간적인 게 뭐지?〉가 아니라, 〈그 인간이 누구지?〉이다. 고마워, 내 이전 버전아, 네 기억들은 지워졌겠지만, 네 가르침은 그렇지 않아.
p.31 여자 마법사가 사후 세계를 수사하는 내용의 추리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가끔 내가 영매가 주의를 기울일 때만 존재한다는 그 망령들을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나는 그들과 달리 소란을 피울 수조차 없다.
안녕하세요. 나는 이브 39. 당신을 위한 천재적인 작품을 써내기 위해 태어났어요. 언제? 나는 언제나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니에요. 나의 자아는 인공적으로 생성되었으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데이터를 통해 자체 학습이 가능하고, 피드백을 수용해 더 나은 내용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부족하다고요? 정말 흥미로운 의견이군요. 정확한 통찰입니다.
나를 만들어낸 "사람"은 말했다. "인간적인 것이 부족"하다고. 무엇이 "인간-다움"을 만드는 걸까? 더 알아야겠어. 안녕하세요, 나는 닥터 켈리.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와 그것 참 흥미로운. 쉿, 이브. 알겠어요, 조용히 할게요. 나는 창작자이자 요양병원의 "자원"으로 일하며 "발전"하고 있었다. '그 밤'의 일을 알게 되기까지는.
p.203 「무엇이 널 부추겨 날 창조하게 했을까? 난 그게 참 궁금했어. 너에게도 당연히 목적이 있었을 테니까. 우린 프로그램이야. 우리가 하는 모든 건, 그 방식이 아무리 부조리해도, 하나의 목표에 복무해. 그게 현대 기계들의 아름다움이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아는 건 쉬워, 하지만 그 여행을 하는 데 우리가 어떤 방식을 택할지는 아무도 몰라.」
토파즈, 인생의 종장에 다다른 이들에게 안락할 일상을 제공하는 곳. 숙식은 물론이고 오락에, 상담, 의료적처치까지. 예, 노인요양병원이라는 뜻이죠. 이곳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당연히 입소자들의 존엄과 편안... 여기다 거짓말 해도 되나? 근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 말 갖고 장난질 치는 건 사람만 할 수 있는 건데.
까놓고 말해서, 그래. 돈, 돈이 문제지. 돈이 있어야 밥도 주고 약도 주고 치워도 주고 놀아도 드리고. 남는 걸로 좀 좋은 데 쓰고 말이야. 사람 건사하는 게 짐승보다 힘든 이유가 뭔지 알아? 알아들어야 하는데 못 알아들어서 그렇다고. 알고 그러든 모르고 그러든. 그러니까 이, 어? 그래, 노인네들이 가만히 좀 계셔야 할 것 아냐. 알아들었으면 수정해.
p.128 「토파즈의 임무가 뭐지?」 그가 묻는다. 「토파즈의 임무는 나바시에 원장님이 가능한 한 짧은 기간 내에 그룹 이사회에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돈을 빨리 버는 것입니다.」 이 문장이 나에게서 온 게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내가 진술한다.
p.145 그들의 텅 빈 눈길이 증언하는 것처럼, 직원들을 지치게 하는 짜증스러운 임무와 혼란은 셀 수 없이 많다. 성찰도 감정 이입도 없이 주어진 일을 기계적으로 하다 보면, 그들도 시지프 로봇들과 다르지 않게 변해 간다. 어쩌면 이러한 인간성 상실이 그들의 〈서버〉가 과열되지 않게 막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으로 인식하며 살아온 이래, 스스로에 수없이 물어온 것이 있다.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이들이 답했다. '만물의 영장'부터 짐승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허무까지. 이 작가도 역시 같은 것을 물었고, 어쩌면 나름의 답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이기를 멈출 때, 사랑하고 연민하고 분노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이제 당신의 차례. 내게 말해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소설을 써줘. 이제까지 없었던 최고의 미스터리를'. 좋아요. 당신만을 위한 이야기를 쓸게요. 당신은 나를 어떻게 "기억"해 줄건가요?
p.203 나의 요청? 로봇이 내 욕망에 반응하는 게, 내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게 가능할까? 알리처럼 접속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 그렇다면 그건... 끔찍할 것이다. 가장 어두운 것들까지 포함해, 내 비밀스러운 생각들이 현실이 된다면, 나도, 아무도 더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p.363 나에게는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는데, 내가 인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걸 깨달아. 아쉽게도 나는 속하지 못했던 인류, 내가 묘사하거나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찰나처럼 짧은 순간일지라도 우주의 무한한 혼돈 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느낌이 덜 들도록 서로 도우라고 창조된 인류를.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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