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3
요 네스뵈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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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이왕 죽는 거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죠? 작가가 주인공도 모자라 독자까지 알뜰살뜰 굴리고 갈구다 볶아먹고 찜 쪄먹는 해리 홀레 시리즈가 13번째 작품으로 돌아왔다. 나름 파릇한 맛이 있던 주인공도 그새 이제 어딜 봐도 손색없는 중년이 되어 세월의 풍파를 남들 몫까지 곱절로 얻어맞은 몰골이 되어 독자와 함께하고 있다.

형사소설의 주인공이란 으레 정의감과 의욕으로 뭉친, 신념과 매력의 결정체 비슷한 것이 아니던가? 예, 아닙니다. 우리 해리 그 정도 아닌 수준을 넘어 그 근처에도 가본 적 없습니다. 있긴 했는데 그게 언제야. 독자도 가물가물하니 그냥 모른 척 하세요. 얘기가 기니까...

p.20 "사람들은 작가가 글에 쓰인 순서대로 생각했다고 여기거든. 사실 놀랄 일도 아니죠. 어쨌거나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벌어진 건 과거의 결과라고 믿으니까요. 그 반대가 아니라."

p.50 "뭐부터 말해야 할지. 불성실, 근무 중 중대 과실, 술에 취한 채 근무한 알코올의존자, 폭력 사건 여러 건, 약물남용 등등, 처벌은 피했지만 동료 한 명 이상의 죽음에 책임이 있고요. 요컨대 양심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잡아들인 범죄자 대부분보다 범죄를 더 많이 저지른 자죠. 게다가 같이 일하기에는 악몽 같은 자일 겁니다."


상처뿐인 땅, 그의 모든 것을 파괴한 오슬로를 떠나 LA에서 인간쓰레기는 좀 심했고, 일반쓰레기에 준하는 몰골로 살아가는 해리 홀레. 마시고, 또 마시며 돈이든 인생이든 둘 중 하나는 끝장날 때까지 술에 절어 살기로 한 그에게 또다시 운명같은 인연이 들이닥친다. 어떻게 된 인생이 쉬운 날이 없나. 죽지 못해 사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게.

거액의 빚을 지고 갱단에 쫓기는 여자, 루실에게 손을 내민 순간, 운명은 다시 그를 부른다. 돌아와요, 오슬로에. 사랑도, 기억도, 그리움도 켜켜이 쌓인 그 땅에. 절망과 고통으로 범람하는 기억에. 어째서 돌아온 걸까. 어째서 버릴 수 없는 걸까. 그는 묻는다. 대체, 왜.

p.496 "난 늘 동기를 찾았다는 걸 자네도 알 거야. 그래야만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물론 언제나 동기는 있었어. 하지만 동기가 밝게 빛나는 길잡이 별이 되어주지는 못하잖아? 이 사건처럼 어쨌거나 동기가 광기의 어둠 속에 갇혀 있을 때는 말이야. 그러면 나는 이유는 포기하고 방법에 집중하는 거야."


읽는 동안 무엇을 믿어야 할지 내도록 혼란스러웠다. 사람을? 핏빛 물든 어둠에 집어삼켜진 달조차도 다시금 차오르고 저문다는 것을? 악몽의 끝이 깨어날 수 없는 잠일지 아닐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었을지 모른다. 이 비참하고 처참한 세계에서 무엇이 당신을 일으켜세울지, 똑똑히 보라고. 무엇이 '그들'을 위선과 정의로 몰아가겠느냐고.

직전의 『칼』로부터 3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제각기 품은 수치심과 은밀한 공모가 잔잔히 깔려 이어지는 가운데,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을 다루는 솜씨가 크게 늘었다. 사람이 어디까지 부서지고 무너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던 전작과 다르게 그렇게 모조리 빼앗기고 망가뜨린 사람이 어떻게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지 않았나.

p.131 동물과 인간에게 도덕적 의무가 있다면 그건 그들의 본성, 부여된 역할에 따라 조화를 유지하고 섬세한 균형을 지키는 것일 터였다. 그래서 자연 속 모든 것은 언뜻 볼 때는 기괴하고 끔찍하고 잔인한 것 같아도 ─완벽하게 목적대로 기능할 때 아름다운 것이다. 죄악은 인류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세상에 생겨났고, 인간들은 자연의 의도를 외면하는 일이 가능한 수준의 성찰을 이루었다.

p.584 물론 준비한 복수가 상상했던 것처럼 달콤하지 않으리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새아버지의 씁쓸한 눈물 같은 맛은 아니어야 했다. 이런 식의 감정은 실망이라기보다 충격에 가까웠다. 그는 침대에 누운 사람이 불쌍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파괴하고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만든 사람인데도.


신뢰는 배신을 부르며, 순수는 악의에 처절히 짓밟힌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파괴당한 땅을, 다시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생각도 전에 나서는 마음 또한 존재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스스로를 있어야 할 곳에 밀어넣는 이가 있음을 믿는다.

어쩌면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이 "간단한 산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믿을 수 없는 비극이 일상의 안락을 언제든 깨부술 수 있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우리가 무언가를 의지해 살아갈 수 있다면, 사람이 파괴하는 사람을 지켜내는 것 또한 사람임을 알고 있다면. 그리하여 눈을 뗄 수 없는 미로와 추리 끝에 도달한 독자에게, 자 다음엔 어떻게 굴려볼까요.

p.657 "그것은 간단한 산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이 행복한 사람으로 떠났다고 믿습니다. 스톨레는 이 세상을 조금 더 견딜 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일에 가장 깊은 만족감을 느끼는 인류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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