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황제
오션 브엉 지음, 김지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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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자기 안에 천국을 갖고 살아간다. 행복이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케케묵은 구호가 아니다. 사람은 언제 죽는가? 현명한 그라지나가 말하길 주님이 잘했다, 하는 날? 아니다. 매일이 똑같이 희망없는 날의 연속임을 확신할 때, 기댈 곳도 기대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물론, 그렇게 이어지리라, 스스로에게 확언할 때, 사람은 죽는다. 마음이 죽으면 몸은 자연히 죽어버리므로. 환각에도 환상에도 그 무엇에도 의지할 수 없을 때. 소년의 이름을 묻기로 하자. 하이. 그래, 안녕. 아니, 이름이 하이라고요. 내 고향에서는 이렇게 인사해, 라바스, 너를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p.15 우리가 하트퍼드와 유일하게 공유하는 것은 바로 구급차인데, 그 도시에서 이곳이 충분히 가까운 덕분에 우리가 죽어갈 때나 친지도 없이 철제 들것에 실려갈 때면 구급차가 우리를 데리러 와준다. 우리는 변두리에서 살지만 중심부에서 죽는다. 우리 꿈의 영안실이 되는 강 옆, 가라앉는 둑 위에 서 있기 위해 우리는 모든 세금을 낸다.

p.118 어렸을 때 하이는 더 큰 삶을 원했다. 하지만 그가 얻은 것은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삶이었다. 하이는 모두가 즐겨 이야기하지만 그룹 포함한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큰 전쟁이 끝나고 14년 뒤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남자애는 평생을 가난하겠지. 장학금은 커녕 빚만 쌓인 아시아계는 평생 온갖 청구서에 파묻히겠지. 마약 중독, 학교는 중퇴, 그 날의 거짓말만 아니었다면 뭔가 달랐을까? 집도, 가족도 내 손으로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살다 죽겠지. 조금도 달라지지 않겠지.

그래서, 뛰어내리기로 했다. 왜, 그런 거 있지. 마침표보다는 덜 확실하게, 미끄러지듯이, 스르륵, 하면 삶이 이렇게, 그저 그렇게 여전하듯이 그저 그렇게 끝날거란 느낌으로. 말줄임표처럼. 죽겠다는 사람을 죽일 기세로 펄펄 뛰는 사람을 무슨 수로 이겨요. 그냥 살아도 저 노인보다 내가 먼저 죽겠는데.

p.202 "잘 들어. 이 나라는 말이야. (…) 고의로 전쟁을 일으켜서 세운 나라야. 파충류들이 정치인이나 유명인으로 변신한 다음 그 꼭두각시 인형들을 이용해 전쟁을 벌이거든. 자기네가 흡수할 나쁜 에너지가 부족해질 일이 없게끔. 이해 안 돼? 전쟁은 그들의 작물을 자라나게 해주는 거름인 셈이야."

p.313 "우리가 아름다울지는 몰라도, 패배자이기 때문에 그런 건 소용이 없어. 우리는 키 작은 패배자야. 아름답고 키 작은 패배자들. 그리고 그건 아무에게도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아." "아름답고 키 작은 패배자들." 하이는 과거에서 자신들을 응시하는, 옹기종기 모인 얼굴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움이란 게, 어떤 아름다움이든 간에, 아무도 이기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


알츠하이머를 앓는 노인과 스스로 삶을 내던지려는 소년의 희한한 우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저 모른 척 버릴 수 없었다. 그뿐이라 말한다. 그렇게 그들의 나날은 한 발 한 발, 보다 느리게 부서지고 뒤섞인다. 남편도 죽고 거동도 편치 않아. 기억은 낡은 가구처럼 삐걱대고 부스러지지. 그러니 나랑 살자. 당분간이야.

자식들? '걘' 잘 살고 있어. 단지... 나까지 신경쓰기엔 너무 바쁠 뿐이야. 어쩌면 내일이면 너도, 가족도, 나 자신조차도 잊을지 몰라, 그래도 오늘은 살아. 소년과 노인, 이민자와 가난한 노동자들. 그들의 삶은 살아낸다기보다는 하루하루 견뎌내는 쪽에 가깝다.

p.341 "내겐 삶이 있었어, 라바스" 그라지나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불타는 언덕에서 시작된 삶이었지. 그 삶은 언덕을 굴러떨어지더니 이렇게 됐어. (...) 펑크가 난 거지. 엉망이 돼버렸다고. 아무것도 없었어. 그냥 매일매일이 흘러갔고 가끔은 조금씩 덜컹거렸을 뿐. 그리고 그걸로 충분했어. 주님이 내게 평화를 내려주셨고 평화는 좋은 거니까."

p.416 당신 차례가 되면, 그리고 당신 차례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해도, 당신은 자녀뻘 혹은 심지어 손주뻘 되는 젊은이들이 미는 휠체어에 실려갈 것이다. 언제나 그럴 것이다. (...) 어째서 우리는 세월을, 수십 년의 총체를 목도하는 일이 우리에게 - 심지어 가족이라 해도- 엄청난 폭력을 가한다고 그토록 확신해서 그러한 몸이 보이지 않게끔 요새마저 지어 올리게 되었을까?


세상은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 밑바닥 인생. 아니, 어쩌면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단 프랜차이즈 유니폼 너머의 어떤, 무언가 정도니까. 지나치고 나면 말을 나눈 기억조차 남지 않는. 쇠락한 도시, 뻔히 그려지는 막다른 미래. 떠날 수 없으므로 머무를 곳도 없는 이들을 동정할 것인가? 그럼에도 삶은 아름답다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고통뿐이라면, 어째서 이 작은 삶은, 찰나의 기억은 그다지도 아름다운가? 작가는 이 허구를 통해 지독히도 사실적인 풍경과 그려낸다.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내미는 손을, 떨리는 품과 함께 박동하는 심장을. 삶의 끄트머리로 내몰리는 이를 세상에 붙들어두는, 사랑을.

p.383 "야,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삶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해?" 질문을 꺼내고 보니 어리석게 들렸다. "내 말은..." "응” 소니가 대답했다. "왜?" "다른 누군가가 기억할 테니까."

p.527 "사람의 안에는 공간이 아주 많네요. 저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어야 했는데 말에요. 한 명만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 "무서워요, 엄마. (…) "다가올 일들이요. 미래가요. 너무 크게 느껴져서요." "그건 네가 어리기 때문이야, 결국에는 다 작아져. 그래도 삶을 무서워하진 마, 아들,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일을 하다 보면 삶은 좋아져.


*도서제공: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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