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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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기다렸던, 찾아 헤맸던. 어디에도 갇히지 않음으로서 그 자신이 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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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기름
단요 지음 / 래빗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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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존재의 종착점이 초월적 존재의 품이기를 바라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더하자면 그 거대한 힘 자체를 믿지 않는 자까지. 이들 간에는 타협 불가능한 쟁점이 여럿 있는데, 개중 가장 끈질기게 이어져온 것은 다름아닌 '구원'이라 할 수 있겠다.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한가. 이 질문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사철 배부르고 내일을 두려워한 적이 없는 자가 도처에 가득하대도 그들을 둘러싼 세계는 죽음으로 가득하고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환난을 그러안고 살아가므로. 그러나, 어째서 그런가. 숱한 재난과 절망을, 어쩌면 이조차 창조하신 그는 어째서 외면하는가. Quo vadis, Domine.

p.90 그는 평생토록 도망쳐왔던 세계의 총체가 바로 여기 모였음에 몸서리쳤다. 개념을 물질에 앞세움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는 도시의 결절들. 만질 수 없거니와 상상의 대상조차 아니므로 실체와 정신을 동시에 압도하고 마는, 추상화된 객체들. (...) 어째서 하나같이 똑같은가? 전기든 수도든 통신망이든 물류 체계든 어느 하나가 어그러진다면 나머지가 한꺼번에 망가질 텐데도, 분명히 무언가가 매 순간 망가지는데도 변함없는 세계의 모습.

p.162 미슐랭 3스타 파인다이닝을 즐기는 사람과 프랜차이즈 햄버거를 먹는 사람의 거리가 고작 100여 미터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은근한 섬뜩함을 느꼈다. 그 감각은 속물 의식의 발로라기보다는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때의 아득함과 비슷했다.


역설적이게도, 절망은 희망에 기인한다. 가진 적도 알 수도 없던 자는 바랄 수도 원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도처의 참상에 환멸하는 자는 누구보다도 연민하고 구원을 바라는 자에 가까울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믿는 자는 실망할 자다. 구원과 정화를 바라는 자는 심판과 처단을 갈망한다. 의인은 마땅히 건져질 것이요. 악인은 벌 받으리니.

그런 이유로 신실한 자는 두려워하는 자다. 그들과 우리를 가르는 자다. 종교적 믿음의 조건은 '나'를 버리는 데에 있다. 자아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신을 세운다. 판단 이전에 믿음이 있다. 이해에 앞서 '옳습니다!'를 외칠 수 있는 자만이 믿음의 땅에 안주할 수 있다. 자기부정으로 얻어내는 존재의 보증.

p.218 세상에는 가장 순수한 믿음을 추구하는 인간 유형이 존재하며, 그들은 결벽적인 의심으로 인해 최종적으로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된다. 진정성과 순수성이라는 관념은 실질 사랑이 불러오는 환각이자 판단 유보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조강현은 쉼 없이 추론하고 판단했으므로 환각에 빠지지 못했다.

p.356 "비극의 절정에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어진다는 것, 인간은 구렁텅이 한가운데에서조차 새로운 기쁨을 발견할 힘이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기쁨의 대차대조표가 존재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사를 추동하는 동력이자 비참의 근원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 인간은 첫맛만 달고 아주 쓴 술을 계속 마시듯 삶에 중독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최선이 신의 최악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창조한 신의 세계에서 종말은 예정되어 있다. 도처에 가득한 슬픔과 고통, 믿음과 불신까지도. 타락한 세계에 심판이 도래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구원의 약속은 시작부터 그러했듯 임의로 파기되었는가? 신이 인간을, 세계를 버렸다면, 이 두려운 세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무엇인가?

퍽 불경스러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따지자면 신성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온 순간부터 이미 모독이다. 감히 계약이라니. 그 본질적 속성은 대등한 양자의 상정이다. 과정이며 결과가 어찌되든 명목상으로나마 '자발적인' 동의로 체결된다. 그러나 적어도 아브라함계에 한해, 신과 인간의 대화는 계약으로 시작되었다. 존재 이전에 세계가, 창조 이전에 계율이 있었다. 믿음과 존재의미의 교환. 이해에 앞서는 형태.

그것을 묻기 위해 이야기는 버려진 세계에서 시작한다. 기한없이 유예된 종말을 돌려받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약속한 멸망을 내리시어 심판의 그 날에 당신께서 계실 자리에 계시며... 높은 곳에 임하소서, 감히 낮은 곳에 거하지 마시옵고.

p.186 "이 세계는 영원한 죄책감과 부채 의식을 쌓아가는, 가망 없는 세계입니다. 부서지고 상처 입은 세계입니다. 정산을 두려워하며 채무로부터 도망치는 세계입니다 (...) 나는 예수를 확고히 따릅니다! 다만 자율성 뒤편에만 숨는다면, 이 세계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면 당신께서는 그 아버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비겁자라고 믿을 뿐입니다— 나는 예수께 그 문제를 직접 따질 기회를 찾아다니고 있는 겁니다!"


'종말 촉구단'의 이유는 여기서 드러난다. 기한 없는 침묵은 불안을 부른다. 신이 떠난 세계에서 선택과 책임이 같은 곳에서 발원하고 귀결된다는 사실은, 끔찍이도 두려운 일이다. 이는 믿음이 그 숱한 부정에도 살아남아온 이유와도 같다. 이 믿음의 세계가 계약으로 성립된 까닭에 이 쌍방책무의 굴레에서 절대자조차 벗어날 수 없다. 내놔라, 내 구원. 떼인 종말 돌려내라.

곳곳에 조소와 냉소가 묻어있다. 사회의 이물질, 철저한 이방인인 동시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만큼 오랜 시간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인간의 피조물은 생각한다. 고통을 창조하고 파멸을 자초한다. 태어나고 또 낳는다. 무기질적인 세계의 균열에 길이 들어선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긴 이야기를 복음을 걷어차는 구원이라 부르고자 한다. 주인공만큼이나 제정신 아닌 구원이라고.

p.259 "혼자 떠맡고 죽을 문제랑 아닌 문제를 분간할 능력도 없고,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면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너는 사실 신의라거나 충성, 명예, 안위, 책임 같은 개념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고, 그래서 항상 미안하다며 굽실거리면서도 숨 쉬듯이 잘못하고 사는 거야."

p.362 "현실을 보라고. 우리 모두가 최종적으로는 죽는다 해도, 지금 당장 누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건 각각의 삶에서는 중대 사안이야. 그리고 세상이 계속 세상이라면, 그런 까닭에라도 뭐든 해야 하지. 행동하지 않는 것조차 일종의 행동이니까."


*도서제공: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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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파이 살인 사건
앤서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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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혹은, 어떻게 읽을 것이라 기대되는가? 전통적인 형식의 추리소설, 이를테면 형사 혹은 탐정이 주축이 되어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고 진실을 만천하에 드러낸 후에 범인의 원한 혹은 죄책어린 자백이 이어지는 형식의 작품의 독자는 으레 사건의 발견부터 해결까지 주변에서 서성대는 구경꾼의 지위에 가깝다.

이 시기의 작가는 범인이자 탐정이었으며, 작품 속 모든 인물과 사건의 창조주인 동시에 그들 모두이기도 했다. 등장인물들의 말 한 마디와 행색, 곳곳의 사물과 자연, 심지어 시간마저 작가의 설계에 따라 배치되고 움직인다.

p.70 어째서 영국의 시골 마을은 종종 살인 사건의 무대가 될까? 내가 전부터 이걸 궁금해하다 해답을 깨달은 것은 치체스터 인근 어느 마을의 조그만 시골집을 임대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였다. (...) 혼란스러운 도시에서는 금세 잊힐 감정들이 시골에서는 광장을 중심으로 곪아터지고 사람들을 정신병과 폭력의 세계로 몰고 간다. 추리 소설 작가에게는 선물이다.

p.224 물론 탐정들은 우리보다 똑똑하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보다 똑똑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타의 모범이 되는 건 아니다. (...) 탐정을 좋아하거나 존경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그들을 저버리지 않는 이유는 그들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실한 독자의 역할은 진실이 밝혀질 줄을 알면서도 마음 졸이기, 어떻게든 한 발 먼저 알아내려 요리조리 머리를 굴려보기 정도다. 추리를 추리하는 조수의 생각을 추리하는 구경꾼! 이랄까.

추리소설의 용의선상은 과히 파격적일 경우가 아니고서야, 우선적으로 독자를 비껴간다. '자, 일단 나는 아니고...' 에서 시작해 다음 내용이 궁금해 절로 넘어가는 책장을 아쉬움 반, 기대 반으로 읽어나가는 독자가 가장 황당해할 일이라면 아무래도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식의 전개가 아닐까.

이야기는 추리소설 편집자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신간 원고, 그것도 거장의, 생각만 해도 설레는 것을 물흐르듯 읽어나가던 차에 별안간 이야기가 끊겨버렸다. 원고 일부가 없다. 그것도 해결을 코앞에 둔 때에, 첩첩이 쌓인 증거의 산에서 반짝이는 증거를 들어올려야 할 때에!

p.16 「장례식이 그래서 문제야. 다들 철저하게 위선자가 되는 거. 다들 고인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모른다는 둥, 얼마나 친절하고 마음씨가 넓었는지 모른다는 둥 하지만 속으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 나는 메리 블래키스턴을 좋아한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서 그녀가 계단에서 굴러 목이 부러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어.」


해결책은 간단하다. 사라진 원고를 찾든지, 욕을 바가지로 먹을 각오로 작가에게 묻든지. 여기서 다시 문제 하나. 원고도 없고 작가도 없으면 어쩌죠. 아니, 있었는데, 없어졌다니까요? 둘 다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고요. 죽은 사람이라도 불러내 물어야 할 판이다. '아니, 그래서 다음이 뭔데요?'

미궁에 빠진 사건의 해결을 진짜 미궁에 빠트려버린 사건,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탐정의 창조주가 사라진 원인은 무엇인가? 자살? 사고? 마지막 작품의 시작처럼, 설마, 살인? 그렇다면 대체 누가? 진실도 해결도 없는 미완의 추리는 과연 완성될 수 있는가?

p.223 탐정 소설의 핵심은 진실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불확실로 가득한 세상에서 모든 게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면 자동적으로 속이 시원해지지 않는가.

p.224 이야기는 우리가 실생활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모방한다. 우리는 긴장과 애매모호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들을 해결하려고 애를쓰는 데 인생의 절반을 투자하지만 임종을 목전에 두고서야 모든 게 명확해지는 순간에 다다른다. 그런데 거의 모든 탐정 소설이 그런 희열을 제공한다. 그것이 탐정 소설의 존재 이유다. 『맥파이 살인 사건』이 우라지게 짜증 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곳곳의 단서와 오마주로 연결되는 두 편 같은 한 편의 이야기는 액자보다는 마주보는 거울과도 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미지에는 사실 시작점이 있다. 난제를 추리하는 동시에 난제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흩어지고 숨겨진 조각을 어떻게든 이어붙여야 한다.

장담컨대, 이 책의 모든 것들, 단어와 문장과 인물을 비롯해 책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가 단서고 이정표다. 추리소설의 전통을 완벽하게 계승하는 동시에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비웃는 작가는 성실한 독자에게 이렇게 도전장을 던진다. 추리하는 자와 얼뜨기 조수가 아닌, '당신도, 그 누구도 모르는' 진실을 한 발 앞서 알아낼 수 있겠느냐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이 힌트며, 마치 클라인의 병처럼 안팎이 연결되는 이야기를 마주한 독자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기꺼이 응전해 진실을 거머쥐든지, 미궁에 빠진 미궁에 아쉬운 입맛만 다시든지. 목격자이자 탐정일 그대 독자는, 진실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p.223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책장을 느끼며 읽고 또 읽다 보면 어느덧 왼쪽으로 넘어간 책장이 오른쪽에 남은 책장보다 많아지고, 속도를 늦추고 싶지만 그래도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결말을 향해 돌진하는 기분. 나는 그것이 탐정 소설의 남다른 매력이고, 문학이라는 보편적인 카테고리 안에 탐정 소설만의 특별한 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등장인물 중에서도 탐정이야말로 독자와 사실상 독특한 관계를 맺지 않는가 말이다.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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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을 거두는 시간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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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때, 아니, 모든 것이 끔찍하리만치 생생하게 타오르던 날들이 있었다. 그것은 치기, 청춘, 과거의 편린... 어떤 것으로도 불릴 수 있지만 동시에 무엇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시간들이다. 이제는 기억의 저편, 망각의 언저리에서 희미하게 부유하는 이미지들이 되어버린.

이혼 후 대필작가로 생계를 유지하는 '나'는 이모의 의뢰를 받는다. 오랜 시간 일가 모두에게 금기와 수치, 동시에 선망이자 '기댈 구석'이었던 그의 생애를 글로 남기는 일을. 알면서, 아니, 알기에 지워져왔던 그의 생애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가.

말해지고 기록되는, 필연적이고도 미묘한 간극 사이에서 '나'는 과거의 자신을 마주한다. 아니, 과거에서 이어져온 것, 망각되어온 '나'의 실체가 현재를 침습해온다. 조각난 진실, 어긋나는 기억, 나는 누구인가. 나의 기억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우리는, 정말 아름다웠을까.

p.136 시각과 후각에 이어 청각이 합쳐진 그날의 추억. 그걸 먼 훗날까지 홀로 부끄럽게 곱씹으리란 예감 때문에 나는 한없이 슬퍼졌다. 황혼이 깔리는 언덕바지에서 마주한 정체불명의 그 감정을 향해 나는 묻고 또 물었다. 그날 그 감정의 실체는 대체 무엇이었느냐고.


떠나보내지 못한 추억, 어제처럼 선명한 감정들 사이로 스며드는 위화감과 제자리를 찾은 증오에서 '나'는 스스로의 폐허를 마주한다. 과거의 이름으로 남겨둔 채도망친, 믿어 의심치 않은 그림자의 실체를, 까맣게 타버린, 태워버린 것들을.

과거의 전말을 마주한 '나'의 고백에 '그'는 속죄를 말한다. 이를테면, 속죄는 죄벗음이다. 새로 태어남이다. 과거의 허물을 벗어두고 난 자리를 떠나는 일이다. 반면 참회는 그렇지 않다. 두고두고 과거와 현재를, 어쩌면 영영 도래할 수 없게 되어버린 가능성까지도, 일어난 일과 벌어진 결과를 곱씹는 일이다.

속죄에는 종착점이 있지만 참회에는 끝이 없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에게 지은 죄는 어떻게 '빌어질' 수 있는가. 신도 사람도 용서하지 않는, 빌 곳도 고백할 이도 사라진 죄는 어떻게 속, '벗어질' 수 있는가.

p.169 위선을 떨지 않았던 만큼 위악스러웠던 적도 없으리만치 나는 타인에게 무해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결혼과 이혼도 그런 맥락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인간관계의 하나였다. 나는 왜 그렇게 감정 표현에 인색했던 걸까. 그 중심에 선재가 존재했고 선재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나는 그걸 꽁꽁 감추느라 타인과 거리를 둬야 했다. 선재에게 철저하게 거부당하면서부터 나는 나 스스로를 부정하며 살아온 것일지도 그랬다.


제목처럼 이야기는 이미 '거두는' 때에 도달해있다. 그물은 거둬지기 위해 던져져야 한다. 따라서 그물의 존재는 자기자신조차 던져버릴 위험을 안고 있는 셈이다. 무엇이 걸려 올라올지도 모르는 채. 같은 이유로 상처를 떠올리는 일은 또다른 상처다. 상처 위에 새로이 더 깊은 상처를 내는 일이다. 상처입은 자의 죽음을, 나의 '죽임'을 각오하는 일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숱하게 태어나고 잊혀지는 까닭에, 이것은 끝이 아니다. 또다른 가능성이다. 용서를 빌 시간이, 존재가 사라져버린 '상처'가 가득한 세계에서 참회와 속죄, 용서가 태어나기 위한, 영원한 미완의 가능성.

마지막에 와서 이모의 자서전은 '나'로 이어진다. 여기서 다시 물어야 한다. 죄를 고백하고 사함을 청할 대상이 사라진 때에, 그들의 시간은 얼마나 닮아 있는가? 상처주고, 상처입히고, 파괴하고, 떠나온 자리에 돌아가 설 수 있는 용기는 누구에게 있는가. 또, 무엇으로 말해질 수 있는가.

p.243 그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의 기억이 분분할수록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선재뿐이었다. 이제 망각의 커튼을 젖히고 잃어 버린 기억의 실체와 맞대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순간, 망각 속에 떠오른 환청이 내 신경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달그락과 잘그락, 딸각과 짤각, 툭과 톡! 빈 도시락의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와 쇠붙이가 스프링과 몸을 비벼대며 내지르는 비명은 둘인 동시에 하나였다.


모든 참회는 사후적이다. 그런 이유로 속죄 또한 언제나 뒤늦게 일어나는 일이다. 지울 수 없는 일, 망각의 너머에서 사라져버린, 어떤 가능성. 흔적조차 남지 않은 희망에서, '나'는 인간으로 설 수 있을까. 죄와 함께 가라앉은 인간성의 조각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야기의 끝에서, 독자는 과연 누구의 이름으로 용서를 말할 수 있을까. 독자가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 좋겠다. 이야기의 끝에서, 그 누구도 그를 용서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 스스로가 그 '가능성'을 받아들일 때까지.

p.202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송두리째 유린당한 듯 성장의 순간순간을 녹슬게 했던 그 일은 소녀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아니, 상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소녀의 상처가 아니었다. 소녀가 이성이 아닌 동성을 향해 품었던 설렘과 그리움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솟구친 질투가 불러 온 악의였다.

p.203 너도 이제 너답게 살아. 이제 너를 그만 감추고 세상으로 나와. 숨기려다가 나처럼 애먼 사람 다치게 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머리칼이 곤두섰다. 냄새만으로도 동족을 알아보는 감각은 동물에게만 있는 능력이 아닌 모양이다. 길거리에 내놓아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나의 가면을 나는 언제 벗어버릴 수 있을까.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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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 - 딥페이크 성범죄부터 온라인 담론 투쟁까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언어들
한국여성학회 기획, 허윤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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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대학 시절로 돌아가보자. 감정과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전반에 대해 다루는 교양수업에서 '여자들은 차별에 익숙하니 수업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지만 남자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가산점을 주어야 한다'던 학생이 있었다. 고교 시절, '여학생들이 치마 입고 다리 벌리니 수업에 방해된다'며 가리개를 설치한 교사가 있었다. '단정하지 못하다'며 담요 사용을 금지한 사람이었다.

중학 시절, 여학생들에 몰래 다가가 성행위 시늉을 하던 남학생이 있었다. '여자 탈의실은 차별이니까 남자애들 다 갈아입고 나서' 교실에서 갈아입게 하라던 학생들도 있었다. 초등 시절, 여자화장실 문을 열어젖히는 '장난'을 하는 남학생이 있었다. 학부모들이 항의를 해도 '좋아해서 장난치는데 어떻게 막냐'던 교사가 있었다.

어쩜 이렇게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하는지. 학교생활만 해도 밤을 샐 것이고, 어떤 여성에게 물어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묻자. 여성의 삶은 이전에 비해 더 위협적이고 피폐해졌을까? 형태가 달라졌을 뿐일까? 태어나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사회는 무엇으로 경험되는가?

p.25 고어 자본주의에서는 "죽음이야말로 가장 수익성 높은 사업"이고, "몸이 파괴되는 것 자체가 생산물이자 상품이"다. 여기에서 폭력과 살인, 신체 훼손과 시신을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삼는 고어 자본주의는 멕시코만의 특수성이나 잔혹성의 결과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고어 자본주의는 포스트-포드주의 이후 펼쳐지고 있는 전 지구화, 즉 불균등 지역 발전 및 고도소비사회의 도래와 관계되어 있다.


인간이기 이전에 '여성'이기에 가해지는 폭력, 떼어낼 수 없이 부여되는 속성들이 곧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는 사회, 기본적인 안전마저 보장되지 않는 체제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 능력으로 증명되는 가치, 평등한 기회의 제공을 표방하는 동시에 임의로 인생의 향방을 강제하는 모순적인 사회구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극단으로 치닫지 말 것을 요구하는 일은 정말이지, 쉽지 않다. 또하나의 '규범'을 요구하는 것에 주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사회에서, 페미니즘의 기치 아래 묶이는 소수자들과 사회에 학문으로서의 페미니즘은 무엇을 제시하고 또 주장하는가?

p.27 대한민국이 드디어 '선진국'이 되었다는 열광은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올라서고자 하는 한국인의 끊임없는 고군분투를 보여주지만, (...) '고어 자본주의'라는 개념의 핵심은 모든 것이 이미지가 된 것처럼 상상되는 시대에도 폭력은 정확하게 신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온라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온라인 유희'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신체 훼손과 인간 존엄의 훼손을 상품으로 하는 '폭력 산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p.102 여성의 개인 신상은 단순히 중립적 개인 정보로서 여겨지고 있지 않다. (...) 누가 어디에서 보는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여성의 개인 신상과 어떤 방식으로 엮어 특정 캐릭터로 만드는지 등에 따라 원래의 맥락과 무관하게 너무도 쉽게 성적 대상이 된다. 즉 여성의 이미지는 온라인상에서 쉽게 남성들의 관심을 끌거나 모을 수 있는, 나아가 수익으로 직결되는 자원으로 인식된다. 이에 따라 익명성을 기술적으로 적극적으 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성적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수익구조가 만들어졌다.


이 어려움의 많은 부분은 사회의 여러 문제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긍정적 이기심'과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환상을 벗어나 세계진리의 일부처럼 기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원으로 치환되는 인간 존재들은 극화된 경쟁에서 생존을 위해 물어뜯을 존재를 찾는다.

강자생존을 주장하는 시장논리에서 약함은 곧 죄요, 착취의 정당성을 증명한다. 강자는 약자를 착취한다. 끝없이 끌어모아지는 자본에는 신체가 갖는 미래의 '가치'가 포함되고, 그것을 생래적으로 '부당하게' 소유한 존재는 질시와 동시에 착취의 대상이 된다. 무한경쟁시장은, 또다시, 그것을 전혀 제한하지 않는다.

p.64 메갈 색출의 주장은 젠더 정치와 민주적 권리의 문제를 시장 거래의 문제로 전환했다. (...) 메갈 색출의 주장은 소비자 피해 개념을 탈맥락적으로 전유하면서, 역시 기업에 대하여 구조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여성 노동자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p.335 이처럼 자산화 경쟁 체제 속에서 공정 담론은 여성을 태생적 불공정 자산 소유자로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두드러진다. (...) 성화된 교환가치와 노동 없이 소득을 발생시키는 자산 중심 위계, 자산화 경쟁이 만연한 자산기반 경제에서 남성들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성적 접근을 구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태생적으로 자산을 덜 소유한 불공정한 피해자로 인식된다.


필경 우리는 온오프라인 곳곳에 뻗친 혐오와 착취를 경험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식인자본주의의 시대에 페미니즘은 어떻게 새로운 시각을, 방향을 제시하는가? 삶의 전반이 온라인, 시장, 경쟁과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는 시대에 18인의 페미니즘 연구자들이 모여 입을 열었다.

'사이버 지옥'이 열린, 아니, 그 자체인 대한민국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가만히 있지 않는' 여성들은 어떻게 저항하고 연대하는가? '무해한 존재들'로 구성되는 '안전'은 어떤 한계를 갖는가? '다 망해라' 이면의 절망과 폭력은 현재의 답이 될 수 없음을 아는, 알아야 할, '대한민국'을 공유하는 모든 이들이 더 늦기 전에 읽기를 바란다.

p.263 권리를 소유물로 파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권리는 사회적 관계이지 누군가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정당화되거나, 재분배를 꾀할 수 있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의 참정권이 남성의 권리 중 일부를 마치 재화처럼 내어 받아 가지게 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시민의 권리와 의무마저 자원 할당이나 분배 문제로 접근하면 정의를 단순한 공정이나 불편부당성으로 사고하기 쉽게 만들 수 있다.

p.339 동시대 공정 담론은 자산화 과정에 참여하는 주체를 구축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 자기계발하는 주체에서 핵심은 인적 자본량을 최대한 증식시켜 '산술화된 자기'를 통한 경쟁을 추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술화는 '상대'를 의식하 지 않을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내기에 약자와 배제된 이들에 대한 폭력과 무시를 용이하게 만든다. 나아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결합하는 여성 몸의 자본화 과정에 관한 관심도 촉구해야 할 것이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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