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 - 딥페이크 성범죄부터 온라인 담론 투쟁까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언어들
한국여성학회 기획, 허윤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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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대학 시절로 돌아가보자. 감정과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전반에 대해 다루는 교양수업에서 '여자들은 차별에 익숙하니 수업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지만 남자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가산점을 주어야 한다'던 학생이 있었다. 고교 시절, '여학생들이 치마 입고 다리 벌리니 수업에 방해된다'며 가리개를 설치한 교사가 있었다. '단정하지 못하다'며 담요 사용을 금지한 사람이었다.

중학 시절, 여학생들에 몰래 다가가 성행위 시늉을 하던 남학생이 있었다. '여자 탈의실은 차별이니까 남자애들 다 갈아입고 나서' 교실에서 갈아입게 하라던 학생들도 있었다. 초등 시절, 여자화장실 문을 열어젖히는 '장난'을 하는 남학생이 있었다. 학부모들이 항의를 해도 '좋아해서 장난치는데 어떻게 막냐'던 교사가 있었다.

어쩜 이렇게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하는지. 학교생활만 해도 밤을 샐 것이고, 어떤 여성에게 물어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묻자. 여성의 삶은 이전에 비해 더 위협적이고 피폐해졌을까? 형태가 달라졌을 뿐일까? 태어나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사회는 무엇으로 경험되는가?

p.25 고어 자본주의에서는 "죽음이야말로 가장 수익성 높은 사업"이고, "몸이 파괴되는 것 자체가 생산물이자 상품이"다. 여기에서 폭력과 살인, 신체 훼손과 시신을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삼는 고어 자본주의는 멕시코만의 특수성이나 잔혹성의 결과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고어 자본주의는 포스트-포드주의 이후 펼쳐지고 있는 전 지구화, 즉 불균등 지역 발전 및 고도소비사회의 도래와 관계되어 있다.


인간이기 이전에 '여성'이기에 가해지는 폭력, 떼어낼 수 없이 부여되는 속성들이 곧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는 사회, 기본적인 안전마저 보장되지 않는 체제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 능력으로 증명되는 가치, 평등한 기회의 제공을 표방하는 동시에 임의로 인생의 향방을 강제하는 모순적인 사회구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극단으로 치닫지 말 것을 요구하는 일은 정말이지, 쉽지 않다. 또하나의 '규범'을 요구하는 것에 주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사회에서, 페미니즘의 기치 아래 묶이는 소수자들과 사회에 학문으로서의 페미니즘은 무엇을 제시하고 또 주장하는가?

p.27 대한민국이 드디어 '선진국'이 되었다는 열광은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올라서고자 하는 한국인의 끊임없는 고군분투를 보여주지만, (...) '고어 자본주의'라는 개념의 핵심은 모든 것이 이미지가 된 것처럼 상상되는 시대에도 폭력은 정확하게 신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온라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온라인 유희'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신체 훼손과 인간 존엄의 훼손을 상품으로 하는 '폭력 산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p.102 여성의 개인 신상은 단순히 중립적 개인 정보로서 여겨지고 있지 않다. (...) 누가 어디에서 보는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여성의 개인 신상과 어떤 방식으로 엮어 특정 캐릭터로 만드는지 등에 따라 원래의 맥락과 무관하게 너무도 쉽게 성적 대상이 된다. 즉 여성의 이미지는 온라인상에서 쉽게 남성들의 관심을 끌거나 모을 수 있는, 나아가 수익으로 직결되는 자원으로 인식된다. 이에 따라 익명성을 기술적으로 적극적으 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성적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수익구조가 만들어졌다.


이 어려움의 많은 부분은 사회의 여러 문제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긍정적 이기심'과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환상을 벗어나 세계진리의 일부처럼 기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원으로 치환되는 인간 존재들은 극화된 경쟁에서 생존을 위해 물어뜯을 존재를 찾는다.

강자생존을 주장하는 시장논리에서 약함은 곧 죄요, 착취의 정당성을 증명한다. 강자는 약자를 착취한다. 끝없이 끌어모아지는 자본에는 신체가 갖는 미래의 '가치'가 포함되고, 그것을 생래적으로 '부당하게' 소유한 존재는 질시와 동시에 착취의 대상이 된다. 무한경쟁시장은, 또다시, 그것을 전혀 제한하지 않는다.

p.64 메갈 색출의 주장은 젠더 정치와 민주적 권리의 문제를 시장 거래의 문제로 전환했다. (...) 메갈 색출의 주장은 소비자 피해 개념을 탈맥락적으로 전유하면서, 역시 기업에 대하여 구조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여성 노동자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p.335 이처럼 자산화 경쟁 체제 속에서 공정 담론은 여성을 태생적 불공정 자산 소유자로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두드러진다. (...) 성화된 교환가치와 노동 없이 소득을 발생시키는 자산 중심 위계, 자산화 경쟁이 만연한 자산기반 경제에서 남성들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성적 접근을 구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태생적으로 자산을 덜 소유한 불공정한 피해자로 인식된다.


필경 우리는 온오프라인 곳곳에 뻗친 혐오와 착취를 경험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식인자본주의의 시대에 페미니즘은 어떻게 새로운 시각을, 방향을 제시하는가? 삶의 전반이 온라인, 시장, 경쟁과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는 시대에 18인의 페미니즘 연구자들이 모여 입을 열었다.

'사이버 지옥'이 열린, 아니, 그 자체인 대한민국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가만히 있지 않는' 여성들은 어떻게 저항하고 연대하는가? '무해한 존재들'로 구성되는 '안전'은 어떤 한계를 갖는가? '다 망해라' 이면의 절망과 폭력은 현재의 답이 될 수 없음을 아는, 알아야 할, '대한민국'을 공유하는 모든 이들이 더 늦기 전에 읽기를 바란다.

p.263 권리를 소유물로 파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권리는 사회적 관계이지 누군가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정당화되거나, 재분배를 꾀할 수 있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의 참정권이 남성의 권리 중 일부를 마치 재화처럼 내어 받아 가지게 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시민의 권리와 의무마저 자원 할당이나 분배 문제로 접근하면 정의를 단순한 공정이나 불편부당성으로 사고하기 쉽게 만들 수 있다.

p.339 동시대 공정 담론은 자산화 과정에 참여하는 주체를 구축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 자기계발하는 주체에서 핵심은 인적 자본량을 최대한 증식시켜 '산술화된 자기'를 통한 경쟁을 추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술화는 '상대'를 의식하 지 않을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내기에 약자와 배제된 이들에 대한 폭력과 무시를 용이하게 만든다. 나아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결합하는 여성 몸의 자본화 과정에 관한 관심도 촉구해야 할 것이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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