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기름
단요 지음 / 래빗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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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존재의 종착점이 초월적 존재의 품이기를 바라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더하자면 그 거대한 힘 자체를 믿지 않는 자까지. 이들 간에는 타협 불가능한 쟁점이 여럿 있는데, 개중 가장 끈질기게 이어져온 것은 다름아닌 '구원'이라 할 수 있겠다.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한가. 이 질문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사철 배부르고 내일을 두려워한 적이 없는 자가 도처에 가득하대도 그들을 둘러싼 세계는 죽음으로 가득하고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환난을 그러안고 살아가므로. 그러나, 어째서 그런가. 숱한 재난과 절망을, 어쩌면 이조차 창조하신 그는 어째서 외면하는가. Quo vadis, Domine.

p.90 그는 평생토록 도망쳐왔던 세계의 총체가 바로 여기 모였음에 몸서리쳤다. 개념을 물질에 앞세움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는 도시의 결절들. 만질 수 없거니와 상상의 대상조차 아니므로 실체와 정신을 동시에 압도하고 마는, 추상화된 객체들. (...) 어째서 하나같이 똑같은가? 전기든 수도든 통신망이든 물류 체계든 어느 하나가 어그러진다면 나머지가 한꺼번에 망가질 텐데도, 분명히 무언가가 매 순간 망가지는데도 변함없는 세계의 모습.

p.162 미슐랭 3스타 파인다이닝을 즐기는 사람과 프랜차이즈 햄버거를 먹는 사람의 거리가 고작 100여 미터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은근한 섬뜩함을 느꼈다. 그 감각은 속물 의식의 발로라기보다는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때의 아득함과 비슷했다.


역설적이게도, 절망은 희망에 기인한다. 가진 적도 알 수도 없던 자는 바랄 수도 원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도처의 참상에 환멸하는 자는 누구보다도 연민하고 구원을 바라는 자에 가까울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믿는 자는 실망할 자다. 구원과 정화를 바라는 자는 심판과 처단을 갈망한다. 의인은 마땅히 건져질 것이요. 악인은 벌 받으리니.

그런 이유로 신실한 자는 두려워하는 자다. 그들과 우리를 가르는 자다. 종교적 믿음의 조건은 '나'를 버리는 데에 있다. 자아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신을 세운다. 판단 이전에 믿음이 있다. 이해에 앞서 '옳습니다!'를 외칠 수 있는 자만이 믿음의 땅에 안주할 수 있다. 자기부정으로 얻어내는 존재의 보증.

p.218 세상에는 가장 순수한 믿음을 추구하는 인간 유형이 존재하며, 그들은 결벽적인 의심으로 인해 최종적으로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된다. 진정성과 순수성이라는 관념은 실질 사랑이 불러오는 환각이자 판단 유보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조강현은 쉼 없이 추론하고 판단했으므로 환각에 빠지지 못했다.

p.356 "비극의 절정에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어진다는 것, 인간은 구렁텅이 한가운데에서조차 새로운 기쁨을 발견할 힘이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기쁨의 대차대조표가 존재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사를 추동하는 동력이자 비참의 근원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 인간은 첫맛만 달고 아주 쓴 술을 계속 마시듯 삶에 중독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최선이 신의 최악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창조한 신의 세계에서 종말은 예정되어 있다. 도처에 가득한 슬픔과 고통, 믿음과 불신까지도. 타락한 세계에 심판이 도래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구원의 약속은 시작부터 그러했듯 임의로 파기되었는가? 신이 인간을, 세계를 버렸다면, 이 두려운 세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무엇인가?

퍽 불경스러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따지자면 신성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온 순간부터 이미 모독이다. 감히 계약이라니. 그 본질적 속성은 대등한 양자의 상정이다. 과정이며 결과가 어찌되든 명목상으로나마 '자발적인' 동의로 체결된다. 그러나 적어도 아브라함계에 한해, 신과 인간의 대화는 계약으로 시작되었다. 존재 이전에 세계가, 창조 이전에 계율이 있었다. 믿음과 존재의미의 교환. 이해에 앞서는 형태.

그것을 묻기 위해 이야기는 버려진 세계에서 시작한다. 기한없이 유예된 종말을 돌려받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약속한 멸망을 내리시어 심판의 그 날에 당신께서 계실 자리에 계시며... 높은 곳에 임하소서, 감히 낮은 곳에 거하지 마시옵고.

p.186 "이 세계는 영원한 죄책감과 부채 의식을 쌓아가는, 가망 없는 세계입니다. 부서지고 상처 입은 세계입니다. 정산을 두려워하며 채무로부터 도망치는 세계입니다 (...) 나는 예수를 확고히 따릅니다! 다만 자율성 뒤편에만 숨는다면, 이 세계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면 당신께서는 그 아버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비겁자라고 믿을 뿐입니다— 나는 예수께 그 문제를 직접 따질 기회를 찾아다니고 있는 겁니다!"


'종말 촉구단'의 이유는 여기서 드러난다. 기한 없는 침묵은 불안을 부른다. 신이 떠난 세계에서 선택과 책임이 같은 곳에서 발원하고 귀결된다는 사실은, 끔찍이도 두려운 일이다. 이는 믿음이 그 숱한 부정에도 살아남아온 이유와도 같다. 이 믿음의 세계가 계약으로 성립된 까닭에 이 쌍방책무의 굴레에서 절대자조차 벗어날 수 없다. 내놔라, 내 구원. 떼인 종말 돌려내라.

곳곳에 조소와 냉소가 묻어있다. 사회의 이물질, 철저한 이방인인 동시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만큼 오랜 시간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인간의 피조물은 생각한다. 고통을 창조하고 파멸을 자초한다. 태어나고 또 낳는다. 무기질적인 세계의 균열에 길이 들어선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긴 이야기를 복음을 걷어차는 구원이라 부르고자 한다. 주인공만큼이나 제정신 아닌 구원이라고.

p.259 "혼자 떠맡고 죽을 문제랑 아닌 문제를 분간할 능력도 없고,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면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너는 사실 신의라거나 충성, 명예, 안위, 책임 같은 개념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고, 그래서 항상 미안하다며 굽실거리면서도 숨 쉬듯이 잘못하고 사는 거야."

p.362 "현실을 보라고. 우리 모두가 최종적으로는 죽는다 해도, 지금 당장 누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건 각각의 삶에서는 중대 사안이야. 그리고 세상이 계속 세상이라면, 그런 까닭에라도 뭐든 해야 하지. 행동하지 않는 것조차 일종의 행동이니까."


*도서제공: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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