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일록 작전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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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둘이 되었다. 아니, 여기 있는 동시에 저곳에 있다. 아니, 아니다. 저곳에 내가 있다고 한다. 내 이름으로, 얼굴로, 목소리로 말하며 나를 만나고자 하는 이들을 만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환상인가?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나는 필립 로스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 이름은 필립 로스, 내가 '진짜' 필립 로스다. 저 자는 누구인가?

나는 그곳에 가야 한다. 나 아닌 내가 있는 곳, 이스라엘로. 나 아닌 내 이름으로 휘젓고 다니는 그가 있는 곳으로. 왜? 알기 위해서다. 그는 누구인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마침내 마주한 진실은, 그가 평범한 사칭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필립 로스다. 또다른 필립, 모이셰 피픽, 로스. 도둑놈 망토처럼 뒤집어쓴 내 이름으로 그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마주하는가?

p.30 이미 나는 이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놈이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제 이름을 말했을 때, 내가 내 이름을 밝히고 놈의 반응을 지켜보기만 했으면 됐을 것이다. (...) "이런, 나도 필립 로스입니다만. 뉴어크에서 태어나 다수의 책을 썼지요. 당신은 어떤 필립 로스입니까?" 이런 말로 쉽사리 그를 무너뜨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화기 속에서 내 이름을 말한 것만으로 나를 무너뜨린 건 바로 그놈이었다.

p.92 그는 울고 있었다. 속까지 흠뻑 젖은 나를 품에 안고 울었다. 우리 둘 중의 하나가 한밤중에 센트럴 파크를 가로질러 무사히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극적인 광경이었다. 반가움과 안도의 눈물... 나는 그가 '나'를 실제로 만나면 두려움에 움츠러들어서 항복할 줄 알았다. "필립 로스! 진짜 필립 로스.. 드디어!"


그 시간 이스라엘에서는 세기의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학살자, 전범, "공포의 이반"을 심판하기 위한 자리다. 그는 자신이 "그 이반"이 아니라 주장한다. 평범하게 살아온 노인일 뿐이며, 선량한 이웃일 뿐이라 말한다. 이웃들은 그의 결백을 주장한다. '생존자'들은 그가 틀림없다고 말한다. 한없이 다정하고 온순한 노인이 "그 도살자"일 수 있을까?

다시 또다른 필립 로스, 편의상 나의 말을 따라 "피픽"이라 부를, 그의 이야기로 돌아와 생각해보자. 그는 왜 이런 일을 벌였는가. 유명 작가인 나의 삶과 이름을 훔쳐 무엇을 하려는가? 그는 "디아스포리즘"을 주장하며,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정당성을 부정한다. 신화가 아닌, 뿌리내리고 살아온 역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진정한 '유대인 정신'이라 말한다.

p.81 트레블링카에서 최고의 시간을 보낸 네가 미국에서 상냥하고 근면하고 하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건 수수께끼가 아니야. 너의 명령으로 시체를 치웠던 사람들. 여기서 널 고발한 사람들이 너 같은 사람들한테 그런 일을 당한 뒤 평범한 삶과 조금이라도 닮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 수수께끼지. 그 사람들이 어떻게든 평범하게 살 수 있었다는 사실, 그게 믿기 힘든 일이라고!

p.244 혀가 매끄러워지는 느낌이 들더니 내 언변이 좋아져서 나는 계속, 계속 유대인들의 탈이스라엘을 외쳤다. 그렇게 취한 듯한 충동에 따르고는 있어도, 가엾은 갈의 눈에 보이는 만큼 자신감은 느껴지지 않았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효자 아들이면서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비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갈등으로 갈처럼 나도 마음이 둘로 갈라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혼쭐을 내기는 커녕 홀랑 휘말린 나는 혼란에 휩싸인다. 이스라엘, 땅 없는 민족의 정착지, 유대인들의 영혼의 고향이라 불리는 그곳은 무엇으로 정당화되는가. 생각지도 못한 사건에 휘말리며 과거와 현재를 정신없이 오가는 동시에 마주치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이곳과 저곳, "민족의 기억"과 분열된 자아를 마주한다.

마치 둘이 아닌 하나, 분열된 자아가 주고받는 격렬한 논쟁처럼 보이는 작가 특유의 장광설, 일견 분노처럼 보이는 성토에서 독자는 눈치채게 된다. 아니, 현장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성서의 이름으로 집단은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과연 '그들'과 "우리"는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현대판 아우슈비츠"는 구태연한 관용구가 되어버렸단 말인가?

p.187 그래,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희생자를 자처하며 과거와 자신을 동일시할 걸세. 하지만 딱히 과거를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이 나라의 존재 자체가 그 증거야. 그들의 강박적인 이야기가 이제는 그들의 현실감각을 해치는 수준에 이르렀을 거야. 우리의 현실 감각은 확실히 해치고 있지. 그들이 희생되었던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지 마!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것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야!

p.361 내 이목구비를 모델로 만든 가면을 쓰고 전체적으로 나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습관적으로 나를 사칭하던 자. 다른 사람 행세를 하면서 의기양양 기뻐하는 그를 다시 접할 수 있다. 그 입안에 혀가 몇 개나 있을까? 놈 안에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상처는 몇 개일까? 참을 수 없는 상처가 몇 개일까!


작가는 이스라엘의 현재 지위와 유대인에 대한 통렬한 지적과 자기인식이 반영된 길고 긴 환상에서 반복해 묻는다. 이때 그의 글은 결백을 주장하는 낯선 이처럼, 심문당하는 자처럼 형식에서 시작해 마지막의 짧은 '글'까지, 허구를 주장하는 형식은 이 모든 것이 진실임을, 생생하고 사실적인 묘사는 그것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임을 역설한다. 모든 일은 일어났으나 사실이 아니며, 진실과 폭로인 동시에 은유이다.

그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 앞에서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려는 노력 따위는 헛된 발버둥이 된다. 그런 이유로, 이 긴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이나 그 끝은 디아스포라와 자아정체성에 대한 물음으로 향한다. 남겨진 독자는 묻는다. 산산이 부서지는 세계에서 죽음은 어디로 향하는가. '그곳'을 보라. 약속의 땅, 신의 은총이 내리는 곳을.

p.551 "누가 피픽을 고용했냐고? 인생이 피픽을 고용했소. 만약 전세계 정보기관들이 하룻밤 새에 모두 폐지되더라도 사람들의 정돈된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파괴할 피픽 같은 인물은 아주 많을 거요. 오로지 구경거리, 무의미한 폭력, 혼란을 원하는 얼간이들이 스스로 나설 테지."

p.571 이 책은 허구다. 3과 4장에 인용된 아하론 아펠펠드와의 격식 있는 대화는 1988년 3월 11일자 〈뉴욕타임스〉에 처음 실렸다. 9장에 인용된 법정 대화는 1988년 1월 27일 예루살렘 지방법원에서 열린 존 데미야뉴크의 재판중 오전에 진행된 내용을 그대로 적은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 외에는 모든 이름, 인물, 장소, 사건이 저자의 상상력의 산물이거나 가상의 것이다. 실제 사건, 장소, 인물과 혹시 비슷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연이다. 이 고백록은 가짜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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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장국으로 날아가는 비행접시
곽재식 지음 / 구픽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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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소설계에는 이른바 "곽재식 속도"라는 것이 있다. 그 뜻이 무엇이냐, 어떤 작가의 글쓰기 속도를 측정하는 단위로, 어원이 된 곽재식 작가가 6개월에 4개 꼴로 단편작을 집필한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에서 비롯되었다. 즉, 1곽재식 속도는 연간 8개 단편작을 집필한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공장에서 틀 찍듯 쑥쑥 내기만 한다고 끝이 아니다. 옛말에 잘 쓰면 개성, 못 쓰면 한계라 했다. 처음 들어보는지. 당연하다. 방금 생각해냈으니까. 신간 사고 돌아서는 차에 또다른 신간이 나온다는 이 작가의 팬이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는 이유는 다작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서사와 딱 봐도 아, 이 작가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하는 개성, 그리고 날카로운 통찰이 있기 때문이리라.

p.32 "인류는 인공지능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p.40 "그러다 보니 그런 문제에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투자가 몰렸습니다. 다른 일은 점점 등한시했죠. 재난을 극복하는 기술을 개발하거나, 사람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는 데 대한 투자를 모두 포기하고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오직 자신의 로봇을 돌보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런 작가의 초단편 모음집이라니. 2천 자 남짓의 짧은 글에 어떤 이야기를 담아냈을까. 이번에도 하이퍼 리얼리즘 현대인 공포로 비명을 지르게 할지, 그저 깔깔 웃게 할지, 싸늘하고 무거운 뒷맛을 남길지... 13편의 수록작들에 대한 나의 감상은... 대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면 이런 얘기를 써내십니까? 사랑합니다! 땡큐! 랄까.

그의 작품에는 신념을 지닌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도, 작고 연약한, 아니 미약하고 티끌같은, 그러나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을 지닌 이가. 그것은 때때로 파국의 불씨가 되거나, 반대로 수많은 우연이 겹치고 덧대 도달한 기적이 되기도 한다. 찰나의 작은 균열이, 순간의 선택이 엄청난 미래를 불러오듯이.

p.95 "몰라요, 저도. 민주공화국에서 백작이 고위직인지 뭔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근데 저희 비공개수사전담 3팀이 별별 이상한 사건을 다 맡다 보니까, 이제 뭐 좀 이상하다 싶으면 저희들한테 다 떠넘기고 그래서. 또 공무원 사회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p.202 그런데 쥐의 뇌 크기는 너무 작았다. 원래 여우고개 전설이 사람이 소로 변하는 내용이었던 것은, 소가 일을 많이 하는 동물이라는 것도 있지만, 소의 머리가 크다는 이유도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 그 많은 생각과 지식과 기억과 판단과 사상과 성격이 그대로 다 저장되어 남아 있기에는 쥐의 얼마 안 되는 뇌의 크기와 공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의 이야기에 사람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한계, 사람이기에 낼 수 있는, 어쩌면, 마음이 있는 존재가 갖는 힘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작가가 써낸 세계에는 그 믿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세계의 끝에서도, 일상의 변두리에서도 누군가가 살아가고 말하고 갈등한다. 소멸하고 태어난다. 혹은, 그 시작을 향해 발을 내디딘다.

이쯤에서 마르고 닳도록 해온 말을 다시 꺼내볼 필요가 있다. SF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가장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현실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현실 바깥을 상상하는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현실을 강하게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 책의 수록작들 또한 그렇다.

p.80 "제가 정말, 간절하게, 딱 한 번만 더 보고 싶다고, 평생 한 번만 더 나타나서 저에게 마지막으로 보여 주고 알려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모습, 그 형체, 그때 보고 죽어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이, 정말 똑똑히 정확하게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더라고요."

p.142 "세상은 그냥 정해진 원리대로 이치에 맞게 돌아가는 거잖아. 소원을 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 소원이 그냥 이루어진다면 그건 굉장히 이상한 거야. 세상이 돌아가는 걸 망가뜨리는 특별 예외 규칙 같은 게 있다는 얘기잖아. 그러면 세상의 원리에 구멍이 숭숭 뚫린거나 다름 없어. 그런 건 똑바로 된 세상이 아니지."


다른 작가들에 비해 특별한 점이 있다면, 굳이 멀리 가지 않고 현실의 희미하게 어긋나고 가려진 틈을 들여다본다는 것일까. 그래서 더욱 있을 법하다고 느끼게 한다. 깜빡 넘어가 끌려들어간 세계에서 함께 엉 울어버리거나, 누군가의 등을 마주한 채 긴 침묵에 잠기게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감상보다는 찬사다. 언제고 이 작가의 이름을 마주하는 때가 되면 주저없이 집어들어 추천! 을 외치겠다는 선언이다. 누구든 곽재식-다움을 만나고 싶다면, 그 화려한 "말빨"에 기꺼이 홀리고 싶다면, 몇 번이고 권한다. 당장 빠져들 것을. 아니, 선생님, 일단 한 번 들어보세요...

p.144 호성은 말을 하려고 했다. 너무너무 보고 싶다고, 한 번 만이라도 더 만나게 해 달라고. 그렇게 소원을 빌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습도 하지 않은 말이라, 입을 열고 멋있게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갑자기 우는 목소리가 나와서 몇 번이고 망설이기만 했다.

p.203 이제 쥐 한 마리 수준밖에 되지 않는 생각을 갖게 된 그가 마지막까지 머릿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가끔 그는 그저 앞뒤도 없이 "희정아, 희정아."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도서제공: 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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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 회의론자 - 신경과학과 심리학으로 들여다본 희망의 과학
자밀 자키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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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닌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가 희망은 대책없는 환상으로, 냉소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로 여겨지고 있다. 세상은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타인으로 가득하며, 제각기 이득을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어 보인다. 이런 세상에서 신뢰와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진정 냉소만이 유일한 생존 전략으로 남게 될까?

답 이전에,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냉소는 정말 '현실적인' 판단일까? 그것에는 기대만큼의 이점이 있을까? 현실이 냉소주의를 만들어내는 것인가, 그 반대인가. 흔히 냉소와 회의는 같은 것으로 치부된다. 저자는 이 둘 사이에 선을 긋고 시작한다. 회의가 정보와 상황을 다각도로 평가해 섣부른 판단을 피하려는 신중함에 기반한다면, 냉소는 타인과 세계에 대한 불신, 때로는 선제공격으로 무장하는 태도다.

p.13 냉소주의는 우리를 결속시키는 심리 접착제 성능을 떨어뜨린다. 신뢰는 타인에게 자신을 기꺼이 노출하는 마음으로 타인이 무언가를 제대로 할 것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희망은 이런 식으로 사람들 사이에 둥지를 튼다. 반면 냉소주의는 신뢰를 서서히 부식시키면서 우리의 현재를 앗아가고 긍정적인 미래를 그리는 능력을 무디게 한다.

p.64 회의론자는 새로운 정보를 기반으로 자신의 믿음을 갱신하면서 복잡한 세상에 적응한다. (...) 연구 결과에 의하면 냉소주의 수준으로는 그 사람이 얼마나 회의적인지 예측되지 않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냉소론자는 음모론에 빠질 가능성이 큰 반면 회의주의자는 이런 인지적 오류에 덜 빠진다.


현대화와 함께 개인 중심으로 파편화된 사회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고독하다. 공동체 안에서의 교류나 타인과의 물리적, 감정적 접촉으로 얻는 긍정성보다는 내면으로의 후퇴, 자발적인 고립에 열광하며 이른바 "자기돌봄" 상품을 끝없이 소비한다. 각종 미디어의 발달로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초연결의 시대에 급증한 관계피로가 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밖에도 희망을 좀먹는 것은 수두룩하다. 불평등, 빈곤, 소통과 교류를 대신하는 수량화의 경제, 자극적인 어휘로 관심을 갈취하는 각종 매체 등.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 정말 각자 스스로를 돌보고 견고한 장벽을 쌓아 틀어박히는 것만이 답일까? 세상은 정말 그렇게 위협적이고, 타인은 언제든 배신과 착취를 일삼을 존재인가? 서로를 불신하고 경쟁에 몰두하는 사회는 그 신념처럼 개인의 안전과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가?

p.43 신뢰도가 높은 공동체는 많은 면에서 신뢰도가 낮은 공동체를 앞질렀다. 신뢰도가 높은 공동체 구성원은 더 행복하다. 행복도 측면에서 볼 때, 신뢰도가 높은 단체에서 살아가는 것은 보수가 40퍼센트 오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들은 신체적으로 더 건강하고 남과의 차이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자선 단체에 기부도 많이 하고 공동체 관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적다.

p.91 가난한 사람들이야 그들을 차가운 곳으로 내몬 문화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평등한 지역에서는 부유한 사람들 역시 서로를 덜 신뢰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불평등이 제로섬 심리를 창출해서 다른 사람이 손해 볼 경우에만 자신에게 이득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승자도 궁지에 몰린다. 이들의 이득은 언제라도 뺏길 수 있으며 많은 사람은 승자의 이득을 갈취하고 싶어 한다. 동료와 이웃, 낯선 타인은 경쟁 상대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들던 때에, 가장 긴 밤을 지새우고 길을 여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느꼈듯이 낯선 이를 직접 마주하는 게 얼마나 큰 변화의 동력이 되는지 느꼈을 것이다. 기꺼이 신뢰를 드러낼수록 연대는 크게 확장된다는 것 또한. 막상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혹자는 익숙한 패배만을 외쳤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사례에서 보듯, 냉소는 현실적이지 않다. 냉소주의자는 부정적 예견에 경도되어 현실의 가능성을 무시한다. 현실을 내세운 냉소가 파괴하는 것은 단기적 이득이나 개인의 행복 뿐만이 아니다. 변화와 연대의 힘이다. 공동체의 신뢰관계와 그를 통해 형성될 우호적이고 안정적인 관계의 가능성이다. "현실"을 말하며 패배와 절망을 확신하는 사회는 역설적으로 "진짜 현실"의 가능성을 무너뜨린다.

p.163 신뢰는 사람에 대해 알려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킨다. 변화는 신뢰에 대한 보답이다. 호혜의 사고방식은 이런 원칙을 이해한다. 신뢰의 도약은 바로 이 앎에서 영감을 받은 행동으로 타인에게 의도적인 베팅을 하는 것이다. 선제공격이 사람의 최악을 끌어내는 반면 신뢰의 도약은 사람의 최선을 이끌어낸다. (...) 신뢰는 요란하게 소리를 낼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상대방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보여줄 기회를 분명하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p.235 허무주의는 냉소주의의 특징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벌에 관한 냉소적인 관점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리석은 생각이다. 정치적 절망감이 판을 치면 사기성이 가장 강한 정치 권력자들이 힘을 얻는다. 서로 다른 집단 간의 건설적인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한 그쪽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는 법이다. 사람들이 계속 당의 정체성을 가지고 싸운다면 불평등 심화처럼 우리 대부분이 공유하는 어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냉소는 전염된다. 쉽게 확산된다. 그러나, 희망 또한 그러하다. 가망 없어 보이는 희망은 대책없는 낙관이나 피상적 구호가 아니라 "문제에 대응하고 상황이 나아질 수도 있다는 분별 없는 믿음"이다. 이것이 바로 희망찬 회의론일 것이다. 범람하는 비극적 가십이 아닌 작은 가능성까지도 놓치지 않는 것.

이 책의 독자들이 믿음으로 선뜻, 뛰어들기를 바란다. 대책없는 낙관주의자가 아닌 희망찬 회의주의자가 되기를 바란다. 절멸 직전의, 분열된 세계에서도 우리는 분명 나아갈 수 있다고, 주어진 숫자가 아니라 직접 마주한 사람을 믿고, 나눔과 신뢰로 연결될 수 있다고, 섣부른 냉소 대신 부서지지 않는 희망을 끌어안기를 바란다.

p.141 우리 모두는 더 정확하고 덜 냉소적인 뉴스를 선택할 능력이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가 선택하는 뉴스가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가십은 정보 공유를 위한 고대의 수단이었고 아마 지금도 누군가는 여러분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여러분이 목격한 친절과 정직을 사람들과 나누면서 부정적인 대화를 좋은 쪽으로 균형 있게 이끌어보라.

p.295 지금까지 이 책을 통해 목격했듯이 우리 믿음은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 때문에 진실은 기분 좋은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이든 우리는 외딴섬에서 홀로 억압에 맞서 싸우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건 틀린 생각이다. 진실을 알면 분노에 효능감이, 부적응에 창의력이 더해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 연대를 결성해 바위를 같이 밀어올려 마침내 언덕 꼭대기까지 올릴 수 있다.


*도서제공: 심심

#인문 #희망찬회의론자 #자밀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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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의 상자
정소연 지음 / 래빗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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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말해왔다. SF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현실 바깥을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현실적일 수밖에, 현실을 발 딛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고. 상상에는 날개가 있을까. 존재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만일, 어쩌면, 왜... 이어지는 물음들에는 언제나 회의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사랑을 믿었다. 함께 걷는, 의심 없이 돌아보는 마음이 있음을 차마 의심할 수 없었다. 담담하게, 조용히 사랑하는 순간이 있음을, 삶이 벅찬 날에는 그 기억을 꺼내 끌어안고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어떤 말은 한순간도 잊을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p.48 하정은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마치 오늘 일과처럼 담담히 말하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할머니가 남긴 깃발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방으로 만들어 쓰는 사람이었다. (...) 하정은 그런 식으로, 계속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p.170 서로의 손바닥이 습기로 살짝 달라붙던 감촉이 생생해. 너는 마치 습도를 확인하듯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손바닥만 살짝 뗐다가, 도로 제대로 쥐고 네 허벅지 위로 당겨 올리고는 마치 날씨를 가늠하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더니 말했지. 밤에만 비가 오는 행성도 있다고.


오직, 슬픔의 무게는 영원임에 틀림없다고. 어떤 순간은 순간이 아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었지만, 충분히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 못한 '만약'들이 밀려오던 밤에는 심장이 혓바닥에 올라앉은 것만 같아 이를 악물고 숨을 참았다. 또다른 밤엔 온몸이 눈물이 되어 넘쳐흐르는 것처럼 울었다. 모든 순간이 마지막이었고, 유일한 기회였으며, 선명한 가능성이었다.

작가가 그려넣은 빛의 속도로 우주를 가로지르는 세계에도, 의심한 적 없던 연약한 일상이 무너지는 전염병의 시대에도 나는 번번이 주저앉아 우는 사람이 되었다. 닿지 않는 말들, 닿을 수 없는 말들, 영원처럼 찍힌 마침표에. 소리가 되지 못한 울음이 되어 단단히 웅크렸다.

p.172 무한한 슬픔은 크기가 같아서 더 큰 슬픔과 더 작은 슬픔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 아니야. 아침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빛나는 나무를 보고 비 온 뒤에도 세상이 맑고 아름답다고 감탄했다가 원래 여기는 새벽안개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슬펐어. 더 작은 슬픔이 더 큰 슬픔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듯이 슬펐어.

p.319 네가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여기는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멀쩡해. 네가 없는데도, 네 배는 지도 위를 떠돌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웃고 대화하고 심지어 마스크도 안 쓰고 있어. 다 죽이고 싶어. 다 죽이고 나도 죽고 싶어.


그저 고통과 그리움의 덩어리로, 상실과 부재 한가운데 파묻은 '만약'의 말들로만 읽혔다면 덮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있지는 않았을 테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선명한 경계를 그리는 냉정함이 너무도 아름다워 도리어 손을 놓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다시 묻게 했다.

작가는 "우리는 망설이고 의심하면서도 확실하게 한 걸음씩 결국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그 믿음을 말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래. 이 서럽고 외로운 세계에, 상실에도 희망은 있다고, 영원은 절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294 미정은 꽤 오랫동안, 수진이 두 명인 줄 몰랐다. 네 번째 수진과 다섯 번째 수진이 숨긴 것은 아니었다. 미정은 두 수진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두 수진은 같은 옷을 입었고 습관도 비슷했다. 무엇보다도 생김새가 똑같았다. 활동 시간만 달랐다.

p.365 현숙은 강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걸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마치 이렇게 나이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평화로운 날이었다.


그의 소년은 말한다. "저 하늘 너머에 있는 건 빈 공간이 아니라 우주로 나가는 길(29)"이라고. 그러므로, "말 그대로, 아득한 우주에서도, 무너진 세계에서도 저 멀리 반짝이는 '당신'을 발견하는" 이야기에서, 마침표 이후의 세계를 본다. 사라졌지만 잃지 않은, 이별했지만 떠나보내지 않을, 그 모든 '만약' 너머의 가능성을 믿는다.

열 두 편의 수록작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어쩌면 영원이겠지만 절대는 아닌 것이 있음을 믿는다. 언젠가 내게 그러했듯 너에게 내가 아는 고통이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잔상처럼 눈가를 떠도는 사랑"을 흘려보내지 않는 이 모든 이야기가 사랑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젠가 읽었듯, 이 세계가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이기를 빈다.

p.29 "이건 나한테 아주 소중한 꿈이야. 그리고 언젠가 네게 이 말을 다시 할 수 있고, 그때는 너에게 소중한 것을 알 수도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일 것 같기도 해. 나한테 넌, 그만큼은 소중하니까."

p.247 그리고 그럴 때면 나는 조금은 이기적으로, 하지만 더없이 간절하게, 내가 이 아이에게 처음이 아니기를 기도한다. 이 아이가 언젠가 누군가를 잃어야 한다면, 비명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잔상처럼 눈가를 떠도는 사랑에 고통스러워하는 때가 온다면, 그 사람이 내가 아니기를. 내가 누구에게도 처음이 아니길.


*도서제공: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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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 아노크라시, 민주주의 국가의 위기
바버라 F. 월터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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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한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이다. 같은 영토, 삶의 기반, 많은 경우에 소속감을 공유하던 집단이 여러 하위 집단으로 분열되어 일어나는 갈등이다. 이는 민주주의 체제의 필수 요소인 다양성-갈등 수준이 아닌, 절멸까지도 요구할 가능성이 있는 전쟁을 의미한다.

내전은 국가-외부와의 대립이라는 익숙한 관념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서로 간의 교집합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대안현실을 발명, 강화한다는 점에서 "외부의 적"에 맞서는 익숙한 전쟁 도식과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이 "내부 총질"은 언제, 왜, 어떻게 일어나는가? 저자는 앞선 연구들을 통해 아노크라시, 독재와 민주정의 중간 구간인 불안정 체제에서 내전이 촉발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p.32 어떤 나라가 내전을 겪게 될지 여부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지표는 그 나라가 민주주의를 향해, 또는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움직이고 있는지 여부다. (...) 시민들이 완전한 민주주의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정부가 언제나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독재자 지망자가 권리와 자유를 조금씩 갉아먹고 권력을 집중하면서 주주의가 쇠퇴할 수 있다. (…) 대개 바로 이런 중간 구간에서 내전이 일어난다.

p.36 전문가들이 내전 발발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요인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충돌이 일어날 위험이 가장 높은 나라는 가장 가난하거나 가장 불평등한, 또는 종족적, 종교적으로 가장 이질적이거나 심지어 가장 억압적인 곳도 아니었다. 시민들이 총을 집어 들고 싸움을 시작하게 만드는 것은 부분적 민주주의였다.


인용된 연구에서 밝히듯 민주정에서 비민주적 체제로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중간 구간에서도 다양성-분열과 갈등이 내전으로 발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 양극화보다는 파벌화가 주요 요인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안정된 민주주의를 유지해온 사회들에서 내전의 위기가 나날이 증가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 파벌이 일종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형성된다면, 한국의 파벌주의는 무엇에서 힘을 얻는가? 이를테면, 어떤 지역 혹은 소득 수준 혹은 공유하는 문화정서에 기초하는가? 한국의 극우세력이 모순되게 주장하는 과거의 영광, 우방은 무엇으로의 노스탤지어인가? 그들은 무엇을 빼았겼는가?

p.95 사람은 원래 잃는 것을 싫어한다. 이득을 얻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손실을 복구하려는 동기가 훨씬 강하다. (...) 원래 자기 것이라고 믿는 장소에서 지위를 상실하는 것은 못 참는다. 21세기에 가장 위험한 파벌은 한때 지배적이었으나 쇠퇴에 직면한 집단이다.

p.265 파벌주의를 움직이는 중심적 힘은 언제나 음모론이었다. 사람들이 행동하도록 선동하기를 바란다면, 〈타자〉를 표적으로 던져 주면 된다. 그들의 집단을 해치기 위해 고안된 배후의 음모를 강조하라. 적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나라를 조종하고 있다고 설득하라.


과거에 비해 현대사회의 파벌화에서 두드러지는 측면은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네트워크에 대한 강한 의존이라 할 수 있겠다. 혹자는 이를 개인의 문해력과 사고방식의 차이라 치부하나, 공격적 집단정서에 기반한 언동이 곧 수익으로 직결되는 사회에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대안현실이 진실로 탈바꿈되는 데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맞춤형 알고리즘'의 부상 이래 소셜 미디어는 가짜뉴스와 허위 정보, 대안현실의 배양실로 기능하고 있다. 공정과 사실에 기반한 발언을 요구받는 정치인과 정당 또한 예외가 아니며, 심지어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형국이다. 시공간의 제약이 덜한 온라인 공간에서의 공명은 자국 정부와 시민사회에 대한 테러의 시발점, 대표 없는 구심점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p.151 민주주의에서 후보자들에 관해 좋은 결정을 내리려면 유권자가 좋은 정보를 입수해야 하는데, 소셜 미디어는 유권자들에게 나쁜 정보를 쏟아붓고 있다. 사람들이 민주적 절차에 대한 신뢰를 상실함에 따라 대안적 체제를 지지하는 성향이 강해진다. 그리고 보호와 어느 정도의 미래를 약속하는 카리스마적 개인의 수중에 기꺼이 권력을 쥐어 준다.

p.264 정치적 양극화 때문에 내전 발발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내전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파벌화다. 시민들이 종족이나 종교, 지리적 구분을 바탕으로 집단을 형성하고, 정당들이 약탈적으로 바뀌어 경쟁자를 배제하고 주로 자신과 지지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실행할 때 파벌화가 완성된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만큼 파벌화를 부추기고 가속화하는 것은 없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사회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지금, 전쟁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사이에, 너무도 가까이 있다. 꺼지지 않고 다만 숨어있을 뿐인 이 불씨를 잠재울 길은 오직 공정하게 기능하며 성원의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정부와 그를 위한 시민사회의 감시와 소통을 활발히 유지하는 것뿐이다. 익숙한 일상은 언제나 무너지기 쉽다. 끝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우리-아님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공생하는 사회, 누구도 생계를 위협받지 않는 사회 복지, 음모론과 공격적 언사에 의존하는 대신 스스로 사유하고 자유롭게 발언하는 시민사회.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것들이 모여 그토록 연약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고 지탱한다. 지금, 여기, 포화의 문턱에 선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길은 무엇인가. 피할 수 없는 기로에 선 지금, 무거운 마음으로 묻는다.

p.247 아노크라시를 특히 취약하게 만드는 문제는 무엇일까? 달리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어떤 특징이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할까? (…) 법치, 발언권과 책임성, 유능한 정부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은 정부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도와 정치 제도가 탄탄하고 정당성과 책임성이 있는 정도를 반영한다. 거버넌스가 개선되면 이후에 전쟁이 벌어질 위험성이 줄어든다.

p.253 21세기의 시민 교육 교과 과정은 엘리트들의 권력을 상쇄하는 탄탄한 유권자층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체제에 대한 신뢰와 믿음도 확대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리우에 따르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우리 대다수가 민주주의가 작동한다는 것을 믿을 때에만 작동한다〉.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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