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찬 회의론자 - 신경과학과 심리학으로 들여다본 희망의 과학
자밀 자키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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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닌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가 희망은 대책없는 환상으로, 냉소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로 여겨지고 있다. 세상은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타인으로 가득하며, 제각기 이득을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어 보인다. 이런 세상에서 신뢰와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진정 냉소만이 유일한 생존 전략으로 남게 될까?

답 이전에,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냉소는 정말 '현실적인' 판단일까? 그것에는 기대만큼의 이점이 있을까? 현실이 냉소주의를 만들어내는 것인가, 그 반대인가. 흔히 냉소와 회의는 같은 것으로 치부된다. 저자는 이 둘 사이에 선을 긋고 시작한다. 회의가 정보와 상황을 다각도로 평가해 섣부른 판단을 피하려는 신중함에 기반한다면, 냉소는 타인과 세계에 대한 불신, 때로는 선제공격으로 무장하는 태도다.

p.13 냉소주의는 우리를 결속시키는 심리 접착제 성능을 떨어뜨린다. 신뢰는 타인에게 자신을 기꺼이 노출하는 마음으로 타인이 무언가를 제대로 할 것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희망은 이런 식으로 사람들 사이에 둥지를 튼다. 반면 냉소주의는 신뢰를 서서히 부식시키면서 우리의 현재를 앗아가고 긍정적인 미래를 그리는 능력을 무디게 한다.

p.64 회의론자는 새로운 정보를 기반으로 자신의 믿음을 갱신하면서 복잡한 세상에 적응한다. (...) 연구 결과에 의하면 냉소주의 수준으로는 그 사람이 얼마나 회의적인지 예측되지 않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냉소론자는 음모론에 빠질 가능성이 큰 반면 회의주의자는 이런 인지적 오류에 덜 빠진다.


현대화와 함께 개인 중심으로 파편화된 사회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고독하다. 공동체 안에서의 교류나 타인과의 물리적, 감정적 접촉으로 얻는 긍정성보다는 내면으로의 후퇴, 자발적인 고립에 열광하며 이른바 "자기돌봄" 상품을 끝없이 소비한다. 각종 미디어의 발달로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초연결의 시대에 급증한 관계피로가 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밖에도 희망을 좀먹는 것은 수두룩하다. 불평등, 빈곤, 소통과 교류를 대신하는 수량화의 경제, 자극적인 어휘로 관심을 갈취하는 각종 매체 등.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 정말 각자 스스로를 돌보고 견고한 장벽을 쌓아 틀어박히는 것만이 답일까? 세상은 정말 그렇게 위협적이고, 타인은 언제든 배신과 착취를 일삼을 존재인가? 서로를 불신하고 경쟁에 몰두하는 사회는 그 신념처럼 개인의 안전과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가?

p.43 신뢰도가 높은 공동체는 많은 면에서 신뢰도가 낮은 공동체를 앞질렀다. 신뢰도가 높은 공동체 구성원은 더 행복하다. 행복도 측면에서 볼 때, 신뢰도가 높은 단체에서 살아가는 것은 보수가 40퍼센트 오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들은 신체적으로 더 건강하고 남과의 차이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자선 단체에 기부도 많이 하고 공동체 관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적다.

p.91 가난한 사람들이야 그들을 차가운 곳으로 내몬 문화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평등한 지역에서는 부유한 사람들 역시 서로를 덜 신뢰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불평등이 제로섬 심리를 창출해서 다른 사람이 손해 볼 경우에만 자신에게 이득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승자도 궁지에 몰린다. 이들의 이득은 언제라도 뺏길 수 있으며 많은 사람은 승자의 이득을 갈취하고 싶어 한다. 동료와 이웃, 낯선 타인은 경쟁 상대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들던 때에, 가장 긴 밤을 지새우고 길을 여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느꼈듯이 낯선 이를 직접 마주하는 게 얼마나 큰 변화의 동력이 되는지 느꼈을 것이다. 기꺼이 신뢰를 드러낼수록 연대는 크게 확장된다는 것 또한. 막상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혹자는 익숙한 패배만을 외쳤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사례에서 보듯, 냉소는 현실적이지 않다. 냉소주의자는 부정적 예견에 경도되어 현실의 가능성을 무시한다. 현실을 내세운 냉소가 파괴하는 것은 단기적 이득이나 개인의 행복 뿐만이 아니다. 변화와 연대의 힘이다. 공동체의 신뢰관계와 그를 통해 형성될 우호적이고 안정적인 관계의 가능성이다. "현실"을 말하며 패배와 절망을 확신하는 사회는 역설적으로 "진짜 현실"의 가능성을 무너뜨린다.

p.163 신뢰는 사람에 대해 알려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킨다. 변화는 신뢰에 대한 보답이다. 호혜의 사고방식은 이런 원칙을 이해한다. 신뢰의 도약은 바로 이 앎에서 영감을 받은 행동으로 타인에게 의도적인 베팅을 하는 것이다. 선제공격이 사람의 최악을 끌어내는 반면 신뢰의 도약은 사람의 최선을 이끌어낸다. (...) 신뢰는 요란하게 소리를 낼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상대방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보여줄 기회를 분명하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p.235 허무주의는 냉소주의의 특징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벌에 관한 냉소적인 관점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리석은 생각이다. 정치적 절망감이 판을 치면 사기성이 가장 강한 정치 권력자들이 힘을 얻는다. 서로 다른 집단 간의 건설적인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한 그쪽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는 법이다. 사람들이 계속 당의 정체성을 가지고 싸운다면 불평등 심화처럼 우리 대부분이 공유하는 어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냉소는 전염된다. 쉽게 확산된다. 그러나, 희망 또한 그러하다. 가망 없어 보이는 희망은 대책없는 낙관이나 피상적 구호가 아니라 "문제에 대응하고 상황이 나아질 수도 있다는 분별 없는 믿음"이다. 이것이 바로 희망찬 회의론일 것이다. 범람하는 비극적 가십이 아닌 작은 가능성까지도 놓치지 않는 것.

이 책의 독자들이 믿음으로 선뜻, 뛰어들기를 바란다. 대책없는 낙관주의자가 아닌 희망찬 회의주의자가 되기를 바란다. 절멸 직전의, 분열된 세계에서도 우리는 분명 나아갈 수 있다고, 주어진 숫자가 아니라 직접 마주한 사람을 믿고, 나눔과 신뢰로 연결될 수 있다고, 섣부른 냉소 대신 부서지지 않는 희망을 끌어안기를 바란다.

p.141 우리 모두는 더 정확하고 덜 냉소적인 뉴스를 선택할 능력이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가 선택하는 뉴스가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가십은 정보 공유를 위한 고대의 수단이었고 아마 지금도 누군가는 여러분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여러분이 목격한 친절과 정직을 사람들과 나누면서 부정적인 대화를 좋은 쪽으로 균형 있게 이끌어보라.

p.295 지금까지 이 책을 통해 목격했듯이 우리 믿음은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 때문에 진실은 기분 좋은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이든 우리는 외딴섬에서 홀로 억압에 맞서 싸우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건 틀린 생각이다. 진실을 알면 분노에 효능감이, 부적응에 창의력이 더해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 연대를 결성해 바위를 같이 밀어올려 마침내 언덕 꼭대기까지 올릴 수 있다.


*도서제공: 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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