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의 상자
정소연 지음 / 래빗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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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말해왔다. SF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현실 바깥을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현실적일 수밖에, 현실을 발 딛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고. 상상에는 날개가 있을까. 존재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만일, 어쩌면, 왜... 이어지는 물음들에는 언제나 회의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사랑을 믿었다. 함께 걷는, 의심 없이 돌아보는 마음이 있음을 차마 의심할 수 없었다. 담담하게, 조용히 사랑하는 순간이 있음을, 삶이 벅찬 날에는 그 기억을 꺼내 끌어안고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어떤 말은 한순간도 잊을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p.48 하정은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마치 오늘 일과처럼 담담히 말하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할머니가 남긴 깃발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방으로 만들어 쓰는 사람이었다. (...) 하정은 그런 식으로, 계속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p.170 서로의 손바닥이 습기로 살짝 달라붙던 감촉이 생생해. 너는 마치 습도를 확인하듯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손바닥만 살짝 뗐다가, 도로 제대로 쥐고 네 허벅지 위로 당겨 올리고는 마치 날씨를 가늠하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더니 말했지. 밤에만 비가 오는 행성도 있다고.


오직, 슬픔의 무게는 영원임에 틀림없다고. 어떤 순간은 순간이 아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었지만, 충분히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 못한 '만약'들이 밀려오던 밤에는 심장이 혓바닥에 올라앉은 것만 같아 이를 악물고 숨을 참았다. 또다른 밤엔 온몸이 눈물이 되어 넘쳐흐르는 것처럼 울었다. 모든 순간이 마지막이었고, 유일한 기회였으며, 선명한 가능성이었다.

작가가 그려넣은 빛의 속도로 우주를 가로지르는 세계에도, 의심한 적 없던 연약한 일상이 무너지는 전염병의 시대에도 나는 번번이 주저앉아 우는 사람이 되었다. 닿지 않는 말들, 닿을 수 없는 말들, 영원처럼 찍힌 마침표에. 소리가 되지 못한 울음이 되어 단단히 웅크렸다.

p.172 무한한 슬픔은 크기가 같아서 더 큰 슬픔과 더 작은 슬픔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 아니야. 아침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빛나는 나무를 보고 비 온 뒤에도 세상이 맑고 아름답다고 감탄했다가 원래 여기는 새벽안개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슬펐어. 더 작은 슬픔이 더 큰 슬픔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듯이 슬펐어.

p.319 네가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여기는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멀쩡해. 네가 없는데도, 네 배는 지도 위를 떠돌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웃고 대화하고 심지어 마스크도 안 쓰고 있어. 다 죽이고 싶어. 다 죽이고 나도 죽고 싶어.


그저 고통과 그리움의 덩어리로, 상실과 부재 한가운데 파묻은 '만약'의 말들로만 읽혔다면 덮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있지는 않았을 테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선명한 경계를 그리는 냉정함이 너무도 아름다워 도리어 손을 놓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다시 묻게 했다.

작가는 "우리는 망설이고 의심하면서도 확실하게 한 걸음씩 결국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그 믿음을 말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래. 이 서럽고 외로운 세계에, 상실에도 희망은 있다고, 영원은 절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294 미정은 꽤 오랫동안, 수진이 두 명인 줄 몰랐다. 네 번째 수진과 다섯 번째 수진이 숨긴 것은 아니었다. 미정은 두 수진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두 수진은 같은 옷을 입었고 습관도 비슷했다. 무엇보다도 생김새가 똑같았다. 활동 시간만 달랐다.

p.365 현숙은 강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걸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마치 이렇게 나이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평화로운 날이었다.


그의 소년은 말한다. "저 하늘 너머에 있는 건 빈 공간이 아니라 우주로 나가는 길(29)"이라고. 그러므로, "말 그대로, 아득한 우주에서도, 무너진 세계에서도 저 멀리 반짝이는 '당신'을 발견하는" 이야기에서, 마침표 이후의 세계를 본다. 사라졌지만 잃지 않은, 이별했지만 떠나보내지 않을, 그 모든 '만약' 너머의 가능성을 믿는다.

열 두 편의 수록작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어쩌면 영원이겠지만 절대는 아닌 것이 있음을 믿는다. 언젠가 내게 그러했듯 너에게 내가 아는 고통이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잔상처럼 눈가를 떠도는 사랑"을 흘려보내지 않는 이 모든 이야기가 사랑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젠가 읽었듯, 이 세계가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이기를 빈다.

p.29 "이건 나한테 아주 소중한 꿈이야. 그리고 언젠가 네게 이 말을 다시 할 수 있고, 그때는 너에게 소중한 것을 알 수도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일 것 같기도 해. 나한테 넌, 그만큼은 소중하니까."

p.247 그리고 그럴 때면 나는 조금은 이기적으로, 하지만 더없이 간절하게, 내가 이 아이에게 처음이 아니기를 기도한다. 이 아이가 언젠가 누군가를 잃어야 한다면, 비명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잔상처럼 눈가를 떠도는 사랑에 고통스러워하는 때가 온다면, 그 사람이 내가 아니기를. 내가 누구에게도 처음이 아니길.


*도서제공: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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