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장국으로 날아가는 비행접시
곽재식 지음 / 구픽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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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소설계에는 이른바 "곽재식 속도"라는 것이 있다. 그 뜻이 무엇이냐, 어떤 작가의 글쓰기 속도를 측정하는 단위로, 어원이 된 곽재식 작가가 6개월에 4개 꼴로 단편작을 집필한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에서 비롯되었다. 즉, 1곽재식 속도는 연간 8개 단편작을 집필한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공장에서 틀 찍듯 쑥쑥 내기만 한다고 끝이 아니다. 옛말에 잘 쓰면 개성, 못 쓰면 한계라 했다. 처음 들어보는지. 당연하다. 방금 생각해냈으니까. 신간 사고 돌아서는 차에 또다른 신간이 나온다는 이 작가의 팬이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는 이유는 다작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서사와 딱 봐도 아, 이 작가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하는 개성, 그리고 날카로운 통찰이 있기 때문이리라.

p.32 "인류는 인공지능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p.40 "그러다 보니 그런 문제에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투자가 몰렸습니다. 다른 일은 점점 등한시했죠. 재난을 극복하는 기술을 개발하거나, 사람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는 데 대한 투자를 모두 포기하고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오직 자신의 로봇을 돌보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런 작가의 초단편 모음집이라니. 2천 자 남짓의 짧은 글에 어떤 이야기를 담아냈을까. 이번에도 하이퍼 리얼리즘 현대인 공포로 비명을 지르게 할지, 그저 깔깔 웃게 할지, 싸늘하고 무거운 뒷맛을 남길지... 13편의 수록작들에 대한 나의 감상은... 대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면 이런 얘기를 써내십니까? 사랑합니다! 땡큐! 랄까.

그의 작품에는 신념을 지닌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도, 작고 연약한, 아니 미약하고 티끌같은, 그러나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을 지닌 이가. 그것은 때때로 파국의 불씨가 되거나, 반대로 수많은 우연이 겹치고 덧대 도달한 기적이 되기도 한다. 찰나의 작은 균열이, 순간의 선택이 엄청난 미래를 불러오듯이.

p.95 "몰라요, 저도. 민주공화국에서 백작이 고위직인지 뭔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근데 저희 비공개수사전담 3팀이 별별 이상한 사건을 다 맡다 보니까, 이제 뭐 좀 이상하다 싶으면 저희들한테 다 떠넘기고 그래서. 또 공무원 사회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p.202 그런데 쥐의 뇌 크기는 너무 작았다. 원래 여우고개 전설이 사람이 소로 변하는 내용이었던 것은, 소가 일을 많이 하는 동물이라는 것도 있지만, 소의 머리가 크다는 이유도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 그 많은 생각과 지식과 기억과 판단과 사상과 성격이 그대로 다 저장되어 남아 있기에는 쥐의 얼마 안 되는 뇌의 크기와 공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의 이야기에 사람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한계, 사람이기에 낼 수 있는, 어쩌면, 마음이 있는 존재가 갖는 힘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작가가 써낸 세계에는 그 믿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세계의 끝에서도, 일상의 변두리에서도 누군가가 살아가고 말하고 갈등한다. 소멸하고 태어난다. 혹은, 그 시작을 향해 발을 내디딘다.

이쯤에서 마르고 닳도록 해온 말을 다시 꺼내볼 필요가 있다. SF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가장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현실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현실 바깥을 상상하는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현실을 강하게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 책의 수록작들 또한 그렇다.

p.80 "제가 정말, 간절하게, 딱 한 번만 더 보고 싶다고, 평생 한 번만 더 나타나서 저에게 마지막으로 보여 주고 알려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모습, 그 형체, 그때 보고 죽어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이, 정말 똑똑히 정확하게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더라고요."

p.142 "세상은 그냥 정해진 원리대로 이치에 맞게 돌아가는 거잖아. 소원을 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 소원이 그냥 이루어진다면 그건 굉장히 이상한 거야. 세상이 돌아가는 걸 망가뜨리는 특별 예외 규칙 같은 게 있다는 얘기잖아. 그러면 세상의 원리에 구멍이 숭숭 뚫린거나 다름 없어. 그런 건 똑바로 된 세상이 아니지."


다른 작가들에 비해 특별한 점이 있다면, 굳이 멀리 가지 않고 현실의 희미하게 어긋나고 가려진 틈을 들여다본다는 것일까. 그래서 더욱 있을 법하다고 느끼게 한다. 깜빡 넘어가 끌려들어간 세계에서 함께 엉 울어버리거나, 누군가의 등을 마주한 채 긴 침묵에 잠기게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감상보다는 찬사다. 언제고 이 작가의 이름을 마주하는 때가 되면 주저없이 집어들어 추천! 을 외치겠다는 선언이다. 누구든 곽재식-다움을 만나고 싶다면, 그 화려한 "말빨"에 기꺼이 홀리고 싶다면, 몇 번이고 권한다. 당장 빠져들 것을. 아니, 선생님, 일단 한 번 들어보세요...

p.144 호성은 말을 하려고 했다. 너무너무 보고 싶다고, 한 번 만이라도 더 만나게 해 달라고. 그렇게 소원을 빌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습도 하지 않은 말이라, 입을 열고 멋있게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갑자기 우는 목소리가 나와서 몇 번이고 망설이기만 했다.

p.203 이제 쥐 한 마리 수준밖에 되지 않는 생각을 갖게 된 그가 마지막까지 머릿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가끔 그는 그저 앞뒤도 없이 "희정아, 희정아."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도서제공: 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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