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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 아노크라시, 민주주의 국가의 위기
바버라 F. 월터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평점 :
내전, 한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이다. 같은 영토, 삶의 기반, 많은 경우에 소속감을 공유하던 집단이 여러 하위 집단으로 분열되어 일어나는 갈등이다. 이는 민주주의 체제의 필수 요소인 다양성-갈등 수준이 아닌, 절멸까지도 요구할 가능성이 있는 전쟁을 의미한다.
내전은 국가-외부와의 대립이라는 익숙한 관념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서로 간의 교집합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대안현실을 발명, 강화한다는 점에서 "외부의 적"에 맞서는 익숙한 전쟁 도식과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이 "내부 총질"은 언제, 왜, 어떻게 일어나는가? 저자는 앞선 연구들을 통해 아노크라시, 독재와 민주정의 중간 구간인 불안정 체제에서 내전이 촉발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p.32 어떤 나라가 내전을 겪게 될지 여부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지표는 그 나라가 민주주의를 향해, 또는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움직이고 있는지 여부다. (...) 시민들이 완전한 민주주의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정부가 언제나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독재자 지망자가 권리와 자유를 조금씩 갉아먹고 권력을 집중하면서 주주의가 쇠퇴할 수 있다. (…) 대개 바로 이런 중간 구간에서 내전이 일어난다.
p.36 전문가들이 내전 발발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요인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충돌이 일어날 위험이 가장 높은 나라는 가장 가난하거나 가장 불평등한, 또는 종족적, 종교적으로 가장 이질적이거나 심지어 가장 억압적인 곳도 아니었다. 시민들이 총을 집어 들고 싸움을 시작하게 만드는 것은 부분적 민주주의였다.
인용된 연구에서 밝히듯 민주정에서 비민주적 체제로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중간 구간에서도 다양성-분열과 갈등이 내전으로 발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 양극화보다는 파벌화가 주요 요인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안정된 민주주의를 유지해온 사회들에서 내전의 위기가 나날이 증가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 파벌이 일종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형성된다면, 한국의 파벌주의는 무엇에서 힘을 얻는가? 이를테면, 어떤 지역 혹은 소득 수준 혹은 공유하는 문화정서에 기초하는가? 한국의 극우세력이 모순되게 주장하는 과거의 영광, 우방은 무엇으로의 노스탤지어인가? 그들은 무엇을 빼았겼는가?
p.95 사람은 원래 잃는 것을 싫어한다. 이득을 얻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손실을 복구하려는 동기가 훨씬 강하다. (...) 원래 자기 것이라고 믿는 장소에서 지위를 상실하는 것은 못 참는다. 21세기에 가장 위험한 파벌은 한때 지배적이었으나 쇠퇴에 직면한 집단이다.
p.265 파벌주의를 움직이는 중심적 힘은 언제나 음모론이었다. 사람들이 행동하도록 선동하기를 바란다면, 〈타자〉를 표적으로 던져 주면 된다. 그들의 집단을 해치기 위해 고안된 배후의 음모를 강조하라. 적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나라를 조종하고 있다고 설득하라.
과거에 비해 현대사회의 파벌화에서 두드러지는 측면은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네트워크에 대한 강한 의존이라 할 수 있겠다. 혹자는 이를 개인의 문해력과 사고방식의 차이라 치부하나, 공격적 집단정서에 기반한 언동이 곧 수익으로 직결되는 사회에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대안현실이 진실로 탈바꿈되는 데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맞춤형 알고리즘'의 부상 이래 소셜 미디어는 가짜뉴스와 허위 정보, 대안현실의 배양실로 기능하고 있다. 공정과 사실에 기반한 발언을 요구받는 정치인과 정당 또한 예외가 아니며, 심지어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형국이다. 시공간의 제약이 덜한 온라인 공간에서의 공명은 자국 정부와 시민사회에 대한 테러의 시발점, 대표 없는 구심점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p.151 민주주의에서 후보자들에 관해 좋은 결정을 내리려면 유권자가 좋은 정보를 입수해야 하는데, 소셜 미디어는 유권자들에게 나쁜 정보를 쏟아붓고 있다. 사람들이 민주적 절차에 대한 신뢰를 상실함에 따라 대안적 체제를 지지하는 성향이 강해진다. 그리고 보호와 어느 정도의 미래를 약속하는 카리스마적 개인의 수중에 기꺼이 권력을 쥐어 준다.
p.264 정치적 양극화 때문에 내전 발발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내전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파벌화다. 시민들이 종족이나 종교, 지리적 구분을 바탕으로 집단을 형성하고, 정당들이 약탈적으로 바뀌어 경쟁자를 배제하고 주로 자신과 지지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실행할 때 파벌화가 완성된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만큼 파벌화를 부추기고 가속화하는 것은 없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사회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지금, 전쟁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사이에, 너무도 가까이 있다. 꺼지지 않고 다만 숨어있을 뿐인 이 불씨를 잠재울 길은 오직 공정하게 기능하며 성원의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정부와 그를 위한 시민사회의 감시와 소통을 활발히 유지하는 것뿐이다. 익숙한 일상은 언제나 무너지기 쉽다. 끝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우리-아님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공생하는 사회, 누구도 생계를 위협받지 않는 사회 복지, 음모론과 공격적 언사에 의존하는 대신 스스로 사유하고 자유롭게 발언하는 시민사회.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것들이 모여 그토록 연약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고 지탱한다. 지금, 여기, 포화의 문턱에 선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길은 무엇인가. 피할 수 없는 기로에 선 지금, 무거운 마음으로 묻는다.
p.247 아노크라시를 특히 취약하게 만드는 문제는 무엇일까? 달리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어떤 특징이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할까? (…) 법치, 발언권과 책임성, 유능한 정부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은 정부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도와 정치 제도가 탄탄하고 정당성과 책임성이 있는 정도를 반영한다. 거버넌스가 개선되면 이후에 전쟁이 벌어질 위험성이 줄어든다.
p.253 21세기의 시민 교육 교과 과정은 엘리트들의 권력을 상쇄하는 탄탄한 유권자층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체제에 대한 신뢰와 믿음도 확대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리우에 따르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우리 대다수가 민주주의가 작동한다는 것을 믿을 때에만 작동한다〉.
*도서제공: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