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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미술관 - 다정한 철학자가 들려주는 그림과 인생 이야기
이진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평점 :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들어가려면 여성은 나체여야 하느냐'고 묻는 슬로건이 벌써 40여년 전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했을까. 그동안, 아니, 그 전부터, 세계는 여성에게, 딸, 누이, 언니에게 자신을 모욕하는 것들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라 얼마나 끈질기게 말해왔을까.
여성의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인간다움의 이야기와 중첩된다. '여성'이기 전에 인간이고, 인간다울 권리 이전에 '여성다워'지기를 요구받기 때문이리라. 슬프게도 근래의 급진적 변화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여성에게 인간이기 전에 여성이기를, 인간성을 뛰어넘는 여성이기를, '남성-인간'에 못미치는 존재로서의 여성이기를 요구한다. 아니. 강요한다.
p.43 산다는 것은 동사다. 어딘가에 가만히 놓여 있는 명사가 아니라, 걷고 달리고 고꾸라져 넘어지고 숨을 고르고 다시 일어서서 발을 내딛는. 그렇다면 이렇게나 무수한 동사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데 어째서 근육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일까. 딸들에게 울퉁불퉁한 근육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너희는 가만히 명사로 살아가라는 얘기다.
p.61 오늘날 메두사의 머리는 아직도 한스럽게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여성 정치인이나 지도자,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가진 여성들이 못마땅한 대중은 이들을 줄기차게 메두사의 이미지로 합성해낸다. 조롱과 혐오의 의미를 담아서 '끔찍한 괴물, 참수해야 할 대상'으로.
많은 이가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나누는 오랜 도식에 익숙할 것이다. 길들여졌다는 쪽이 더 어울릴, 치밀하고 공고한 모욕. 오래된 멸시, 협박에 가까운 그것은 시대에 따라 이름을 조금씩 고쳐가며 반복되었을 뿐, 사라진 적이 없다. 재생산의 수단, 성욕의 배출구, 노동력, 가재도구, 권력 없는 자, 마녀, 이성 없는 자인 동시에 이성을 흐리는 자, 숭배와 경멸.
이 모든 말들은 권력이 내세운 얼굴과는 달리 양분되지 않고 이체자로 기능했다. 그러면서 어느 것하나 여성 스스로에 의해 취해지지 못하고 그저 주어지는 것, 낙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면서도 마치 그 '행실'에 달린 것인양. 하늘이 내려준 숙명인 양. 생각할수록 놀랄만큼 효율적이고 강력한 고삐였던 셈이다.
p.83 마녀라는 단어는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대명사다. 나는 천사보다 마녀라는 단어가 더 사랑스럽다. 그 안에는 눈물과 멍자국도 있지만 아름다운 불꽃이 들어 있다. 세상이 나를 부당하게 대할 때, 너를 당치 않은 이름으로 부를 때, 우리를 어처구니없게 만들 때, 그 작은 불꽃들이 꺼지지 않고 아름답게 타오르기를 응원한다.
p.98 우리는 젊고 예쁜 것에 과도한 권력을 주는 경향이 있다.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모두 필연적으로 지는 게임을 만들어두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 게임에 열광하는 것과 같다. 나도 이 게임을 가끔 하고는 있지만, 이 전국민적 차원의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생각해보면 밑지는 장사인 이 게임을 내가 왜 하고 있는지 모두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좋겠다. 이 게임은 대체 누가 만들어 유통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그런 세상에서 여성은 슬퍼하고, 연약하며, 섬세하기 때문에 열등하다. 사람이기 때문에 열등하고,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을 견뎌내야 한다. '몸'인 동시에 몸을 가진 존재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떻게 딸에게, 자매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우리가, 그들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에게 이 세계를 사랑하라 말할 수 있을까. '안돼'와 '안 돼'로 점철된 세계에서 어떻게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을까. 과연 혼자 살기도 벅찬 세상에, 손을 내밀기를 멈추지 않아도 되는 걸까. 마음껏 주저하고 감각하는 사람이어도 좋을까.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고, 아니, 그래야 한다고. 이 책은 미술 작품에서 나타난 여성과 그를 다루는 시선을 넓고 깊게 확장해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가닿고자 하는 시도다. 제목처럼 딸에게, 자녀에게 건네는 말이다. 정답이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살아본, 조금 먼저 태어난 여성으로서 풀어놓는 경험담이다.
p.176 생긴 대로 존재할 수 있는 너그러움, 갈팡질팡과 우왕좌왕의 아름다움이 없다면 우리 삶의 조건은 잔인해진다. 매끄러움은 대체로 다정하지 않다. 포옹도 근본적으로 마찰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서로에 대한 저항력 덕분에 우리는 상대를 더 꼭 껴안을 수 있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것, 틈의 존재와 서투름의 미학을 불편해한다면 내 삶도 결국 불편해진다. 우리는 모두 서툰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서투르고 연약하지 말라고, 슬픔과 사랑 없이 홀로 영원히 강한 존재가 되라고 하는 대신, 서투름과 연약함, 슬퍼하고 사랑하며 기뻐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의 가치를 말한다. 고르지 않은 세상을 끊임없이 감각하는 소중함을 통해, 여성들에게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을 돌려주는 일이다. 처음부터 늘 그래왔듯이. 사람 바깥으로 불리면서도 한 번도 사람 아닌 적이 없었듯이.
내게 그랬듯, 누군가에게 이 책이 잔잔한 위로이자 응원으로 읽히면 좋겠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주고받는 한담처럼, 다정하게 읽히기를 바란다. 사는 일이 그렇지 않은가. 조금쯤 슬프고, 쉴새없이 감각하는 일이지 않은가.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처럼. 수많은 시선으로 읽히는 것처럼.
p.161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슬픔의 영역이 늘어나지만, 영역의 확장이 저절로 일어나지만은 않는다. 슬픔을 감각하는 능력을 부지런히 키우는 것은 어른의 책무이기도 하다. (...) 뒤에 오는 이들에게 눈물로 씻어낸 조금 더 맑은 세상을 전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을 '할 일'로 여긴다.
p.288끝이 새로운 시작이 되듯이, 뒤는 새로운 앞이 된다. 우리 삶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지 단계별로 단절된 시간들이 아니듯, 우리는 봄에서 여름을 보고, 여름에서 또 가을을 본다. 모든 계절은 무 자르듯 토막토막 잘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드랍게 포개 안고 있다. 봄꽃 향기 속에서 문득 여름의 태양 냄새가 느껴지고, 여름날 장대비 속에서 볼을 빨갛게 하고 있는 나뭇잎 하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