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으로서의 글로벌 차이나 - 시장주의와 반공주의를 넘어, 비판적 중국 연구의 새로운 시각
이반 프란체스키니.니콜라스 루베르 지음, 하남석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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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권위주의 정부 이미지로는 북한과 더불어 둘째 가라면 서러울 나라. 경제 규모로도 인구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신흥강국을 넘어 새로운 패자로 떠오르는 나라. 동시에 불신과 혐오, 혹은 유럽 제국주의를 무찌를 공산국가의 희망으로 불리는 나라, 중국.

세계 어디든 '메이드 인 차이나'를 찾아볼 수 있는 시대다. 엄청난 저임금 인력으로 밀어붙여지는 물량공세와 당-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 정부에서 개인으로 이어지는 촘촘한 조직체계까지.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써본 사람은 없을 생필품과 소모품, 완제품부터 부자재까지 모든 영역에, '차이나'가 붙어있다.

p.18 무엇보다 이들이 "방법으로서의 글로벌 차이나"를 통해 강조하는 측면은 중국이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의 한 구성요소라는 점이며,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중국에 미치는 영향과 그 역으로 중국이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를 또 어떻게 변화시켜나가고 있는지 그 상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p.25 지구적 사회・경제 체제에 통합된 지 40년이 지나 ‘세계의 공장’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경제체가 된 지금에도 중국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는 중국을 ‘실재’ 세계 외부에 존재하는 근본적으로 다른 ‘타자’로 상정하며 계속되고 있다.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중국은 일반적으로 상황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외부 세력으로 묘사된다.


수천 년의 역사는 차치하고라도, 현대 중국, 좁게는 마오쩌둥 집권 이후 중국의 이미지는 저가상품이나 노동착취, 전방위적 인해전술 등 황화론에 동원되는 모든 수사에서 부정적 영역에 위치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수사만 보아도 경제파트너와 '공산당 악마'를 정신없이 오가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중국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중국의 모든 부정적 측면은 그들의 '사회주의 정부'에 기인하는가? 신제국주의 체제에서 벌어지는 북미유럽권의 경제적, 문화적 폭력은 동북아와 남반구 국가의 '미개'와 얼마나 다른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파악하며, 어떻게 해법을 찾을 것인가?

p.19 중요한 것은 중국을 따로 떼어놓고 자본주의 국가인지 사회주의 국가인지 규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하나의 구성 요소로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또 이 체제를 어떻게 변화시켜나가고 있는지 그 연결점과 연관 관계를 세심히 살펴보는 것이다. 그 속에서 현재 중국과 지구적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중첩된 형태의 야만에 대한 비판과 투쟁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p.112 다시 말해 수용소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 체제가 중국에 의해 타락했다는 징후도 아니고 단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특징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위구르 인권정책법과 인공지능 및 안면 인식 관련 중국 기업 블랙리스트는 매우 상징적이고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하지만, 인권 침해의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기보다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실체'는 정말 중국만의,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만의 문제일까? 자본주의 체제와 '서방 선진국'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인가? 그들의 이름으로 묶이는 문제들은 (애초에 사회주의의 반대말이 아니지만) '자유주의의 승리'로 종식될 수 있는가?

물론 두 저자 모두 위구르 강제수용소와 국내외의 노동자 착취, 개인정보의 무단 사용 등 현존하는 문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강력한 실질적 일당독재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고수하며 전방위적 영향력 침탈의 시도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반사적 혐오와 황화론적 공포를 걷어낸 자리에 드러나는 실체의 정확한 이름이, 그 뿌리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p.92 자본주의 정치경제에 내재된 불평등과 예속의 형태를 고착화하고 악화시킬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부자와 권력자가 휘두르는 감시와 사회경제적 통제의 억압적인 도구가 계속 날카로워짐에 따라 이 체제가 공유하고 있는 합리성, 관행, 잠재적 결과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방향으로 이러한 기술을 재편하고 이러한 기술에 집단적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우리의 기회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156 중국의 사례들이 다양한 외부 이해관계자들이 신자유주의적 대학을 포섭하는 방식, 즉 주로 공공 자금을 투입해 수십 년에 걸쳐 구축된 연구 인프라를 운영하는 대신 상대적으로 최소한의 자원을 들여 자신들의 의제를 추진하는 방식과 어떻게 유사하게 가고 있는지를 잘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제들은 종종 이 기관들이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가치들과 명백하게 모순되는 경우가 많다.


좋든 싫든, 현시대의 각국은 중국에 대해 무시로 일관할 수도, 공산주의 연방의 향수에 젖어 무조건적으로 편을 들 수도 없다. 두 저자는 이상화와 적대시 두 관점 모두에 내재된, 중국을 '우리'와 유리된 존재로 타자화하는 시선을 걷어낼 것을 제안한다.

제목의 의미는 곧 중국을 대상이 아닌 분석 도구로 간주해 중국과 그들 체제의 문화적, 역사적 특수성과, 세계와의 연관성을 두루 살펴야만 기존의 선입견과 이분법적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실재하는 중국의 실체를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다는 뜻이다. '진짜 중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반중 반공산주의'의 이름 아래 되풀이되고 모방되는 폭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p.44 중국을 논의할 때 담론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 모두에서 중국과 지구적 자본주의의 동역학들을 뒷받침하는 의미 있는 공통점과 상호 연관성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우리는 믿는다. 적어도 바로 그 지점이 우리가 여전히 행동할 힘을 찾아낼 수 있는 자원이다.

p.139 '패권, 제국, 신식민주의 측면에서 포괄적이고 거대한 일반화에 손쉽게 의지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동시에 '세밀하고 근거를 갖춘 경험적, 비교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일대일로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강박을 줄이고 대신 중국 행위자들의 현장에서의 실제 행동에 초점을 맞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며, 고착화된 선입견을 넘어 숨겨진 유사점과 연결점을 발굴하고, 중국의 지구화 패턴이 기존의 배열과 공식에서 구축되고 진화하는 방식을 밝혀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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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공익 - 왜 어떤 ‘사익 추구’는 ‘공익’이라 불리나
류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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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광고, 공익단체, 공익 변호사, 공익에 반하여... 이 '공익'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해석하자면, 공공의 이익이다. 어느 한 집단이나 개인이 아닌 '전체의 이익'을 뜻하는 말이다. 이해관계가 촘촘히 맞물리고 경합하는 현대 사회에, '공익'이란 정말 가능한 개념일까?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정규직 전환, 대학 내 노동자 처우개선, 장애인 이동권 보장, 재개발지역 철거민 보상금 산정, 동성혼 법제화, 성평등 인권 교육... 인권투쟁인 동시에 이기적이라 손가락질 받는 공익투쟁이다. 이것들은 공익인가? 사익인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에게 피해를 주는가? 무엇이 '공공의 이익'으로 불리는가?

p.4 사람들이 말하는 '공익'도 결국 누군가의 '사익•이권'이다. 장애인의 사익, 성소수자의 사익, 아동의 사익, 난민의 사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공익'이라고 부르는가? 문언 그대로 해석한다면 '모두의 이익'이란 뜻인데 과연 누구에게나 이익이 되는 보편타당한 '공익'이라는 게 존재할까?

p.5 이렇게 보면 '공익'이란 허위의 개념이다. 그러나 '공익'이라는 표상이 우리에게 주는 어떤 이미지, 즉 의미의 '이데아'는 분명히 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이렇게 정리해 봤다. 아마도 사회에서 통용되는 '공익'이란, '사회적약자의 사익 중 현재의 공동체 다수가 그 추구 행위를 허용하는 사익'이라고.


우리 사회에서는 '법대로 하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정숙, 기립,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 신성한 권위 앞에 자연스레 공손해진다. 법의 심판, '정의의 철퇴'를 기대하는 마음은 수많은 법정(을 빙자한 멜로)드라마 장면들 곳곳에 녹아들어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법은 정의의 편이고, 국가조직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로 채워져 있는가? 항간의 믿음처럼, 기업은 소비자의 '눈치'를 보며 상식선에서 운영되는가? 국가권력은 돈 많고 힘 있는 자의 이권이 아닌, 사회 전체를 위한 '공정'을 수호하는가?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자들에게 무지하고 가난한 이들의 '떼쓰기'가 문제인가?

이런 사회에서, 과연 공익이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사전적 정의가 아닌, 실제 사회의 개인들이 이해하는 공공이란 대체 누구를 위한 '우리'란 말인가.

p.6 해당 시대, 해당 공동체에서 '공익'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그들이 가장 '이기적'인 목적으로 '과격한' 방식을 사용하여 처절히 투쟁해 승리했을 때, 그때를 우리는 역사가 한 단계 발전한 시점이라고 배운다. 이기적이고 과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일 수 있고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권력에 대한 불신이 필수적이다. 불신과 견제, 언제든 저항할 수 있는 권리와 그를 위한 지속적인 감시와 자정은 민주주의가 존속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것은 '건강한 불신'이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피해의 결과, '경험적 불신'이다.

그러므로 국민정서에 새겨진 공익은 권력의 눈에 '불온한' 자들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불온'한 사익에 둘러진 일종의 인증마크 같은 것이다. '이 정도는 봐줄 수 있다'는 것. 덜 가진 사람, 더 약한 사람이 가진 것 많고 힘 센 자와 한목소리로, '자발적으로' 말하기를 요구받는 사회. 대다수가 그런 사회에, 그렇게 살고 있다.

p.64 지금 우리 사회는 '낡은 것'은 죽지 않으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서 결국 죽지 않고 있으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으려 무관심하거나 무관심하여 태어나지 않는다. '낡은 것'들은 자꾸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둘러대면서 죽지 않고 버틴다. '새로운 것'들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때도 '다름'을 존중하며 결국 태어나지 않는 쪽을 택한다. 이렇게 '낡은 것'의 복지부동과 '새로운 것'의 복지부동이 곱해져서 '낡은 것'은 더더욱 강화한다.

p.146 우리는 모두 상대적 약자다. 잠재적인 권리침해 피해자다. 그래서 나 또한 언 제 쟁의행위를 할지, 집회 시위를 하게 될지 모른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를 위해 참고 힘을 모아야 한다. '불편함의 품앗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연대 의식이다.


저자는 다년간의 공익변호사로 활동하며 함께했던 이들의 역사와 권력이 국민을, 대중을 기만해온 사례를 변호인과 인권투쟁 현장의 목소리로 풀어놓는다. 우리 사회의 '공익'은 '공정'하지도 '공공의 이익'을 대표하지도 않았다고. 그 자리를 폭력과 방관이 채웠다고.

또한 일상에서 '현실적 여건'이나 '사회적 통념'을 이유로 밀려나고 지워지는 이들을 짚는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일이 커진다'며 미뤄지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익'을 추구할 수 있을까. 사익을 '허용'하는 이는 누구인가. 어떤 '사익 추구'는 선망되는 동시에 어떤 것은 떼쓰기가 되는가. 과연 우리는 진실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사회적 동물인 우리에게는 보다 함께, 보다 공정하게 나아가려는 이들가 연대할 사회적 책임이 있다. 이 책은 그 험난한 길을 상상할 책임을 일깨운다. 지금도 어딘가의 누군가는 차마 상상되지 않는 길에 있으니. 읽은 사람아, 가자, 알아버린 사람아, 함께 가자, 그렇게.

p.314 화해는 힘의 균형이 맞을 때 가능하고, 힘의 균형을 위해서 누군가 더 많이 양보해야 할 때가 훨씬 더 많으며, 화해를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한데 용서를 위해서는 사과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렇게 화해로 가는 길은 어렵다. 그래도 화해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이 가진 자의 양보, 잘못에 대한 사과가 있어야 한다. (...) 높게 있는 자가 낮게 임할 때 평화도, 화해도 구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공익'이라는 표현에 알맹이를 꼭 넣어야 한다면 바로 이런 평화, 이런 화해가 아닐까.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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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과 함께 서쪽으로
린다 러틀리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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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105살의 노인의 기록에서 시작된다. 그 자신의 이름처럼 100살 하고도 니켈(5센트)만큼을 더 살았다는, 창밖의 '걸'에게 연신 말을 거는 남자.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모두 쏟아부어 '너'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다는 남자. 그가 이토록 절박하게 전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엇일까. 누구를 향한 이야기일까.

가진 것보다 더 가진 것이 없는, 돌아갈 곳도 머무를 곳도 없는. 사람보다 떠돌이 개에 가까운 소년이 있었다. 우드로 윌슨 니켈, 이른바 우디. 그의 유일한 목표는 캘리포니아로 가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캘리포니아. 실향민의 낙원. 일자리가 넘쳐난다는 곳. 폐허조차 남지 않은 황량한 모래먼지의 땅을 떠나 살 수만 있다면, 정말, 살아 숨 쉴 수만 있다면.

p.40 대공황 시기에 굶주림이란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그냥 당연한 일상이었다. 먼지 폭풍이 가축들을 다 죽여 버린 후에, 더스트 볼 사람들은 프레리도그와 방울뱀을 잡아먹고 회전초로 수프를 끓여 먹었다. 다음 끼니에 먹을 수 있는 식량이 과연 어디에서 올 지를 전혀 알 수 없을 때에는, 먹는 것만이 곧 인생의 전부가 되고 우리는 그저 온종일, 매 순간 배고픔을 쫓는 야생 동물에 불과할 뿐이다.

p.365 나를 살아 있게 해준 동물들이 속에서부터 굶주린 채 죽어 갔고, 어쩌면 내가 되었을지도 모를 평범한 농부가 죽은 소의 배를 갈랐을 때 안에서 나온 건 먼지뿐이었다는 이야기들을. (...) 이 땅은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복수를 했고 대체 뭘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고, 포기할 시기마저 놓쳐 버렸던 때의 일들을.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차마 그만두지도, 놓아 버리지도 못했다고.


당장 먹을 것도, 쉴 곳도, 내일의 생존조차 담보할 수 없는 거리의 '평범한' 부랑아 우디 니켈의 일상에 폭풍이 들이닥친다. 언젠가의 모래폭풍을 떠올리게 하는, 헐떡이는 짐승의 눈이.

허리케인으로 무리를 잃은 새끼 기린들이 미국을 가로질러 동물원으로 이송된다더라. 트럭을 타고, 캘리포니아로. 만일 그들을 따라갈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꿈의 땅에 닿으리라. 그 일념으로 무모한 여정을 시작한다. 훔친 오토바이를 타고.

희망도 잠시, 훔친 오토바이는 못쓰게 되어버리고 다시 한번 좌절에 잠기려던 찰나, 기린을 책임지는 괴팍한 존슨 영감에게 반 애원 반 공갈로 임시 운전수 자리를 따낸 니켈은 다시금 위태로운 모험을 시작한다. 거짓말, 분노의 기억, 희망 없음을 품은 채, 그를 향해 코를 벌름대는 기린을 싣고.

p.97 사람들은 기린들이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린들도 분명히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때 기린들이 낸 소리는 끔찍한 허리케인을 겪은 기린들이 공포에 질려 끙끙거리고, 비명 지르고, 울부짖는 소리였다. (...) 그 소리는 내 가슴에서 요동쳤고 기린의 공포가 마치 나 자신의 공포처럼 느껴졌다. 나는 1초도 더 견딜 수가 없었다.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1930년대, 열악한 도로사정도 모자라 사막을 지나는 길에, 정체가 모호한 '빨간 머리'와의 비밀, 순간순간 엄습하는 기억. 폐허는 그가 가는 곳 어디나 따라붙는다. 기억하라고, 그래봤자 너는 별볼일 없는 가난뱅이 부랑자라고. 살인자. 최소한의 것조차 갖지 못한, 짐승.

상처가 인간의 모습을 한다면 바로 그일까. 기린과 함께하는 길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며 서서히 변화한다. 조건없는 환대, 기린으로 표상되는 희망, 오래전 잃어버린 따뜻한 가족의 모습, 생명을 그저 돈으로만 보는 이들까지. 가족의 죽음을 목도했던 소년은 어느새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대륙을 가로지른다.

여행의 종점에서 그에게 주어진 것은 새 삶의 희망이 아니었다. 별안간 끌려간 전쟁터에서는 다시 수많은 죽음과 주검에 파묻혔으며, 간신히 살아 돌아와서는 죽은 자를 지키는 야경꾼이 되어 다시금 죽음에 맞닿은 시간을 지나 그 자신의 사랑을 떠나보낸 후 죽음을 기다리는 현재가 이어진다. 과거와 현재를 반복해 오가던 이야기는 그렇게 현재로 돌아온다.

p.244 나는 단지, 〈하느님의 신성한 에덴의 우뚝 솟은 피조물〉과 함께 나아가다 내 본모습이 얼마나 끔찍한지 발견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면, 그 일은 잊을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다. 바로잡아 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서두에 스쳐지나갔던 텔레비전을 때려부순 일의 전말은 그제야 드러난다. 인간이 자연의, 다른 생물의 생존을 위협함으로서 마침내 인간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있음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고. 그것은 대의가 아니다. 차라리 절박한 고백에, 속죄에, 사명에 가까운 것.

죽음과 좌절을 가로질러 생을 관통하는 기억들이 있다. 새벽의 하늘, 갈색 사과 같던 기린의 눈, 모든 것을 걸고 타오르던 여자와 기린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내던진 존슨 영감. 폐허조차 남지 못한 땅에서 떠나온 소년이 평생을 간직해온 이야기는 그렇게 노인의 편지로, 그조차 시간에 낡아버린 편지로, 끝끝내 닿을 수 있을까.

이 긴 이야기는 딱 한 마디, '유색인 전용 숙소'와 '일몰 마을'이 존재했던 때에, 대공황과 노숙인 마을이 있던 시대에, 어쩌면 지금까지도, 사람이 살기 위해 너무도 절실했던 한 마디를 위해 쓰여졌을지 모른다. 「생명은 사람의 것이든 아니든 다 같은 생명이란다, 얘야. 존중받아 마땅한 거라고」. 그렇게 어떤 순간은 평생이 된다고.

p.502 그리고 몇 년은 몇십 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계속 살아 나갔다. 사람들은 시간이 모든 상처를 낫게 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긴 인생을 살다 보면 앞으로 만들게 될 어떤 새로운 기억보다 더 많은 기억들을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특별한 순간이 올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의 내가 되게 만들어 준 순간이고, 가장 행복하고 좋았던 나를 회상하려고 할 때마다 언제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장 진실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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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만왕국 유산 시리즈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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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썩 선호하지 않는 표현이지만, 달리 표현할 법이 없다. 이게 데뷔작이라고? 속삭임과 고함, 생각과 말, '현실'과 초월을 이다지도 자유롭게 오가는 글을 써내는 신인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그것도 데뷔작으로, 삽화 하나 없이 500여 쪽 이어지는 글로 영화보다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읽다보면 알게 된다. 아, 이 작가는 잘 하는 걸 여태껏 잘해왔구나… 여태껏 봐온 작품들에서 초기작의 서투름을 찾을 수 없었던 건 시작부터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구나...

어쩐지 조금 원망스럽기까지하다. 지금까지 나온 작품들도 모자라 데뷔작까지 모조리 집어삼키듯 읽어버렸으니 이젠 뭘 뜯어먹는담. 다음 신작 발표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거나 언젠가의 기적처럼 미발표작 공개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지... 동시대 작가에게 도시, 국가, 문명과 신화의 경계를 넘어 범람하고 재창조할 작품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필경 크나큰 행운이리라.

p.7 나는 한때 나였던 자가 아니다. 그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나를 가르고 열어 심장을 잡아 뜯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기억해 내려 노력해야 한다.


이를테면, 그런 것들이다. 절망마저 무너트리는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솟아나는 것, 너무도 찬란해 되려 공포스러운 것. 환희와 경배 속에, 혹은, 그 이름 아래 죽어나가는 나약한 것들. '현실'을 바탕으로 제약 없는 상상을 수놓듯 펼쳐내고 그 세계에 맞서는 강인한 여성을 그려내는 일.

편협한 사고일지 모르나. 제미신의 작품에는 언제나 차별의 전복과 고발의 은유가 있다. 때로는 자연스러운 질서로, 때로는 정공법으로. 외모를 바꾸는 힘에 '어떻게'가 아닌 "어디서 난"을 묻듯이. 작중 계급과 질서 곳곳에서 이국적인 것은 무엇이든, 몸이든 물건이든 환경 그 자체든 착취해온 1세계 백인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드러난다.

p.322 저것은 사내들이 사용하는 동물적 수법이다.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등 털을 곧추세우는 것처럼. 그 이면에 실제로 공격적인 위협이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여자의 강점은 그런 위협이 진짜인지 아니면 허세에 불과한지 구분하는 데 있다. 지금은 진짜가 아니지만 사내들이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법이다.

p.347 나는 차마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일로 나를 나약하다 여길 것이다. 약한 게 아니야. 나는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인간적인 거지. 적어도 난 아직 인간이야.


낯선 세계관과 수많은 등장인물 탓에 용어와 관계도를 정리해가며 읽을 독자가 많을 줄로 안다. 방대한 분량을 생각하면 퍽 현망한 처사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폭포, 어쩌면 빛의 기둥처럼 쏟아져내리는 이야기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읽어나가기를 바란다.

정신없이, 폭력적으로 쏟아지는 정보들을 따로 정리하지 않고 쭉 읽어나가기를 바란다. 주인공이 그러했듯, 졸지에 끌려 들어온 낯선 세계의 정교한 질서와 매끄러운 풍경 이면의 잔인함과 폐허를 정면으로 목도하게 될테니.

p.208 "아라메리가 알아야 하는 게 뭐죠, 이모님?"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궁금했던 것이었다. 라스가 발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잔인해지는 법이지요. (...) 사람 목숨을 화폐처럼 사용하고 죽음 그 자체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법 말입니다."

p.394 "우리는 신의 자비 아래 살고 당신들의 변덕에 맞춰 살아가요. 심지어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신들의 싸움에 휘말려 죽어 나가죠. 만약에… 만약에 당신들이 그냥… 그냥 떠나면 우린 어떻게 되죠?" (...) "당신 자신이 될 때가 있긴 해요? 다른 사람이 당신을 보는 모습이 아니라, 진짜진짜 당신이요."


시대와 장소, 존재와 초월을 넘나드는 물결에 독자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마라. 그 무엇도 사랑하지 말며, 어떤 사랑도 사랑하지 마라. 그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지 마라. 살고 싶다면, 아니, 최소한의 자비라도 빌고 싶다면.

태양같은, 세계 전체와도 같은 이야기다. 감히 장담컨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그의 이름은 그 자체로 새로운 장르로 자리할 것이다. 기쁘고 두려운 마음으로 차기작을 기다려본다. 새로운 신, 파멸과 변화를 불러오는 그 이름을 경배하듯이.

p.130 "내 누이가 가장 좋아하는 무기는 사랑이란다. 사랑하는 게 있다면 사람이든 뭐든 조심하도록 해라. 누이는 그걸 공격할 테니까."

p.473 "내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했어?" 나는 속삭였다. "만물의 아버지시여, 정말로 그렇게 믿었군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건 우리 가족의 전통이니까."


*도서제공: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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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미술관 - 다정한 철학자가 들려주는 그림과 인생 이야기
이진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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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들어가려면 여성은 나체여야 하느냐'고 묻는 슬로건이 벌써 40여년 전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했을까. 그동안, 아니, 그 전부터, 세계는 여성에게, 딸, 누이, 언니에게 자신을 모욕하는 것들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라 얼마나 끈질기게 말해왔을까.

여성의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인간다움의 이야기와 중첩된다. '여성'이기 전에 인간이고, 인간다울 권리 이전에 '여성다워'지기를 요구받기 때문이리라. 슬프게도 근래의 급진적 변화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여성에게 인간이기 전에 여성이기를, 인간성을 뛰어넘는 여성이기를, '남성-인간'에 못미치는 존재로서의 여성이기를 요구한다. 아니. 강요한다.

p.43 산다는 것은 동사다. 어딘가에 가만히 놓여 있는 명사가 아니라, 걷고 달리고 고꾸라져 넘어지고 숨을 고르고 다시 일어서서 발을 내딛는. 그렇다면 이렇게나 무수한 동사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데 어째서 근육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일까. 딸들에게 울퉁불퉁한 근육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너희는 가만히 명사로 살아가라는 얘기다.

p.61 오늘날 메두사의 머리는 아직도 한스럽게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여성 정치인이나 지도자,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가진 여성들이 못마땅한 대중은 이들을 줄기차게 메두사의 이미지로 합성해낸다. 조롱과 혐오의 의미를 담아서 '끔찍한 괴물, 참수해야 할 대상'으로.


많은 이가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나누는 오랜 도식에 익숙할 것이다. 길들여졌다는 쪽이 더 어울릴, 치밀하고 공고한 모욕. 오래된 멸시, 협박에 가까운 그것은 시대에 따라 이름을 조금씩 고쳐가며 반복되었을 뿐, 사라진 적이 없다. 재생산의 수단, 성욕의 배출구, 노동력, 가재도구, 권력 없는 자, 마녀, 이성 없는 자인 동시에 이성을 흐리는 자, 숭배와 경멸.

이 모든 말들은 권력이 내세운 얼굴과는 달리 양분되지 않고 이체자로 기능했다. 그러면서 어느 것하나 여성 스스로에 의해 취해지지 못하고 그저 주어지는 것, 낙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면서도 마치 그 '행실'에 달린 것인양. 하늘이 내려준 숙명인 양. 생각할수록 놀랄만큼 효율적이고 강력한 고삐였던 셈이다.

p.83 마녀라는 단어는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대명사다. 나는 천사보다 마녀라는 단어가 더 사랑스럽다. 그 안에는 눈물과 멍자국도 있지만 아름다운 불꽃이 들어 있다. 세상이 나를 부당하게 대할 때, 너를 당치 않은 이름으로 부를 때, 우리를 어처구니없게 만들 때, 그 작은 불꽃들이 꺼지지 않고 아름답게 타오르기를 응원한다.

p.98 우리는 젊고 예쁜 것에 과도한 권력을 주는 경향이 있다.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모두 필연적으로 지는 게임을 만들어두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 게임에 열광하는 것과 같다. 나도 이 게임을 가끔 하고는 있지만, 이 전국민적 차원의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생각해보면 밑지는 장사인 이 게임을 내가 왜 하고 있는지 모두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좋겠다. 이 게임은 대체 누가 만들어 유통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그런 세상에서 여성은 슬퍼하고, 연약하며, 섬세하기 때문에 열등하다. 사람이기 때문에 열등하고,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을 견뎌내야 한다. '몸'인 동시에 몸을 가진 존재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떻게 딸에게, 자매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우리가, 그들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에게 이 세계를 사랑하라 말할 수 있을까. '안돼'와 '안 돼'로 점철된 세계에서 어떻게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을까. 과연 혼자 살기도 벅찬 세상에, 손을 내밀기를 멈추지 않아도 되는 걸까. 마음껏 주저하고 감각하는 사람이어도 좋을까.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고, 아니, 그래야 한다고. 이 책은 미술 작품에서 나타난 여성과 그를 다루는 시선을 넓고 깊게 확장해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가닿고자 하는 시도다. 제목처럼 딸에게, 자녀에게 건네는 말이다. 정답이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살아본, 조금 먼저 태어난 여성으로서 풀어놓는 경험담이다.

p.176 생긴 대로 존재할 수 있는 너그러움, 갈팡질팡과 우왕좌왕의 아름다움이 없다면 우리 삶의 조건은 잔인해진다. 매끄러움은 대체로 다정하지 않다. 포옹도 근본적으로 마찰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서로에 대한 저항력 덕분에 우리는 상대를 더 꼭 껴안을 수 있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것, 틈의 존재와 서투름의 미학을 불편해한다면 내 삶도 결국 불편해진다. 우리는 모두 서툰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서투르고 연약하지 말라고, 슬픔과 사랑 없이 홀로 영원히 강한 존재가 되라고 하는 대신, 서투름과 연약함, 슬퍼하고 사랑하며 기뻐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의 가치를 말한다. 고르지 않은 세상을 끊임없이 감각하는 소중함을 통해, 여성들에게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을 돌려주는 일이다. 처음부터 늘 그래왔듯이. 사람 바깥으로 불리면서도 한 번도 사람 아닌 적이 없었듯이.

내게 그랬듯, 누군가에게 이 책이 잔잔한 위로이자 응원으로 읽히면 좋겠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주고받는 한담처럼, 다정하게 읽히기를 바란다. 사는 일이 그렇지 않은가. 조금쯤 슬프고, 쉴새없이 감각하는 일이지 않은가.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처럼. 수많은 시선으로 읽히는 것처럼.

p.161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슬픔의 영역이 늘어나지만, 영역의 확장이 저절로 일어나지만은 않는다. 슬픔을 감각하는 능력을 부지런히 키우는 것은 어른의 책무이기도 하다. (...) 뒤에 오는 이들에게 눈물로 씻어낸 조금 더 맑은 세상을 전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을 '할 일'로 여긴다.

p.288끝이 새로운 시작이 되듯이, 뒤는 새로운 앞이 된다. 우리 삶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지 단계별로 단절된 시간들이 아니듯, 우리는 봄에서 여름을 보고, 여름에서 또 가을을 본다. 모든 계절은 무 자르듯 토막토막 잘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드랍게 포개 안고 있다. 봄꽃 향기 속에서 문득 여름의 태양 냄새가 느껴지고, 여름날 장대비 속에서 볼을 빨갛게 하고 있는 나뭇잎 하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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