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왕국 유산 시리즈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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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썩 선호하지 않는 표현이지만, 달리 표현할 법이 없다. 이게 데뷔작이라고? 속삭임과 고함, 생각과 말, '현실'과 초월을 이다지도 자유롭게 오가는 글을 써내는 신인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그것도 데뷔작으로, 삽화 하나 없이 500여 쪽 이어지는 글로 영화보다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읽다보면 알게 된다. 아, 이 작가는 잘 하는 걸 여태껏 잘해왔구나… 여태껏 봐온 작품들에서 초기작의 서투름을 찾을 수 없었던 건 시작부터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구나...

어쩐지 조금 원망스럽기까지하다. 지금까지 나온 작품들도 모자라 데뷔작까지 모조리 집어삼키듯 읽어버렸으니 이젠 뭘 뜯어먹는담. 다음 신작 발표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거나 언젠가의 기적처럼 미발표작 공개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지... 동시대 작가에게 도시, 국가, 문명과 신화의 경계를 넘어 범람하고 재창조할 작품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필경 크나큰 행운이리라.

p.7 나는 한때 나였던 자가 아니다. 그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나를 가르고 열어 심장을 잡아 뜯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기억해 내려 노력해야 한다.


이를테면, 그런 것들이다. 절망마저 무너트리는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솟아나는 것, 너무도 찬란해 되려 공포스러운 것. 환희와 경배 속에, 혹은, 그 이름 아래 죽어나가는 나약한 것들. '현실'을 바탕으로 제약 없는 상상을 수놓듯 펼쳐내고 그 세계에 맞서는 강인한 여성을 그려내는 일.

편협한 사고일지 모르나. 제미신의 작품에는 언제나 차별의 전복과 고발의 은유가 있다. 때로는 자연스러운 질서로, 때로는 정공법으로. 외모를 바꾸는 힘에 '어떻게'가 아닌 "어디서 난"을 묻듯이. 작중 계급과 질서 곳곳에서 이국적인 것은 무엇이든, 몸이든 물건이든 환경 그 자체든 착취해온 1세계 백인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드러난다.

p.322 저것은 사내들이 사용하는 동물적 수법이다.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등 털을 곧추세우는 것처럼. 그 이면에 실제로 공격적인 위협이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여자의 강점은 그런 위협이 진짜인지 아니면 허세에 불과한지 구분하는 데 있다. 지금은 진짜가 아니지만 사내들이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법이다.

p.347 나는 차마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일로 나를 나약하다 여길 것이다. 약한 게 아니야. 나는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인간적인 거지. 적어도 난 아직 인간이야.


낯선 세계관과 수많은 등장인물 탓에 용어와 관계도를 정리해가며 읽을 독자가 많을 줄로 안다. 방대한 분량을 생각하면 퍽 현망한 처사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폭포, 어쩌면 빛의 기둥처럼 쏟아져내리는 이야기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읽어나가기를 바란다.

정신없이, 폭력적으로 쏟아지는 정보들을 따로 정리하지 않고 쭉 읽어나가기를 바란다. 주인공이 그러했듯, 졸지에 끌려 들어온 낯선 세계의 정교한 질서와 매끄러운 풍경 이면의 잔인함과 폐허를 정면으로 목도하게 될테니.

p.208 "아라메리가 알아야 하는 게 뭐죠, 이모님?"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궁금했던 것이었다. 라스가 발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잔인해지는 법이지요. (...) 사람 목숨을 화폐처럼 사용하고 죽음 그 자체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법 말입니다."

p.394 "우리는 신의 자비 아래 살고 당신들의 변덕에 맞춰 살아가요. 심지어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신들의 싸움에 휘말려 죽어 나가죠. 만약에… 만약에 당신들이 그냥… 그냥 떠나면 우린 어떻게 되죠?" (...) "당신 자신이 될 때가 있긴 해요? 다른 사람이 당신을 보는 모습이 아니라, 진짜진짜 당신이요."


시대와 장소, 존재와 초월을 넘나드는 물결에 독자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마라. 그 무엇도 사랑하지 말며, 어떤 사랑도 사랑하지 마라. 그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지 마라. 살고 싶다면, 아니, 최소한의 자비라도 빌고 싶다면.

태양같은, 세계 전체와도 같은 이야기다. 감히 장담컨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그의 이름은 그 자체로 새로운 장르로 자리할 것이다. 기쁘고 두려운 마음으로 차기작을 기다려본다. 새로운 신, 파멸과 변화를 불러오는 그 이름을 경배하듯이.

p.130 "내 누이가 가장 좋아하는 무기는 사랑이란다. 사랑하는 게 있다면 사람이든 뭐든 조심하도록 해라. 누이는 그걸 공격할 테니까."

p.473 "내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했어?" 나는 속삭였다. "만물의 아버지시여, 정말로 그렇게 믿었군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건 우리 가족의 전통이니까."


*도서제공: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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