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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공익 - 왜 어떤 ‘사익 추구’는 ‘공익’이라 불리나
류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평점 :
공익광고, 공익단체, 공익 변호사, 공익에 반하여... 이 '공익'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해석하자면, 공공의 이익이다. 어느 한 집단이나 개인이 아닌 '전체의 이익'을 뜻하는 말이다. 이해관계가 촘촘히 맞물리고 경합하는 현대 사회에, '공익'이란 정말 가능한 개념일까?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정규직 전환, 대학 내 노동자 처우개선, 장애인 이동권 보장, 재개발지역 철거민 보상금 산정, 동성혼 법제화, 성평등 인권 교육... 인권투쟁인 동시에 이기적이라 손가락질 받는 공익투쟁이다. 이것들은 공익인가? 사익인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에게 피해를 주는가? 무엇이 '공공의 이익'으로 불리는가?
p.4 사람들이 말하는 '공익'도 결국 누군가의 '사익•이권'이다. 장애인의 사익, 성소수자의 사익, 아동의 사익, 난민의 사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공익'이라고 부르는가? 문언 그대로 해석한다면 '모두의 이익'이란 뜻인데 과연 누구에게나 이익이 되는 보편타당한 '공익'이라는 게 존재할까?
p.5 이렇게 보면 '공익'이란 허위의 개념이다. 그러나 '공익'이라는 표상이 우리에게 주는 어떤 이미지, 즉 의미의 '이데아'는 분명히 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이렇게 정리해 봤다. 아마도 사회에서 통용되는 '공익'이란, '사회적약자의 사익 중 현재의 공동체 다수가 그 추구 행위를 허용하는 사익'이라고.
우리 사회에서는 '법대로 하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정숙, 기립,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 신성한 권위 앞에 자연스레 공손해진다. 법의 심판, '정의의 철퇴'를 기대하는 마음은 수많은 법정(을 빙자한 멜로)드라마 장면들 곳곳에 녹아들어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법은 정의의 편이고, 국가조직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로 채워져 있는가? 항간의 믿음처럼, 기업은 소비자의 '눈치'를 보며 상식선에서 운영되는가? 국가권력은 돈 많고 힘 있는 자의 이권이 아닌, 사회 전체를 위한 '공정'을 수호하는가?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자들에게 무지하고 가난한 이들의 '떼쓰기'가 문제인가?
이런 사회에서, 과연 공익이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사전적 정의가 아닌, 실제 사회의 개인들이 이해하는 공공이란 대체 누구를 위한 '우리'란 말인가.
p.6 해당 시대, 해당 공동체에서 '공익'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그들이 가장 '이기적'인 목적으로 '과격한' 방식을 사용하여 처절히 투쟁해 승리했을 때, 그때를 우리는 역사가 한 단계 발전한 시점이라고 배운다. 이기적이고 과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일 수 있고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권력에 대한 불신이 필수적이다. 불신과 견제, 언제든 저항할 수 있는 권리와 그를 위한 지속적인 감시와 자정은 민주주의가 존속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것은 '건강한 불신'이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피해의 결과, '경험적 불신'이다.
그러므로 국민정서에 새겨진 공익은 권력의 눈에 '불온한' 자들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불온'한 사익에 둘러진 일종의 인증마크 같은 것이다. '이 정도는 봐줄 수 있다'는 것. 덜 가진 사람, 더 약한 사람이 가진 것 많고 힘 센 자와 한목소리로, '자발적으로' 말하기를 요구받는 사회. 대다수가 그런 사회에, 그렇게 살고 있다.
p.64 지금 우리 사회는 '낡은 것'은 죽지 않으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서 결국 죽지 않고 있으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으려 무관심하거나 무관심하여 태어나지 않는다. '낡은 것'들은 자꾸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둘러대면서 죽지 않고 버틴다. '새로운 것'들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때도 '다름'을 존중하며 결국 태어나지 않는 쪽을 택한다. 이렇게 '낡은 것'의 복지부동과 '새로운 것'의 복지부동이 곱해져서 '낡은 것'은 더더욱 강화한다.
p.146 우리는 모두 상대적 약자다. 잠재적인 권리침해 피해자다. 그래서 나 또한 언 제 쟁의행위를 할지, 집회 시위를 하게 될지 모른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를 위해 참고 힘을 모아야 한다. '불편함의 품앗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연대 의식이다.
저자는 다년간의 공익변호사로 활동하며 함께했던 이들의 역사와 권력이 국민을, 대중을 기만해온 사례를 변호인과 인권투쟁 현장의 목소리로 풀어놓는다. 우리 사회의 '공익'은 '공정'하지도 '공공의 이익'을 대표하지도 않았다고. 그 자리를 폭력과 방관이 채웠다고.
또한 일상에서 '현실적 여건'이나 '사회적 통념'을 이유로 밀려나고 지워지는 이들을 짚는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일이 커진다'며 미뤄지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익'을 추구할 수 있을까. 사익을 '허용'하는 이는 누구인가. 어떤 '사익 추구'는 선망되는 동시에 어떤 것은 떼쓰기가 되는가. 과연 우리는 진실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사회적 동물인 우리에게는 보다 함께, 보다 공정하게 나아가려는 이들가 연대할 사회적 책임이 있다. 이 책은 그 험난한 길을 상상할 책임을 일깨운다. 지금도 어딘가의 누군가는 차마 상상되지 않는 길에 있으니. 읽은 사람아, 가자, 알아버린 사람아, 함께 가자, 그렇게.
p.314 화해는 힘의 균형이 맞을 때 가능하고, 힘의 균형을 위해서 누군가 더 많이 양보해야 할 때가 훨씬 더 많으며, 화해를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한데 용서를 위해서는 사과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렇게 화해로 가는 길은 어렵다. 그래도 화해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이 가진 자의 양보, 잘못에 대한 사과가 있어야 한다. (...) 높게 있는 자가 낮게 임할 때 평화도, 화해도 구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공익'이라는 표현에 알맹이를 꼭 넣어야 한다면 바로 이런 평화, 이런 화해가 아닐까.
*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