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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과 함께 서쪽으로
린다 러틀리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0월
평점 :
이야기는 105살의 노인의 기록에서 시작된다. 그 자신의 이름처럼 100살 하고도 니켈(5센트)만큼을 더 살았다는, 창밖의 '걸'에게 연신 말을 거는 남자.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모두 쏟아부어 '너'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다는 남자. 그가 이토록 절박하게 전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엇일까. 누구를 향한 이야기일까.
가진 것보다 더 가진 것이 없는, 돌아갈 곳도 머무를 곳도 없는. 사람보다 떠돌이 개에 가까운 소년이 있었다. 우드로 윌슨 니켈, 이른바 우디. 그의 유일한 목표는 캘리포니아로 가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캘리포니아. 실향민의 낙원. 일자리가 넘쳐난다는 곳. 폐허조차 남지 않은 황량한 모래먼지의 땅을 떠나 살 수만 있다면, 정말, 살아 숨 쉴 수만 있다면.
p.40 대공황 시기에 굶주림이란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그냥 당연한 일상이었다. 먼지 폭풍이 가축들을 다 죽여 버린 후에, 더스트 볼 사람들은 프레리도그와 방울뱀을 잡아먹고 회전초로 수프를 끓여 먹었다. 다음 끼니에 먹을 수 있는 식량이 과연 어디에서 올 지를 전혀 알 수 없을 때에는, 먹는 것만이 곧 인생의 전부가 되고 우리는 그저 온종일, 매 순간 배고픔을 쫓는 야생 동물에 불과할 뿐이다.
p.365 나를 살아 있게 해준 동물들이 속에서부터 굶주린 채 죽어 갔고, 어쩌면 내가 되었을지도 모를 평범한 농부가 죽은 소의 배를 갈랐을 때 안에서 나온 건 먼지뿐이었다는 이야기들을. (...) 이 땅은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복수를 했고 대체 뭘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고, 포기할 시기마저 놓쳐 버렸던 때의 일들을.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차마 그만두지도, 놓아 버리지도 못했다고.
당장 먹을 것도, 쉴 곳도, 내일의 생존조차 담보할 수 없는 거리의 '평범한' 부랑아 우디 니켈의 일상에 폭풍이 들이닥친다. 언젠가의 모래폭풍을 떠올리게 하는, 헐떡이는 짐승의 눈이.
허리케인으로 무리를 잃은 새끼 기린들이 미국을 가로질러 동물원으로 이송된다더라. 트럭을 타고, 캘리포니아로. 만일 그들을 따라갈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꿈의 땅에 닿으리라. 그 일념으로 무모한 여정을 시작한다. 훔친 오토바이를 타고.
희망도 잠시, 훔친 오토바이는 못쓰게 되어버리고 다시 한번 좌절에 잠기려던 찰나, 기린을 책임지는 괴팍한 존슨 영감에게 반 애원 반 공갈로 임시 운전수 자리를 따낸 니켈은 다시금 위태로운 모험을 시작한다. 거짓말, 분노의 기억, 희망 없음을 품은 채, 그를 향해 코를 벌름대는 기린을 싣고.
p.97 사람들은 기린들이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린들도 분명히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때 기린들이 낸 소리는 끔찍한 허리케인을 겪은 기린들이 공포에 질려 끙끙거리고, 비명 지르고, 울부짖는 소리였다. (...) 그 소리는 내 가슴에서 요동쳤고 기린의 공포가 마치 나 자신의 공포처럼 느껴졌다. 나는 1초도 더 견딜 수가 없었다.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1930년대, 열악한 도로사정도 모자라 사막을 지나는 길에, 정체가 모호한 '빨간 머리'와의 비밀, 순간순간 엄습하는 기억. 폐허는 그가 가는 곳 어디나 따라붙는다. 기억하라고, 그래봤자 너는 별볼일 없는 가난뱅이 부랑자라고. 살인자. 최소한의 것조차 갖지 못한, 짐승.
상처가 인간의 모습을 한다면 바로 그일까. 기린과 함께하는 길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며 서서히 변화한다. 조건없는 환대, 기린으로 표상되는 희망, 오래전 잃어버린 따뜻한 가족의 모습, 생명을 그저 돈으로만 보는 이들까지. 가족의 죽음을 목도했던 소년은 어느새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대륙을 가로지른다.
여행의 종점에서 그에게 주어진 것은 새 삶의 희망이 아니었다. 별안간 끌려간 전쟁터에서는 다시 수많은 죽음과 주검에 파묻혔으며, 간신히 살아 돌아와서는 죽은 자를 지키는 야경꾼이 되어 다시금 죽음에 맞닿은 시간을 지나 그 자신의 사랑을 떠나보낸 후 죽음을 기다리는 현재가 이어진다. 과거와 현재를 반복해 오가던 이야기는 그렇게 현재로 돌아온다.
p.244 나는 단지, 〈하느님의 신성한 에덴의 우뚝 솟은 피조물〉과 함께 나아가다 내 본모습이 얼마나 끔찍한지 발견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면, 그 일은 잊을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다. 바로잡아 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서두에 스쳐지나갔던 텔레비전을 때려부순 일의 전말은 그제야 드러난다. 인간이 자연의, 다른 생물의 생존을 위협함으로서 마침내 인간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있음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고. 그것은 대의가 아니다. 차라리 절박한 고백에, 속죄에, 사명에 가까운 것.
죽음과 좌절을 가로질러 생을 관통하는 기억들이 있다. 새벽의 하늘, 갈색 사과 같던 기린의 눈, 모든 것을 걸고 타오르던 여자와 기린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내던진 존슨 영감. 폐허조차 남지 못한 땅에서 떠나온 소년이 평생을 간직해온 이야기는 그렇게 노인의 편지로, 그조차 시간에 낡아버린 편지로, 끝끝내 닿을 수 있을까.
이 긴 이야기는 딱 한 마디, '유색인 전용 숙소'와 '일몰 마을'이 존재했던 때에, 대공황과 노숙인 마을이 있던 시대에, 어쩌면 지금까지도, 사람이 살기 위해 너무도 절실했던 한 마디를 위해 쓰여졌을지 모른다. 「생명은 사람의 것이든 아니든 다 같은 생명이란다, 얘야. 존중받아 마땅한 거라고」. 그렇게 어떤 순간은 평생이 된다고.
p.502 그리고 몇 년은 몇십 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계속 살아 나갔다. 사람들은 시간이 모든 상처를 낫게 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긴 인생을 살다 보면 앞으로 만들게 될 어떤 새로운 기억보다 더 많은 기억들을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특별한 순간이 올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의 내가 되게 만들어 준 순간이고, 가장 행복하고 좋았던 나를 회상하려고 할 때마다 언제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장 진실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도서제공: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