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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상실은 상처를 남긴다. 존재가 사라진, 어떤 이유로든, 빈 자리에는 벌겋게 벌어진 상처가 남는다. 때로는 오래도록 아물지 못한 채 생생하게 피를 흘리고, 때로는 농양은 째고 짜내야 가라앉듯 회복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또, 어떤 상처는, 대부분이 그러하듯, 시간이 지나고 흉터로 내려앉으면 그 땐 그랬지, 하고 회상하게 하는, '지나간 것'이 된다.
가장 영구적인 상실,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일방적이고 영구적인 상실로 끝나버린 관계의 가장 잔인한 점은, 부재하는 이에게서는 그 어떤 답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재하는 존재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부재의 자리를, 공백처럼 보이는 공간이랄지, 그것을 채우는 것은 그의 말과 행동이 남긴 기억들, 흔적 뿐이다. 남겨진 것들이 그의 존재를 증명한다. 부재와의 싸움은 존재와의 그것보다 배는 어렵고 쉬이 흩어져버린다.
그리하여 죽음으로 인한 상실, 제각기 남은 인생을 움켜쥔 채 '그'가 부재하는 세상에 남겨져버린 이들에게 그것은 절대적인 물음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영원히 얻을 수 없는 답, 이해할 수 없는 질문, 딱 그 존재만큼의 부피와 질량을 갖는 물음표.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은 주인공, 핼이라고 불러달라는 해리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이야기는 '피고'로 시작된다. 마치 일기처럼, 아니, 그보다는 말처럼. 화면 너머로 눈을 마주치고 느리게 풀어가는 기억처럼.
다소 우울하지만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수줍음 많고 서툴고 조금 비딱한,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될 지 혼란스러울 딱 그 나이의 소년. 어째서 그는 가장 슬퍼하는 동시에 가장 미움받는 자인가. 어째서 모든 해명을 거부하는가.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 그가 겪은 일을, 그가 한 일을 그의 이유로 설명하는 것. 그의 방식으로.
어느 여름날, 파도처럼 밀려와 기꺼이 빠져들었으나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끝난 사랑이 있었다. '그'는 그에게 세계였고, 전부였다. 순간은 영원이었고, 함께하는 시간은 찰나의 영원이었다. 사랑이었다. 아닐 수 없이. 이유 없이. '그'라서, '그' 자체로 완전한 이유였기에.
p.213 내가 분명히 알았던 건 만나고 또 만나도 부족하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있어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를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의 손길을 느끼고 싶고 말소리를 듣고 싶고 그에게 이야기하고 싶고 그와 함께 많은 일을 하고 싶었다. 언제나. 밤이고 낮이고. 4,233,600초 동안 내내.
완벽한 관계는 없는걸까. 작은 균열은 순식간에 넘을 수 없는 선이 되어버리고, 딱 한 번, 오로지 단 한 번의 이별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그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그걸로 끝이었다.
마지막이 된 이름에 응답하지 못한 죄책감과, 터져나오지 못한 분노를 담아 그는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고자 한다. 그의 방식으로, 그와 '그'의 이야기로. 다른 이유는 없다. '그'였기에.
이 긴 글은 고작 치기어린 자기 위안에 불과할까. 살면서 한 번쯤 "재수가 없어" 일어날 수 있는 일에, 섬세한 영혼을 흉내내는 풋내기의 자만에 가까울까. 혹은 미처 제대로 끝내지 못한 관계의 이야기를 다시 씀으로서 나아가는 회복의 여정일까.
p.209 "약속할게." 내가 말했다. '오직 너를 위해서. 다른 이유는 없어." 그러자 멍든 입 위에 찢어진 입술이 포개지면서 우리의 맹세는 봉인되었다. 옛이야기 속 소년들처럼 손가락에 피를 내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잘 이별하기 위한' 애도의 과정이었을까. 미처 제 때 전하지 못한 인사를, 거부할 이유 없는 맹세를 마지막까지 지켜주고자 한 사랑이었을까. 그래. 패주고 싶은 마음, 믿을 수 없는 순간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다시금, 모든 관계에서 상실은 상처를 남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통증을 수반하며, 잘 아물지 못한 상처는 오히려 덧나고 번져 오래도록 앓기도 한다. 잘 아무는 것이 중요하다.이야기는 지워지고 다시 쓰이기를 반복하고, 시간을 들여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독자는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은 무엇인가. 기록이다. 서사고, '잘 회복되기'를 시도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를 이렇게 부른다. 애도, 라고. 남겨진 사람이 남은 시간을 잘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잘 보내주는 일, 딛고 서는 일. 부디 이 책이 닿는 모든 독자에게 끝나지 못한 '지금'에서 벗어나는 이야기가 쓰이기를 바란다. 그 자신의 시간이, 삶이 남아있으니.
p.348 이것은 더 이상 현재의 내가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나는 지금까지 나를 만들어온 것들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중요한 단 한 가지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역사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도서제공: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