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발명 교유서가 어제의책
린 헌트 지음, 전진성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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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왔다가 죽지도 않고 또 왔다는 무언가처럼,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그것, 때로는 뉴스 댓글, 때로는 커뮤니티, 더 흔하게는 심심풀이로 시작해 핏대 세워가며 오가는 고성으로 끝나는 대화 자리를 뜨겁게 달구는 그 주제라 하면 역시, 아무래도, 재소자와 난민의 처우일 것이다. 일례로, 노르웨이 감옥의, 한국기준으로 자뭇 호화로운 생활 여건은 매번 부러움 반, 분노 반을 사는 듯하다.

혹자는 수십씩 하는 월세방보다 훨씬 낫다며 차라리 평생 수감되겠다 하고, 혹자는 "세금도 안 내는 이들에게 인권이 어디 있느냐"며 내 세금이 그런 데 쓰일 수 없다 화를 낸다. 전자는 자조적인 농담으로, 후자는 혐오와 현실의 어려움을 이유로 말해지는데, 교정시설과 난민의 처우가 그 사회에서의 인권의 최저선 격임을 생각했을 때, 한국사회에서는 그마저도 보장받기 어렵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면모라 하겠다.

p.27 인권은 정치적 내용을 획득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인권은 자연 상태에서가 아니라 사회에서 인간이 갖는 권리이다. 신의 권리나 동물의 권리에 반대되는 권리가 아니라 인간 서로서로에 대한 권리인 것이다. 따라서 인권은 세속의 정치세계에서 보장되며 그것을 확보한 이들의 적극적 참여를 요구한다.

p.37 자율성도 공감도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배워서 터득해야 할 기술이었다. 그리고 권리들에 대한 '받아들일 만한' 제한은 도전받을 수 있었으며 실제로 도전받아왔다. 권리들은 단번에 정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의 감정적 토대가 부분적으로는 권리 선언에 위배되면서까지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권리들은 과연 누가 그것을 가지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이 부단히 변화하므로 문제제기에 개방적이다. 인권 혁명은 말 그대로 진행중이다.


인간이 인간이기에 박탈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권리, 누구도 인간이기를 부정당하지 않을 권리, 지금에 와 알려져있듯, '천부' 라는 수식어처럼 당연하게 여겨지는, 인권. 그것은 당연하지도, 처음부터 주어지지도 않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에게 공감하지만, 인간의 범주와 인간 권리의 반경에 대해서는 본능 이상의 이해력과 새로운 시야가 필요했다.

따라서, 적어도 지금의 서구식 '인권' 개념은 매체와 문화요소의 발전과 함께 상상되고, 발명되었으며, 수많은 공방을 거쳐 수정되고 또 확장되어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 기반에는 사소설의 등장, 초상화의 대두, 시민혁명과 독립, 계급투쟁의 지난한 역사가 있다.

p.69 독자는 일상의 감성적 밀도를 이해하고, 자신 같은 대중이 스스로 도덕적 세계를 만들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인권은 이 같은 감정들이 뿌려진 온상에서 자라났다. 인권은 오직 대중들이 타인들을 근본적으로 동등하게 생각하도록 배울 때만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허구적이긴 해도, 드라마에서만은 현재적이며 친숙하고 평범한 등장인물들과 자신을 조금이나마 동일시함으로써 비로소 평등을 배우게 된다.

p.91 미국 내과의사 벤저민 러시가 1787년에 주장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다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범죄자마저도 "우리의 친구와 지인들과 똑같은 재료로 구성된 영혼과 신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그 재료란 뼈의 골질이다."


그렇다면, 가히 혁명에 비견되는 현시대의 인권의식은, 우리는 그만한 이해를 갖추고 있는가? 현대인으로 하여금 타인의 인간됨을, 존재조차 모르는 타인이 나와 같은 권리를 가진 존재임을 상상할 능력을 기르게 하는 데에 미디어는 그만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제도와 미디어는 변화와 계몽의 선봉이었는가?

우리 자신은 보다 인간이 되었는가? '우리 인간'의 범주는 "충분할"만큼 확장되었나? 차별과 혐오는 이성과 논리로 "해명"되었는가?

p.128 법률적으로 인가된 고문이 종식된 것은 재판관이 그것을 포기했거나 계몽사상이 그것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다. 고문이 종식된 것은 고통과 인격에 대한 전통적 틀이 깨지고 한 단계 한 단계 새로운 틀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틀에서 개인은 자신의 신체를 소유하고 신체의 분리와 불가침성의 권리를 갖는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열정, 감성, 그리고 동정심 역시 인정해주었다.

p.212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이라는 바로 그 관념이 부지불식간에 더욱 악의적인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반유대주의의 포문을 열었다. 전 인류의 자연적 평등에 대한 포괄적인 요구는 동시에 자연적 차이에 대한 전 세계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켜, 전통주의적인 반대자들보다 더 강력하고 극악한 인권 반대자들을 양산했다.


이 책은 인권 개념의 통사가 아니다. 이상향으로 가는 길을 그리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성공보다는 실패, 승리보다는 좌절의 기록이다. 넘어지고 주저앉은 투쟁의 역사에 가깝다. 독자는 역설적으로 그 흔적에서 가능성을 볼 것이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닿지 못하는 곳, 그림자, 그러나 끊임없이 도전해온 자리에 살아가는 우리는, 만족 내지는 좌절 대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어떤 인간도 다른 이보다 덜 인간적이거나 더 인간적일 수 없다. 어떤 인간도 인간임을 부정당할 수 없는 세계에 우리는 이미 도달해있다, 라고. 언젠가 지금의 도전은 언젠가의 일상이 될 것이라고. 수없는 퇴보에도 여전히 진행형인, 이 완성되지 않을 '발명'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p.17 우리 시대의 새로운 인권 개념은 인간이라는 사실 외에는 어떠한 권리도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호소할 수 있는 권리, 다시 말해 소속 여부와는 상관없이 인간이라는 출생의자격을 공유하는 미지의 타자에게 부여된 권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다수 국민의 권리이기 보다는 오히려 국민으로분터 보호되어야 할 소수자, 약자, 이방인의 권리이다. 인권이란 한마디로 '권리를 결여한 사람들의 권리'다.

p.238 인권은 악에 대항하는, 우리가 공유하는 유일한 보루이다. 우리는 인권에 대한 18세기적 전망을 아직도 지속적으로 개선해나가야 한다. 특히 「세계 인권 선언」에서 말하는 '인Human'이, '인간의 권리 rights of man'에서 '인간man'이 갖는 모호함 같은 것을 남겨두지 않도록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권리의 폭포수는 그것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야 하는지를 두고 항상 큰 갈등을 겪게 마련이지만 쉼없이 계속 흘러간다.


*도서제공: 교유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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